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39. 나한테 오면, 안 돼요? (2)
“……어디서 이렇게 술을 마셨대.”
이렇게 술 취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그날 밤 상황과 대비가 되는 듯도 하고.
은수는 일단 재빨리 장을 뒤졌다. 어디다 놔뒀는지 모를 구급상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현재 씨, 잠깐만 일어나 봐요, 약 바르게.”
“…….”
“응?”
빨리 찾는다고 찾았는데, 고새 잠들었나.
한참을 못 알아듣고 인사불성이던 그는, 그녀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자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살다 보니 아주 별일을 다 겪는구나.
구급상자를 테이블에 펼쳐 놓은 은수가 빠르게 소독약과 연고를 찾아냈다.
무엇보다 흉이 지면 큰일이었다. 이 상태로 출근하면 안 그래도 이상한 소리 다 들을 텐데.
연장처럼 소독약과 면봉을 손에 쥔 그녀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좀 따끔할 거예요. 참아요.”
“…….”
소독약을 묻힌 면봉이 상처 위를 약하게 두드렸다.
술에 취해 있어도 아픈 건 아픈 건지,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찡그린다. 결코 웃을 상황은 아니지만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만날 애늙은이 같더니, 이제야 좀 제 나이 같아 보여서.
아니, 지금은 오히려 아주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귀엽긴.
“웬 상처가 이렇게 많아. 누구랑 싸운 거예요?”
“…….”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누가 이렇게 치고 박고 다니래요.”
말은 우스갯소리처럼 했지만, 사실은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상처를 내고 다닐 사람이 전혀 아닌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소독을 다 마치고 그 위에 연고를 바를 때까지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일회용 밴드의 포장을 뜯고 있을 때, 비로소 그가 입술을 떼었다.
“……은수 씨.”
그가 부르는 그녀의 이름에서, 처음으로 알싸한 술 냄새가 났다. 매우 생경한 느낌이었다.
‘아깐 팀장님이라더니, 지금은 또 이름을 부르네.’
알코올 탓인지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럼에도 그는 기를 쓰며 은수와 눈을 맞추었다.
“네, 왜요.”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은수는 상처 위에 밴드를 붙이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꼭,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처럼.
“왜요오.”
“…….”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그녀가 눈가에 난, 두 번째로 큰 상처에 밴드를 붙이려 할 때였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갑작스레 은수의 손목을 확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입술을 맞출 것처럼.
불시의 행동에 놀란 그녀가 새된 소리를 내었다.
“헉!”
어느샌가 그의 눈은 언제 술에 취했었냐는 듯 또렷해져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민망했지만, 마주 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녀는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두 입술 사이에서 따뜻한 입김이 섞이고, 그의 숨결이 은수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온몸이 간지럽게 달아오르는 순간,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
“…….”
“나한테 오면, 안 돼요?”
“……네?”
그녀의 속눈썹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안 되는 건가?”
“…….”
“……안 돼요?”
이상하리만큼 숨이 가빠 왔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도.
20센티미터 남짓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은수는 잔뜩 고인 침을 삼켰다.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입술은 마치 본드를 붙여 놓은 듯,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리고, 밀폐된 공간 안에 남자와 자신만이 남겨진 기분이었다.
남자는 술에 취한 상태다. 고로,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 그녀였다.
그녀가 손목에 힘을 주어 그를 억지로 떼어내려 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
“…….”
이를 악문 그녀가 다시금 몸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물컹하면서도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 위로 강렬하게 부딪쳐 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달달하면서도 쌉싸름한 술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들의 두 번째 키스였다.
“흡!”
입술이 맞물린 순간, 은수의 머릿속에선 폭죽이 쉴 새 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일급 비상. 일급 비상. 당장 떼어내야 함.’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삐-삐- 머릿속을 울려 대는 경고음.
불과 며칠 전 사고를 당했지만, 그건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절체절명의 사고였다.
‘이걸 어떡해!’
밀어내 보려고 시도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자의 힘이 너무도 완강해서,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을 뿐이었다.
있는 힘껏 반항하던 은수는 결국, 이 무식할 정도로 거친 키스를 저도 모르게 받아들이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제껏 그녀가 해 본 키스 중에 가장 진한 키스. 혀가 섞이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낯이 뜨거워졌다.
