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40. 나한테 오면, 안 돼요? (3)
뒤늦게 사건을 알게 된 은수는 혼란스러워졌다.
기껏 해 봐야 질 안 좋은 친구와 다툰 것쯤이겠거니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 부서의 팀장과 치고 박고 싸워서라니!
더군다나 은수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동안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한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현재 씨, 잠깐 나 좀 봐요.”
“…….”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은수는 바로 현재를 호출했다. 그리고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팀장실로 따라 들어왔다.
뒤를 돌아 현재의 얼굴을 확인한 은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날 이후 그의 얼굴을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키스를 해 버린 다음 날 아침, 소파에는 그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새벽에 술이 깨자마자 급하게 가 버린 듯했다.
주말에도 그는 간간이 연락만 할 뿐, 집에 찾아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맨정신에 그녀를 만나면 상처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무턱대고 해 버린 키스에 대해서도.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난 덕인지 상처들은 어느 정도 아문 상태였다.
추궁을 하려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본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그의 얼굴을 보니 그날 처치를 신속하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그에게 질문을 하기 전, 은수는 침착해지기 위해 한번 심호흡을 했다.
“도현재 씨.”
“…….”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려는지, 알죠.”
“…….”
“현재 씨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거래요. 도대체 한 팀장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올 게 오기라도 했다는 듯, 어두운 얼굴을 한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자시고, 난 그날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은 건데.
답답한 마음에 은수는 조목조목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현재 씨가 먼저 때렸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한 팀장님이 먼저 현재 씨를 때린 거예요?”
“…….”
“왜요?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건데요.”
그는 시종일관 눈을 내리깐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렇게 과묵해진 걸까. 은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평소의 그라면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묻는 족족 대답해 주었을 텐데. 아니, 묻기도 전에 알아서 말해 주었을 것이다. 도현재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마치 뭔가를 함구하기로 작정한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은수는 애가 탔다.
“미안한데, 속 시원하게 좀 답해 주면 안 돼요? 나 지금 너무 답답해서 죽겠거든요.”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게 다예요?”
적어도 이런 사고를 쳤으면 가타부타 할 말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은수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물론 사적인 감정으로는, 재수탱이 한 팀장을 한 방 먹여 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의 사내 위치를 고려하면 그건 절대 칭찬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비록 부하 직원이고 심지어 신입 사원이기까지 했지만, 그녀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아이의 아빠인 그를 최대한으로 존중해 왔다. 하지만 직속 상사로서 잘못을 저지른 부하 직원을 혼내는 건 그녀에게 주어진 책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를 감싸 줄 순 없는 게 당연했다.
안쓰러운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은수는 일부러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싸우게 된 건지 난 잘 모르지만, 이유가 뭐였건 부하 직원이 상급자하고 그렇게 싸운 건 잘못한 거예요. 알죠.”
“……예.”
“현재 씨는 어쨌든 내 직속이고, 이 일의 책임은 나한테도 있어요. 그러니까 난 내막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 변호를 해 주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
“정말, 말 안 할 거예요?”
“죄송합니다.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받겠습니다.”
그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
끝까지 말 안 해 줄 생각인가 보네. 징계고 뭐고, 그렇게 자존심이 우선인가. 이러다 정말 중징계를 당할 수도 있는데.
솔직히 은수로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어른답지 못하게 행동한 것을 미주알고주알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터놓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대답하기 싫다는 사람을 계속 붙잡고 억지로 말하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근무 시간이기도 하고.
은수는 밀려드는 섭섭함을 숨기며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현재 씨의 뜻이 정 그런 거라면 알겠어요. 이만 나가 보세요.”
“……예.”
간결하게 목례를 한 그가 돌아서서 팀장실을 나갔다.
세미 정장을 입은 널찍한 등짝은 늘 보던 그대로인데, 어째서 그 모습이 이리도 쓸쓸해 보이는지.
‘자기가 징계 받겠다는데, 할 수 없지…….’
하지만 현재가 이렇게 나온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그녀는 아니었다.
그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한 팀장을 추궁하면 될 일이고, 그것도 안 되면 목격자들을 수소문하면 될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구제할 방안을 마련하리라 생각하며, 은수도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팀장님.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승환 대리의 목소리였다.
“그럼요. 들어오세요.”
자리에 앉은 은수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대리를 반갑게 맞았다.
“어, 이 대리. 무슨 일이에요?”
손에 뭔가를 많이 들고 오기에 밀린 결재를 맡으러 온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웬일인지 그답지 않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요?”
말할 듯 말 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방금, 현재 씨하고 나누셨던 얘기.”
“…….”
“한 팀장님과 연관된 거 맞습니까?”
