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 거짓말을 하다 (2)
“은수 씨!”
이름부터 부르며 달려오는 모양새가 매우 다급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은수는 눈에 띄게 창백해진 얼굴로 현재를 맞았다.
“……현재 씨…….”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 검사는 받았어요?”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에는 하나같이 걱정이 묻어 있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 집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차림, 맨발에 신은 운동화, 땀이 어린 얼굴은 그가 준비도 채 마치지 못하고 경황없이 온 것임을 가늠케 했다.
힘이 풀린 은수의 눈이 현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고 때문에 놀란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놀람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이 그녀를 억눌렀다.
그녀는 굳어 버린 것 같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전에 검사했어요. 곧 결과 알려 준대요.”
그러나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리기에는 인내심이 모자라다는 듯, 현재는 얼른 간이 의자에 앉으며 다시금 물었다.
“느낌은 좀 어때요.”
“……배가 조금 뭉치는데, 그것 빼곤 괜찮아요. 그렇게 세게 박은 건 아니라서…….”
“연락처는 받은 거죠? 누군지 몰라도 간 큰 놈이네. 택시를 들이받고.”
“그러게요……. 운전 초보 같던데.”
“그건 걱정 마요. 그 사람 문제는 내가 대신 처리할게요.”
“아니에요! 나중에 내가 만나서…….”
“민은수 씨?”
정신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간호사가 침대맡으로 다가와 있었다.
은수와 현재는 동시에 긴장하며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네?”
“결과 보니까 수축이 좀 잡히네요. 아무래도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입원이요?”
비록 탈은 종종 있었지만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었고, 사고도 경미하다 보니 금방 귀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입원이라니!
은수의 눈이 대번 휘둥그레졌다.
“많이 안 좋은가요? 입원까지 해야 되는 거면…….”
“그런 건 아닌데, 수축이 잡히는 걸 보면 아기가 놀란 것 같아요. 시간마다 수축이랑 태동 검사 하면서 경과 지켜볼 거예요.”
“아…….”
“그리고 입원하시려면 보호자 있으셔야 돼요.”
“보호자……요?”
보호자라고 해 봤자 나한테는 엄마뿐인데. 아니면 윤정이라든지…….
갑작스런 입원 통보에 당황한 은수가 당장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며 눈을 굴리는 사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물론 현재였다.
“접니다. 제가 보호잡니다.”
“아, 네. 산모분과의 관계는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그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대답했다.
“……결혼할 사람입니다.”
결혼할 사람.
생경한 단어에 은수가 현재를 퍼뜩 쳐다보았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빛이었다.
“예. 수속 밟으셔야 되니까 따라오세요.”
“네.”
바쁜 걸음의 간호사가 먼저 자리를 떴다.
간호사의 뒤를 곧장 따라 나서려던 그가 가다 말고 은수를 힐끗 돌아보았다.
“금방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방금 전 화들짝 놀라 달려오던 것과는 달리, 그는 어느새 나름 보호자다운 침착한 태도를 갖춘 채였다.
저런 남자를 누가 꼴랑 스물일곱으로 보겠냐고.
그녀의 눈길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저도 모르게 좇았다.
현재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은수는 비로소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접촉 사고에, 입원까지. 가지가지 한다, 정말.
차후 수습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와 저 남자에 대한 건 물론이고, 회사 일까지…….
아직 토요일이기는 하지만, 이 상태로 회사에 출근하는 건 무리였다. 또, 극성맞은 남자가 출근하겠다는 그녀를 가만 두고 볼 리도 없었고.
‘이제 어떡하지?’
직격타를 맞은 건 다른 곳이었건만, 정작 고장이 난 곳은 돌처럼 굳어 버린 머릿속이었다.
은수는 모든 것을 회피하고 싶은 사람마냥 눈을 감았다.
* * *
“이제부터는 절대 혼자 운전하지 마요. 출퇴근이든 뭐든, 나랑 무조건 같이 해요.”
“…….”
“혹시나 내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못 데려다줘도 절대 운전은 안 돼요. 무조건 택시. 그것도 안 되면 버스나 지하철. 알았죠.”
“……오늘 나 택시에서 사고 난 건데…….”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은수의 대답에 순간 멋쩍어진 현재가 큼큼거렸다.
“……그래도요. 차라리 택시가 낫죠. 운전하다 그런 거면 어쩔 뻔했어요.”
하긴, 이만하길 다행인 건가.
물론 뒷좌석에 앉은 탓에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감이 있었지만, 뱃속의 아기는 결과적으로 무사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뒷목을 잡으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택시 기사를 떠올리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운전대에 박치기를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당부를 마친 그가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마도 메시지나 전화가 온 것이 없나 확인하는 듯했다.
그때, 잊고 있던 것 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차! 맞선남!’
은수는 일순 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황급히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다섯 시 조금 안 된 것 같은데요.”
“……다섯 시요?”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것을 발견한 그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친구분은요. 아직 연락 못 했죠?”
“……네.”
“설마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나. 내가 대신 연락해 줄까요?”
“……아니에요, 됐어요.”