술 자체를 혐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였다. 그런데 술기운 가득한 이 남자의 키스가 그다지 역하지 않은 건,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키스라는 걸 너무 오랜만에 해서일까. 소위, 굶어서?
‘……설마, 내가 그런 이유로…….’
사실 그런 걸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이미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던 양팔은 어느샌가 남자의 목덜미를 감고 있었다.
그런데 꽤 장시간 동안 이어지던 입맞춤이 어느 순간 무 잘리듯 뚝 멎어 버렸다.
‘……?’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은수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의아함이 떠오르던 얼굴이 금세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째 힘이 점점 약해진다 싶더라니.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상태 그대로 쓰러지며 잠드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소파를 침대 삼아 누운 그는, 방금 전까지 저돌적으로 키스를 퍼붓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이 되어 색색이고 있었다.
맨정신의 피해자는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지금, 키스하다가 잠든 거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보통 이와 비슷한 상황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한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무작정 매달리며 키스를 하다가, 제 풀에 곯아떨어져 버리는 장면.
역시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기에 현실이다.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뀌었네.’
이씨,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한 주제에!
가만 생각하니 억울해서 절로 인상이 써졌다.
“…….”
그러나 이내 현실을 직시한 은수는 피식 웃었다.
하긴, 뭘 기대한 거야. 차라리 이렇게 끝난 게 다행인 거지. 까딱하면 뒷수습도 힘들 뻔했는데.
애꿎은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문지르며, 그녀는 한창 올라왔던 이상야릇한 기분을 지워 내려 애썼다.
‘술 마신 사람하고 키스 좀 했다고, 설마 아이에게 해가 되지는 않았겠지.’
실질적으로 그녀에게 전달된 알코올은 아주 미량이었겠지만, 그녀는 왠지 소주 몇 잔을 마신 것처럼 기분이 알딸딸했다.
잠시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은수는 얼른 안방으로 가서 여분의 이불과 베개를 들고 나왔다.
“읏차.”
구부정하게 누워 있는 그를 똑바로 뉘여 베개를 받쳐 준 뒤 이불까지 폭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불편하지 않게끔 소파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아 곤히 잠들어 있는 현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은수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남자의 잠든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순해 보였다. 그가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다는 것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날 만큼.
현재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는 은수의 눈길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짠함이 묻어났다.
“…….”
정말이지, 당신을 어떡해야 할까.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한 곳만 보는 남자. 다섯 살이나 어린 주제에 책임감 하나는 과하게 투철한 부하 직원.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은수도 그가 정말로 좋은 남편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이보다 훌륭한 남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를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고히 쌓아 놓았던 다부진 마음을 무너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돈도 써 본 사람이 잘 쓰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애초부터 독기와 오기만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런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애정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구애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점점 그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은수는 무서워졌다. 밝은 에너지만 내뿜는 남자에게 자신의 애꿎은 그림자를 덧씌우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녀는 항상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며, 그것이 싫지 않았다.
반면 도현재는 놀라울 정도로 이타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그녀가 아니라도, 그는 좋은 여자를 만나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스물일곱이라는 창창하고 어린 나이인 그에게, 굳이 이런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가 도와주어 편해지기야 했지만, 처음부터 혼자 책임질 몫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가 만약 나 몰라라 했어도, 그녀는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고.
영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남자가 말도 못 하게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
그냥 이렇게 밀어낼 때 곱게 밀려나 주면 좋을 텐데. 자꾸 이러면 난…….
은수의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현재의 얼굴을 건드렸다. 군데군데 나 있는 작은 상처들과 큰 상처 위주로 붙여 놓은 밴드들이 눈에 들어와 밟혔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을 달고 온 건지.
잘난 얼굴에 난 흠집들이 안타깝고 속상해서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
누군지 몰라도 짜증 나네, 진짜.
* * *
그의 얼굴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휴가를 마친 그 다음 월요일에야 알 수 있었다.
“……현재 씨가 한 팀장님을요?”
“그래.”
“……말도 안 돼. 현재 씨가 왜요?”
“나도 모르지. 어쨌거나 지금 한 팀장이 길길이 날뛰고 있으니까.”
“…….”
“회사 내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신입이 팀장씩이나 되는 사람한테 주먹질을 한 건 징계감이지. 쌍방이니 일방이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냐. 곧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거니까 알아 두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