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41화 (41/128)

# 41

41. 뿌린 대로 거두다 (1)

토끼 눈을 뜬 한 팀장이 당당한 표정의 은수를 퍼뜩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겠단 거야?’

저를 향한 은수의 비릿한 미소에서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그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갑작스레 끼어든 은수 덕분에 어느새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져 있었다. 그저 조용히 처분을 받길 기다리고 있던 현재도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놀란 눈치였다.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문지르던 김 이사가 은수를 향해 물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뭔가.”

휴. 이제 정말 내 차례인가.

한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저에게로 꽂히는 것을 느낀 은수는 잠깐 멈칫했다.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밑밥은 완벽하고 총알도 충분하다. 이제 남은 건 조준 사격뿐이었다.

눈을 내리깐 채 말을 고르며 숨죽이던 그녀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엄청난 고민을 거듭하고 드리는 말씀임을 모두 양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어쩌다 보니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하게 되었지만, 누군가를 두둔하거나 악의적으로 끌어내리기 위함은 절대 아닙니다. 어차피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드러났을 사안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녀의 또렷한 눈빛이 이곳저곳을 살폈다. 모두가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다만 한 팀장만은 예외였다. 제 얘기임을 이미 직감한 그는 초조함을 숨기며 괜히 모른 척 은수의 시선을 피했다.

“무엇보다, 사건의 전후 관계를 따져 보기 위해서는 저의 참견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현재 씨가 잘못을 했다는 점은 방금 전 말씀드렸듯, 저도 충분히 인정합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죠.”

“…….”

“하지만…….”

좌우를 번갈아 가며 고루 눈길을 두던 그녀가 어느 순간, 나 몰라라 딴청을 피우고 있는 한 팀장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그녀의 입꼬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 대상이, 진즉에 회사에서 쫓겨나야 했을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

“투명인간을 두들겨 팰 순 없잖습니까? 그럼 이런 불미스러운 일도 당연히 없었을 테구요.”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닿자마자 한 팀장은 필요 이상으로 발끈했다.

“……뭐, 뭐야? 지금 내 얘기야?”

“민 팀장,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해고라니?”

일단, 주목받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그녀는 부러 싱긋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이 회사에 몸담았던 지난 9년 동안, 나름대로 제 한 몸 바쳐 회사에 전력투구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잡음들도 있었구요. 미혼에 여자,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더 잘나간다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불평등과 차별, 과한 관심들도…… ‘나 하나만 참으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묵과해 왔습니다.”

“…….”

“그건 결코 제가 보살이거나 착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 봤자 결과적으로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해서였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왜 진작 이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으면서도.

하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연소 팀장까지 오를 정도로 능력 있고 당찬 그녀였지만, 결국은 그녀도 힘없는 여직원들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아마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앞으로도 쭉 모른 척, 아닌 척하며 참고 살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더 귀찮고 싫었을 것이므로.

즉, 도현재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하지만 저는 며칠 전 생각을 바꿨습니다.”

“…….”

“이걸 듣고 나서부터요.”

그녀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 하나를 꺼내 ‘음성 녹음’을 켜고는 모두가 볼 수 있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가장 위에 있는 파일의 이름은 ‘025’였다. 은수의 기다란 두 번째 손가락이 하단의 재생 버튼을 가볍게 터치했다. 그녀가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왁자지껄한 소음이 휴대폰에서 터져 나왔다. 휴대폰으로 녹음한 것이어서 음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러 명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아마도 매우 가까이서 녹음된 듯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회사엔 하여튼 이쁜 애들이 없어. 안 들어와. 죄다 공부만 하다 왔는지 촌티만 좔좔 흐르고. 좀 이쁘다 싶으면 다 성괴들이고. 회사를 다니는 낙이 없다, 증말. 돈만 아니었으면 진작 때려치우는 건데.]

두렵기는 했지만 이게 뭔가, 하는 호기심에 잠자코 파일을 듣고 있던 한 팀장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그것은 현재와 싸웠던 그날, 자신이 했던 말들이었다.

아니, 민은수가 어떻게…… 이걸 녹음해서 가지고 있단 말인가?

눈치도 없이, 휴대폰 속 한 팀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고 돈이나 많이 주길 하나. 승진도 느리고, 돈도 짜고. 어떤 년은 서른하나에 팀장 달았다고 째기나 하고.]

[……누구 말씀이십니까?]

[누구기는? 민은수지.]

[아…… 마케팅 1팀 팀장님이요?]

그 대목에서, 듣다 못한 현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다시 듣기도 싫다는 표정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들은 탓에 아무렇지도 않아진 은수는 옆에 앉은 그를 문득 쳐다보았다.

[옛날엔 그나마 얼굴이 좀 반반해서 잘해 줬더니, 이젠 직급 같아졌다고 사람을 업신여기기나 하고. 솔직히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누구 앤지도 모르는 애를 배 가지고 그게 무슨 추태야?]

