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38화 (38/128)

# 38

38. 나한테 오면, 안 돼요? (1)

현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당장이라도 그런 허튼 소문을 낸 사람을 찾아내 한 대 치고 싶었을 정도로.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자신에게는 그런 소문에 화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

당초에는 ‘아이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은수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자꾸만 조바심이 나고 욕심이 났다.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일지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그녀는 그를 돌아볼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날 더 마음이 상했는지도 몰랐다. 단순히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조금이라도 내주지 않는 게 서운해서.

그래서 처음으로 속에 있던 말을 어렵게 꺼내 놓기도 했지만, 그는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늘 그랬듯이.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괜히 그녀의 기분만 상하게 만든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었다.

어쨌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계속 직진만 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안 좋은 말 한마디에 불끈불끈 화가 솟는 건 어떡해야 하는지…….

이제는 정말,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근데 대체 애 아빠는 누구래? 저번에 보니까 배도 아직 안 나왔던데.”

“몰라. 궁금하긴 한데, 그걸 묻는 것도 좀 그렇잖아. 뭐, 남친이 따로 있다나 봐.”

“난 그런 사람들 보면 진짜 멍청한 거 같애.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피임도 제대로 못 하냐.”

“그러니까! 사실 저번에 화장실에서 몰래 씹다가 걸렸거든. 근데 엄청 당당한 거 있지. 결혼도 안 하고 임신한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가만히 듣고 있으니 점점 가관이었다. 함께 교육을 받을 때부터 뒷말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진즉에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이야.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이내 성큼성큼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결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민희 씨.”

“네?”

뜻밖에 불린 제 이름에 고개를 돌린 민희는 눈앞에 현재가 서 있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어, 현재 씨!”

“……방해한 겁니까?”

“아니에요! 커피 마시는 중이었는데, 현재 씨도 같이 마실래요?”

“……아뇨, 됐습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줄도 모르고, 민희는 그의 등장에 그저 기쁜 듯 생글생글 웃었다.

“아! 이 친구는 법무팀에 있는 최은진이라고 해요. 저희랑 동기예요.”

“아, 예. 반갑습니다.”

민희를 신경 쓰느라 미처 제대로 보지 못했던 여직원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긴 머리를 높게 묶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게, 저를 보며 소녀마냥 뺨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 꼭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을 더듬으면서 괜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말해 놓는 게 좋겠지.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단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들은 이상 모른 척할 순 없어서요.”

“네? 그게 무슨 말인지…….”

현재의 서두를 듣고는, 영문을 모르는 민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같은 팀인데, 팀장님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

“팀도 중요하지만, 사적인 일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당사자 없는 자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늘 상냥하게 굴던 현재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한 민희였다.

저를 강렬하게 쏘아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민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벙찐 얼굴이 되었다.

“……아, 저는 그게 아니라…… 그냥…….”

“주제넘었다면 미안합니다. 그럼.”

“아니, 저기, 현재 씨!”

민희가 부르는데도 깍듯하게 목례를 마친 그는 지체 없이 돌아섰다.

평소 보았던 여자의 성정을 감안하면 반발심에 오히려 더한 말을 하고 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앞으론 적어도 이렇게 대놓고 하지는 못하겠지. 남 눈이 무서워서라도.’

확 가라앉은 기분으로 휴게실을 나온 그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현재 씨!”

“어, 이 대리님. 점심 드셨어요?”

“그럼, 시간이 몇 신데.”

이 대리가 잠시 현재의 얼굴을 살피더니, 대뜸 물었다.

“근데, 현재 씨 얼굴이 왜 그래?”

“……제 얼굴이 왜요?”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네.”

“제가요?”

“그래. 꼭 무슨 우환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티가 났나.

현재는 금방 표정을 지우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반응이 조금 어색하다고 느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대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그래? 뭐, 아니면 말고. 참, 오늘 저녁에 다른 팀 직원들하고 술 한잔할까 하는데, 현재 씨도 가야지.”

“예? 갑자기 무슨…….”

“이제 신입들도 들어온 지 꽤 됐는데, 남자들끼리 친목 도모 한번 해야 되지 않겠냐고. 저녁에 다른 약속 같은 거 없지?”

“오늘…… 저녁이요?”

당연히 마치자마자 은수의 집으로 향하려 했던 터라 그는 고심했다.

물론 하루 안 간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만…….

“늦게 끝날까요? 가 봐야 할 데가 좀 있어서.”

“아냐. 유부남들이 많아서 어차피 오래까지 있지도 못해. 그냥 얘기나 좀 하자는 거지.”

“아…….”

“근데 현재 씨는 만날 어딜 그렇게 다녀. 같이 술 한번 먹기 힘드네.”

