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 거짓말을 하다 (3)
“저, 현재 씨.”
“…….”
전화를 하면서도 수시로 현재의 눈치를 본 그녀였다.
통화를 하는 내내 시종일관 찌푸린 얼굴이었던 그는, 어느샌가 예의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시작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저기…… 이건, 내가, 일부러 거짓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
환자가 되어 누워 있는 채로 허둥지둥 변명하려는 은수를 보며, 그가 쓰게 웃었다.
“괜찮아요. 설명 안 해도 돼요. 대충 알 것 같아요.”
“……네?”
“아까 미안하다고 한 거…… 이것 때문인 거죠.”
“…….”
“……난 또, 뭐가 미안하다고.”
“아니, 그게요. 사실은…….”
“민은수 님, 수축 다시 보실게요.”
기껏 변명하려던 은수의 말허리가 불쑥 재등장한 간호사에 의해 무참히 잘렸다.
‘벌써 한 시간이 다 됐어?’
젠장맞을 타이밍. 하필이면 지금 다시 검사를 할 게 뭐람.
“……아, 네.”
제삼자의 등장에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인 그는 잠시 은수를 말없이 응시하더니 그대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현재, 씨…….”
그건 내 뜻이 아니었다고, 무서우니까 나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님을, 그녀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 * *
차창을 통해 푸른 새벽빛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수축 검사와 태동 검사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고, 현재와 은수는 별수 없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다행히도 수축이 더 이상 잡히지 않아, 이상 증상이 있을 시 바로 내원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퇴원을 허락받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문제의 통화 이후, 현재와 은수 사이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이제 좀 어떤가, 괜찮다 정도의 이야기만 간헐적으로 나누었을 뿐이었다.
물론 조급해진 건 은수였다. 분명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같은데 얼굴만은 밀랍인형마냥 딱딱하게 굳은 게 자신이 알던 현재와는 너무도 달라서 자꾸만 위화감이 드는 탓이었다.
결국 이 냉랭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저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걸 은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현재 씨.”
“네.”
“……화났어요?”
“……내가 왜 화가 나요.”
평상시와 똑같은 진중한 말투. 하지만 약간의 퉁명스러움과 차가움이 배어 있다는 걸 멍청이가 아닌 이상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바보예요? 화난 거, 안 화난 거 구분도 못 하게.”
“화난 거 아니라니까요.”
“어떻게 화가 안 나요.”
“…….”
“내가…… 거짓말했는데.”
애초에 거짓말을 해 본 적도 별로 없지만, 이렇게 거짓말을 이실직고하기도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미안해해 보기도 처음이고, 또 대답해 주기를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언젠가부터 생전 안 해 본 행동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남자의 딱딱한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저 때문에 운전을 거칠게 하지도 못하고, 화를 숨기며 자중하는 모습은 지극히 도현재다웠다.
잠시 뒤, 꾸준히 정면만을 주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까요.”
“…….”
“사실 나도……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요.”
“…….”
“내가 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승낙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아서, 나랑 영화 보는 게 부담스러워서, 친구 핑계를 대고 약속을 취소한 건 아닐까 하고…….”
“……아니에요, 그런 거!”
이게 무슨 소리야! 혹시나 그가 오해할까, 그녀는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부정했다.
부담스러웠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그와 영화를 본다고 생각했을 때 느낀 감정은 부담이었다기보다는…….
설렘, 그건 확실히 설렘 쪽에 가까웠다.
“나 정말로 현재 씨랑 영화 보고 싶었어요. 그건 진짜예요.”
“…….”
“근데 저번에 현재 씨도 봤잖아요. 울 엄마 완전 똥고집인 거. 내가 선 같은 거 싫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니까…… 억지로라도 나가게 하려고 바로 전날에 알려 준 거였어요.”
“…….”
“그래서…… 그쪽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올 텐데 바람맞히긴 뭐하니까, 나가서 직접 상황을 설명하려고…….”
“…….”
“그 남자랑 잘해 본다거나, 뭐 그런 생각은 절대 아니었어요!”
어쩌다 보니 말의 뉘앙스가 점점 다른 데 한눈 판 여자의 변명처럼 되어 가고 있다.
은수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신호를 대기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요, 은수 씨 그럴 사람 아닌 거.”
“…….”
“근데 그럼, 왜 거짓말을 했어요. 솔직하게 말해 줘도 됐잖아요.”
“…….”
“있지도 않은 친구 핑계까지 대 가면서……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 거예요.”
뭐라고 대답은 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녀는 자연스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게. 대체 내가 왜 거짓말을 했을까.’
거짓말을 한 직후에도 스스로 의문이었던 그것. 이렇게 허무하게 탄로 날 거짓말이었다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건 그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굳이 이 남자에게 알리기 싫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말이 안 되었다.