연락을 하고 싶어도 어차피 연락처를 모르는 신세였다. 엄마를 통해 시간과 장소만 전달받았으니까.
민폐 끼치는 것을 죽도록 혐오하는 성격이다. 그런 은수를 아는 엄마로서는 맞선에 나갈 수밖에 없게 한답시고 일부러 파 놓은 계략이었을 테지만, 실상 소용이 없게 된 셈이었다.
파토 나는 건 100퍼센트였어도 일단은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만약 이런 사고만 나지 않았더라면.
“현재 씨.”
“네?”
“……미안해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한마디에 현재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뭐가요?”
“그냥…… 다.”
거짓말을 한 것도, 같이 영화를 못 본 것도, 휴일에 이렇게 병원에 있게 만든 것도, 그리고…… 당신의 진실한 마음을 아직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 처지도.
현재를 올려다보는 은수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속을 모르는 현재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미안해야죠, 이렇게 걱정시키는데.”
“…….”
“쓸데없는 생각 말고, 아기랑 은수 씨 몸만 생각해요. 알았죠?”
“……알았어요.”
“……근데, 어디서 자꾸 전화 오는 것 같은데. 은수 씨 건가?”
그러고 보니 옆에 놓아 둔 가방에서 뭔가 부르르 떠는 듯한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치 고난의 시작을 알리듯, 뭉근히.
벨소리도 아니고 진동인데, 저걸 어떻게 알았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으련만. 그 빌어먹을 진동을 인식해 버린 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지 않아도 누가 걸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 친구인가 보네. 얼른 받아 봐요.”
“…….”
“……은수 씨?”
은수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남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방에서 손쉽게 폰을 꺼내었다.
은수가 대답을 하지 않는 건, 아마도 친구에게 상황 설명을 할 것이 난처해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추측한 것 같았다.
“내내 기다렸을 텐데, 더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야죠. 자, 여기…….”
“…….”
“어.”
언뜻 발신자를 확인하던 그가 멈칫했다.
“어머님이신데요?”
“…….”
아이 씨. 그녀의 잇새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어차피 밝혀야 할 거, 그냥 받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오만상을 지은 그녀는 전광석화처럼 남자의 손에서 폰을 낚아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은수! 너 어디야!]
전화를 받자마자 귓전을 때리는 멘트는 그녀의 예상 그대로였다. 역시나 성능 좋은 휴대폰에선 엄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금세 풀 죽은 목소리가 된 은수가 개미 소리를 내었다.
“왜에…….”
[세화호텔 세 시라고 그랬지! 기어코 안 갔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전화 왔잖아. 너 어쩔 거야!]
“아, 그러게 누가 맘대로 선 같은 걸 잡으래?”
결코 그 앞에선 말하고 싶지 않았던 단어.
‘선’이라는 말을 끄집어내자마자,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너 땜에 못산다, 증말. 그 한 번 나가는 게 그렇게 싫어? 어휴. 너 지금 어딘데? 도대체 어디길래 전화도 늦게 받아!]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서러워진 은수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병원이야! 병원.”
[……병원? 병원은 왜.]
그래도 엄마는 엄마라고, ‘병원’ 소리에 금세 화가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입맛을 한번 다신 은수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접촉 사고 났어.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머, 어머. 병원까지 갈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니야?]
“혹시나 후유증 생길까 봐 온 거야.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엄마가 대신 미안하다고 좀 전해 줘.”
다른 것도 아니고 사고 때문이라는데, 엄마가 되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여전히 화는 났지만, 한편으로는 큰일을 치른 딸이 안타까워진 이 여사는 더 이상의 추궁을 포기하고 입장을 선회했다.
[……그 사람,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갔단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니?]
“……미안하네.”
[당연히 미안해야지! 그래도 그렇게나 기다린 거 보니까, 사정을 잘 얘기해 보면 다음에 다시 나와 줄 것 같기는 한데…….]
“이 마당에 다음은 무슨! 나 같으면 기다린 게 화가 나서라도 안 나오겠다. 엄만 지금 그런 얘기가 나와?”
어떻게 된 게, 딸내미가 병원에 있다는데도 선 걱정이야.
은수는 사고 때문이 아니라, 엄마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었다.
[안 다쳤다며, 그럼 된 거지!]
“…….”
[너 설마……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그놈의 거짓말, 진짜. 노이로제라도 걸릴 판이네. 소리칠 수밖에 없는 입술 끝이 매우 썼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런 거짓말을 왜 해!”
[네가 하도 선이라면 진저리를 치니까 혹시나 한 거지! 아님 말고……. 진짜 괜찮은 거 맞어?]
“……응. 괜찮아.”
[하여튼, 병원 간 거면 치료는 확실히 받고 와. 아니면, 아예 엄마가 서울을 한번 갈까?]
“아냐! 오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주말에 봐서 한번 갈게.”
[그래 놓고 또 안 오려고. 네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야?]
“진짜 갈게. 조만간…….”
[……알았어. 집에 가면 다시 전화해.]
“응. 끊어, 엄마.”
전화가 끊기고도, 둘은 잠시간 아무 말이 없었다.
기나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역시나 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