“…….”

배려심이 깊은 이 대리의 성격상 지나가듯 하는 말이겠지만 은근히 뼈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임신한 뒤로 그는 술자리 한번 제대로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직원들 사이에서 왕따 신세는 면하고 있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엔.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입이라는 자신의 위치상 그런 자리를 너무 빼면 좋지 않게 비춰질 것이었다. 며칠 동안 들르면서 필요한 건 다 챙겨 놓았고, 충분한 휴가 덕분에 이제 아기도 다시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러니 하루쯤은 그런 자리에 참석해도 괜찮겠지.

“어떡할 거야. 갈 거야?”

“예.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생각을 끝낸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도 모르고.

* * *

“……이건 너무 유치한 것 같은데.”

탈락.

“이건…… 너무 비싸.”

탈락.

“이건 또 너무 안 어울리고.”

탈락. 탈락. 탈락!

도통 성에 차지 않는 듯, 스크롤을 내리던 은수가 불만족스러운 신음을 내었다.

“참, 선물 한번 드럽게 고르기 힘드네.”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은 은수는 쇼핑 사이트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바로, 현재를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서.

원래 관계 쇄신에 가장 좋은 게 선물이라고 했다. 오고 가는 선물 속에 싹트는 정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은 남들과는 좀 코드가 다른 그를 고려해 짤막한 편지를 써 볼까 생각도 했다. 자고로 선물 뒤에 편지까지 주면 감동이 더한 법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낯간지러운 짓은 애저녁에 졸업한 지 오래였다. 대학생 시절에도 안 했던 짓을 지금 할 수야 없지.

그녀가 책상 위에 엎어 두었던 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은 술자리가 있어서 못 갈지도 모르겠어요. 저녁 꼭 챙겨 먹어요.] 도현재씨

아까 전 마지막으로 온 카톡이었다.

당연히 그가 올 줄 알고 나름 신경을 써 계란말이까지 해 놓았는데.

그가 오지 않는 바람에 결국 혼자 된장찌개와 함께 우걱우걱 다 해치워 버렸다.

‘지금쯤 신나게 병나발을 불고 있으려나.’

무슨 술자리인지는 모르지만, 많이 마시지는 말아야 할 텐데.

책상에 팔꿈치를 짚은 채 파란 카톡 창을 들여다보고 있던 은수가 입술을 모았다.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더니, 옆에 없으니까 또…….

보고…… 싶네.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떻게 된 거 아냐?

문득 든 생각에 당황한 그녀가 폰을 책상에 엎어 버리자, 액정이 책상과 맞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휴. 작은 한숨 소리도 뒤따랐다.

‘이건 다 그 남자 때문이야. 점점 이상해지네.’

애 아빠한테 뭔 생각을 하고 있냐. 정신 차리자, 민은수.

정신줄을 잡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있는데, 그런 그녀를 깨우듯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뭔가 들킨 기분이 든 탓이었다.

“……깜짝이야.”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없는데. 설마 이렇게 늦게 택배 같은 게 올 리도 없고.

의아한 마음에 그녀는 방을 나가 인터폰을 확인했다.

“누구세요?”

[……나예요.]

“……현재 씨?”

어두워서 인영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술에 취한 듯 약간 어눌하면서도 축축한 목소리.

평소처럼 따뜻하고 다정하기만 한 말투는 아니지만, 이 듣기 좋은 목소리는 분명 도현재의 것이었다.

아니, 이 남자가 이 시간엔 웬일이래. 오늘은 안 온다더니.

공동 현관문을 열어 주고도 은수는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시간으로 보나 목소리로 보나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실제로 맞닥뜨린 그의 얼굴은, 은수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어, 얼굴이…… 왜 그래요?”

눈과 입가에 살짝 굳어 있는 핏자국.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얼굴.

은수는 경악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팀장님…….”

풀린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의 이름을 부른다.

문을 활짝 열고 위태롭게 걸어 들어오던 그가 마치 쏟아져 내리듯 그녀에게 안겼다. 그의 어깨 너머로,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도 이어 들려왔다.

그는 술 취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악력으로 그녀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혀, 현재 씨, 무슨 일이에요? 어쩌다 이랬어요?”

“…….”

은수의 어깨에 턱을 기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항상 좋은 향이 나던 그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 정도면 그가 술을 마신 건지, 술이 그를 마신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 참, 임신한 사람한테 이렇게 기대다니, 너무한 거 아냐?’

그가 비록 호리호리한 편이기는 했지만, 술 취한 성인 남자의 무게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은수는 상황 판단을 하는 것도 잊고 젖 먹던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한참을 낑낑대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겨우 그를 소파에 앉혀 놓을 수 있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그는 눈을 감은 채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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