‘왜? 이 남자가 나한테 뭐라고, 그런 걸 알리기가 싫어?’
너무 우스웠다. 아닌 척하면서도, 남자를 있는 대로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
상념에 빠진 은수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진짜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니까…… 좀 허무했어요.”
“…….”
“언젠가는 은수 씨가 날 좋아하게 만들 거라고, 큰소리 뻥뻥 쳤었는데.”
그가 씁쓸한 듯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조금씩 자신이 없어져요.”
“…….”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좀 들고.”
항상 밝기만 했던 남자가 비로소 드러낸 진심. 은수는 그의 말에 정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들어가서 쉬어요. 또 올게요.”
“…….”
그는 평소처럼 그렇게 은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은수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깐 동안 건물 앞을 서성거리며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주책없게도 눈물이 비어져 나오려 했다. 이게 무슨 궁상이야.
그런데 그때, 시간이 지나 겨우 잠잠해져 있던 그녀의 배가 돌연 자그맣게 꿈틀거렸다.
흠칫 놀란 은수는 이제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완만하게 둥근 배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수축이 온 줄로 착각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오늘 겪었던 증상과 달랐다. 배 뭉침이라기보다는 뱃속 깊은 곳에서 전해진 하나의 신호 같은 느낌이었다.
“…….”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뱃속의 아기가 토닥여 주는 것 같다고 한다면…… 과한 망상인 걸까.
은수는 복잡한 마음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 * *
쿵. 자판기에서 캔 커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몸을 숙여 그것을 손에 든 현재가 곧장 입구를 따서 들이켰다.
점심식사 후에는 줄곧 식곤증이 몰려오곤 해서 이런 포션이라도 마셔 주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었다.
캔 커피 한 캔을 단숨에 비운 그는 텅 빈 캔을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고 돌아서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
열두 시 반쯤 은수에게서 도착한 카톡이었다. 요 며칠 여자는 희한하다 싶을 만큼 연락을 자주 했다. 어차피 매일 같이 그녀의 집에서 퇴근 도장을 찍고 있는데도.
[네. 지금 일어난 거예요?]
[ㅎㅎ 네 ^^;;...] ♥
보통 다른 여자들 같으면 늦게 일어나도 일찍 일어났다고 내숭을 떨 텐데, 이 여자는 그러지도 않고.
‘내가 맘에 없는 상대여서 그런 걸까.’
하지만 이런 면마저도 좋으니 할 수 없다.
야속한 맘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막상 전화로 목소리를 듣거나 답장을 타이핑할 때면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얼른 밥 먹어요. 찌개 끓여 놓은 거 데워서.]
[알았어요. 고마워요^^] ♥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어제는 요리 초보 주제에 패기 있게 된장찌개를 끓여 주고 온 그였다. 간을 볼 때는 얼추 사 먹는 거랑 비슷하단 생각에 ‘일취월장하는구나.’ 싶기도 했는데, 맛이 가물가물해진 지금은 별로 자신이 없었다. 이제 입덧이 거의 다 줄어서, 웬만한 건 다 잘 먹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그래도 이렇게 끼니 챙겨 먹는 것까지 꼬박꼬박 연락을 해 주는 걸 보면 그녀가 혼자 있는 시간을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제 또 열심히 기저귀 값을 벌어야겠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나머지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가 별안간 휴게실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냥 넘기려야 넘길 수 없는, 특정 단어가 그의 발목을 잡아챈 탓이었다.
한산한 휴게실 안에는 웬 여직원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아, 맞다. 너네 팀장 휴가 냈다며. 요즘 너네 팀 엄청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지.”
“그럼 어떡해? 결재할 사람도 없는데.”
“2팀 서 팀장님 있잖아. 일주일 동안만 우리 팀까지 맡아 준대.”
“헐, 대박이다. 웬 민폐야.”
“그러니까 말야. 팀보다 ‘아기’가 더 중요하시다는데 어쩌겠어.”
처음에 그는 못 보던 여자들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중 한 명은 강민희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팀장’이라 함은, 단연 은수를 일컫는 것일 테다.
“…….”
무심코 그들을 쳐다보던 현재의 눈빛에 빠직, 날이 섰다.
사고로부터 벌써 며칠이 지났다. 당연한 수순처럼 은수는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병가에 들어갔고.
팀원들은 팀장의 갑작스런 부재에 당혹스러워했지만, 임신 사실을 공표한 이후에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다들 짐작해 왔던 터라 다소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 채 식지 않은 이슈에 회사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남 얘기에 통 관심이 없다 보니 모든 소문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부는 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유산 위험이 있어 몸조리를 하러 갔다거나, 혹은 정말로 유산 직전이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들. 또, 아이 아빠에 대한 풍문도 속속 나돌고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