유레카.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네. 혹시 이 대리도 알아요?”
“……그럼요. 제가 현장에 있었는데요.”
조금 의외였다. 어디서 싸운 거였기에 이 대리도 아는 걸까. 그녀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현재 씨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해 주던데.”
“그게…….”
우물쭈물하던 이 대리는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이 얘기 하는 거, 현재 씨한테는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방금도 일 얘기로 말씀드릴 거 있다고 하고 온 거니까요.”
“…….”
“현재 씨는 아마 팀장님 생각한다고 그랬을 겁니다. 팀장님이 아셔 봤자 좋을 얘기가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알아봤자 좋을 게 없는 얘기. 그리고 그가 때린 사람은 한 팀장.
……뭔가 대충 짚이는 게 있었다.
“현재 씨는 사실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거 말씀드리려고 온 거예요.”
“…….”
“처음부터 징계 받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랍니다. 그래도…… 팀장님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 대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앉아서 자세히 좀 말해 봐요. 처음부터요.”
* * *
“이건 당연히 중징계감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부하 직원이 타 팀 팀장을 이런 식으로 팹니까?”
“한 팀장, 알겠으니까 진정 좀 하고…….”
“제가 지금 진정을 하게 생겼습니까?”
현재의 징계 여부와 관련해 모인 자리. 현재와 마찬가지로 얼굴 구석구석이 상처투성이인 한 팀장이 성난 황소처럼 날뛰는 중이었다.
선빵을 때린 건 한 팀장 쪽이었다고 했지만, 현재의 반격이 거세긴 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상처가 깊은 쪽도 한 팀장인 것처럼 보였다.
김 이사를 비롯해 은수와 현재, 참고인으로 불려 온 지훈과 이 대리 등이 한자리에 모여 조용히 한 팀장의 투정을 듣고 있었다. 분기탱천한 그는 현재를 힘껏 노려보며 일갈했다.
“이렇게는 일 못 합니다. 무조건 징계 처분 내려 주십시오. 정직이든, 감봉이든!”
저런. 보다 못한 김 이사가 중재하려 나섰다.
“감봉은 그렇다 쳐도 정직은 좀 심하지 않나. 보아하니 도현재 씨가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한 것도 아닌 듯한데.”
“저는 이렇게 다 죽어 가고, 저쪽은 멀쩡한 거 안 보이십니까? 알맞은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신입 사원 무서워서 어디 회사를 다니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듯, 현재가 시선을 떨어뜨린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니 응당 징계를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빠른 건 은수였다.
“한 팀장님, 저도 같은 동료이자 현재 씨를 담당하고 있는 팀장으로서 한 팀장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현재의 사과에 씩씩거리던 한 팀장은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어 은수를 쳐다보았다.
몇 년 동안 같이 일을 했지만 은수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하기야, 그동안은 그녀가 이렇게 사과해야 할 일도 없기는 했지만.
한 팀장은 은수의 말에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민 팀장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민 팀장이 시킨 일도 아닐 텐데.”
“…….”
“마땅한 처분만 내려지면 저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겁니다. 이렇게 말로만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김 이사가 고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럼, 징계 수준을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좋겠나. 자네들은 어찌 생각해?”
다소 무거운 사안이다 보니 다른 이들은 쉽게 말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 사람만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엄연히 상급자를 폭행한 것은 중죄입니다. 같은 팀장 신분으로서 가벼운 처벌은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최소 정직 처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리와 현재, 은수의 눈길이 죄다 지훈에게로 몰렸다. 한 팀장은 ‘나에게도 아군이 있었구나!’ 같은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흠, 그래?”
김 이사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우씨. 이렇게 가다간 진짜 일이 우습게 되는데.
지훈 쪽을 쏘아보며 은수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럼, 정직 1개월 정도로 결론 내는 게 어떠합니까. 그래도 신입 사원인데, 더한 처분은 도 사원에게도 너무 가혹한 것 같고…….”
“이사님.”
불현듯 은수의 단단한 목소리가 김 이사의 말을 갈랐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은수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김 이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방금 전과 같이 저자세로 고분고분하게 사과만 할 것 같던 은수의 눈빛이 갑자기 돌변한 시점이었다.
그녀는 사건의 중심에 등판하기로 마음먹었다.
현 상황에서 그의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는 저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도현재 씨의 징계 여부를 논하기 전에,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민 팀장이?”
“예.”
그러고는 주위 사람들을 맴돌던 은수의 냉철한 시선이 곧장 한 팀장 쪽을 향했다.
‘네 멋대로 짜인 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맥없이 끝낼 순 없지. 안 그래?’
차분한 코랄 빛 립스틱이 발린 은수의 입술이 묘한 곡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