[…….]

[내가 그렇게 꼬실 때는 콧방귀만 살살 뀌더니. 그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술이나 왕창 멕여서 모텔이나 데꼬 가는 건데. 크크크.]

[……그만 좀 하십시오.]

현재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한 팀장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취기가 느껴졌다.

[뭐, 인마?]

[……여직원들은 동료 아닙니까? 추태 어쩌고 하시면서, 정작 아까부터 추태를 부리고 있는 건 본인이라는 걸 왜 모르시는 겁니까!]

[……뭐?]

[…….]

[아니, 이 새끼는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 너 이름 뭐야!]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도 현재는 심지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소리를 냈다.

[자중 좀 하십쇼! 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직원들 모아 놓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현재가 불을 활활 지피게 되면서 소음은 더더욱 시끌벅적해졌다.

휴대폰을 움직이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윽고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증폭된 이 대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현재 씨, 잠깐만……. 진정 좀 하고…….]

그렇게 소리는 멎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한 팀장을 제외하고, 모두가 은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폰을 다시 들어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는 여유롭게 웃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

“저는 친목 도모를 위한 자리였다기에, 당연히 사나이들의 순수하고 건전한 모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

“그런데 실상은…… 이렇더군요.”

궁지에 몰린 쥐. 지금 한 팀장의 표정은 딱 그 짝이었다.

웃기게도 이런 사람들은 뒤에선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막상 당사자 앞에 서면 찍소리도 못 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망신을 주고 계몽시키는 것도 이제는 재미없고 시시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이 인간만큼은 끝장을 보게 해 주고픈 충동이 일었다. 왠지 모르게.

“지금껏 콧방귀나 뀌어서 죄송합니다. 한 팀장님이 저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네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절 안주 삼으실 줄도 몰랐고요.”

“…….”

“이 파일을 녹음한 직원한테서 들은 바로는, 남자 직원들끼리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절 포함한 여직원 전체를 가지고 늘 성희롱을 일삼으셨다고 하던데.”

“…….”

“사실입니까?”

어느새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그가 우물쭈물했다.

“……아니, 난 저…….”

“…….”

대체 뭔 소릴 하나 두고 볼까. 은수가 가자미눈을 하고 한 팀장을 째렸다.

그들 사이에는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 팀장은 어떻게 해야 이 궁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실상 이제 그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리고 그도 그것을 늦게야 깨달은 듯했다.

심기일전한 그가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는 적반하장으로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래! 사실이다. 근데, 그게 뭐?”

“…….”

“대놓고 한 것도 아니고, 남자들끼리 술 먹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고작 이딴 걸로 뭘 어쩌자는 건데?”

……이렇게 애잔할 수가.

이제는 애잔하다 못해 불쌍할 지경이다. 쓴웃음을 지은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펴며 말했다.

“몇 년간 성희롱 예방 교육 다 헛들으셨네요. 소용이 하나도 없네.”

“…….”

“버팅기고 싶으신가 본데, 이거 아니어도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

“한 팀장님 육성이 담겨 있는 파일들만 한두 개가 아니고, 저에게 보내셨던 문자, 전화, 사내 메일 등, 절 지속적으로 성희롱한 정황들도 다 확보해 놓았습니다. 증인들도 물론 있고요.”

“…….”

“성희롱이라는 특성상 고소는 안 돼도, 이 정도 증거면 민사 소송까진 가능할 것 같던데.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니시는 건 뭐, 시간문제고요.”

“…….”

“어떻게, 그렇게 해 드릴까요?”

……맙소사.

저가 사랑하는 그녀가 매사에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에 이런 식으로까지 철저하게 대처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현재였다. 혹시나 그녀가 상처받을까, 전전긍긍했던 저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한 팀장을 그는 무척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했다.

“……지, 지금 협박하는 거야?”

“…….”

“그런다고 저 새끼가 날 친 게 없어져? 없어지냐고!”

아, 그거.

하필이면 깜빡할 뻔했다는 듯, 그녀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 말씀 잘하셨네요. 안 그래도 좀 알아봤는데, 한 팀장님이 현재 씨를 먼저 치셨다더라구요?”

“…….”

“그런데 제가 간과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폭행 사건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사항은 ‘누가 먼저 때렸나’보다 ‘누가 더 큰 피해를 봤나’라는 거더라고요.”

순간 한 팀장의 눈빛이 돌연 의기양양하게 변했다. 적어도 부상 수준에 있어선 현재보다 제가 중하리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했다.

그러나 은수는 그의 실낱같은 희망을 무참히 잘라내 버리려는 것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병원에서 진단은 받으셨나요? 보아하니 팔다리나 뼈는 멀쩡하신 것 같은데.”

“…….”

“말씀도 잘하시는 걸 보니 이가 부러지신 것도 아닌 것 같고요. 그 정도면 고소도 안 되시겠네요.”

“…….”

“어쨌든 뭐, 많이 안 다치신 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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