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 거짓말을 하다 (1)
그렇게 차는 집 앞에 다다랐고, 은수는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쌩하고 차를 벗어났다.
그런데 현재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녀를 잡아 세웠다.
“은수 씨!”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던 그녀가 퍼뜩 뒤를 돌아 현재를 쳐다보았다.
왜 저러지?
그는 문을 살짝 열어 한쪽 발을 바닥에 디디고 고개를 빼꼼이 내민 채였다.
“왜 그래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
“…….”
“내일 예쁘게 하고 와요.”
망설임 끝에 그가 결국 말을 던졌다.
활짝 웃는 그를 따라 그녀의 얼굴에도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다시 문이 닫히고, 그의 차는 곧장 속도를 내어 빠르게 집 앞을 벗어났다.
은수는 그가 떠나고 난 후에도 우두커니 서서 그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예쁘게 하고 오라고?’
공동 현관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생년월일을 입력해 현관문을 여는 동안에도 그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방금 전 그 말은 정말로 데이트를 앞두고 하는 말 같았다. 평온했던 마음이 또 금세 싱숭생숭했다.
또한 쓸데없는 걱정도 고개를 들었다.
‘……입을 옷은 있나.’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은수는 옷장부터 열었다. 죄다 임신부에겐 적합하지 않은 옷들이었다. 그나마 아직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지.
체구가 마른 편이어서인지 15주 정도가 되었는데도 몸만 봐서는 임신한 티가 그다지 나지 않았다. 비록 허리와 등은 압박 때문에 슬슬 아파 오고 있지만.
조만간 괜찮은 임부복을 몇 벌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은수는 일단 입을 만한 옷들을 꺼내 침대에 펼쳐 놓았다. 그때였다.
지이잉.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현재가 떠나고 나서 바로 울리는 걸로 봐서는 그가 뭔가 놓치고 간 게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마미♥]
……엄마잖아.
얼마 전 안 좋게 끊은 전적이 있는지라, 액정에 뜨는 엄마의 이름이 조금은 불편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연락하지 않다간 엄마가 정말로 삐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집이야?]
“응. 왜?”
[너 내일 약속 같은 거 없지?]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이러는 게,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기함할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번에 말했던 남자 있지. 내일 엄마가 선 자리 잡아 놨어. 넌 가기만 하면 돼.]
“뭐어?”
깜짝 놀란 은수는 제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미 잡아 놓은 거니까 못 물러. 내일 세 시, 세화호텔 1층 커피숍이야. 꼭 나가야 돼!]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이렇게 하루 전에 통보를 했다는 건, 꼼짝없이 엄마가 맘대로 짜 놓은 각본에 놀아나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은수는 절박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내가 싫다고 했잖아! 갑자기 왜 이래!”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안 나가니까 그렇지! 잔말 말고 딱 한 번만 만나 봐. 만나 봐도 정 아니면 엄마가 진짜 뭐라고 안 할게. 약속!]
“아이 씨, 진짜……. 진짜 왜 그래, 엄만?”
잠깐이라도 엄마에게 미안해했던 내가 바보 멍충이지. 이게 뭐야!
너무나도 싫은 나머지 목소리에 울먹임까지 섞여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 이 여사는 그런 걸로 물러설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오죽하면 이래?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너 진짜 시집 안 갈 것 같으니까 그러지!]
“아흐, 진짜…… 싫은데…….”
[세화호텔 세 시야. 응? 꼭 나가야 돼. 알았지? 너 안 나가면 엄마 진짜 망신이야!]
“……아, 싫어! 몰라. 안 나가!”
[야! 너 안 나가기만 해 봐. 진짜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제발 예쁘게 하고 나가. 나가서도 잘 좀 하고. 응?]
“……아, 몰라 나두!”
그녀가 냅다 소리를 지른 뒤 통화는 끊겼다. 들고 있던 휴대폰이 침대에 펼쳐 놓은 옷가지들 위로 툭 떨어졌다.
완전히 망연자실. 감당 안 되는 소식을 맞닥뜨려 버린 은수가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 사태를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내일 그와 영화를 볼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갑자기 맞선이라니. 맞선이라니!
“허어, 말도 안 돼…….”
하도 오래전이라 마지막으로 선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마에게 못 이겨 몇 번 선을 보긴 했지만 시큰둥한 은수의 태도 때문에 잘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포기를 모르는 엄마는 아예 그녀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전날에 통보를 해 온 것이었다.
요즘 들어 다시 선 얘기를 자꾸 꺼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싫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있었다. 이번에도 정 아니면 정말로 그만두겠다는 엄마의 말.
“…….”
밑지는 셈치고 그거라도 믿으면서 나가야 하는 걸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상대 쪽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기껏 만든 맞선 자리에 그를 바람맞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끔찍하게 싫지만, 얼굴을 보고 사정을 얘기하는 수밖엔.
‘근데 그럼, 현재 씨와의 약속은 어쩌지.’
영화 시작 시간이 아마 세 시 반일 것이었다. 선을 보고 그를 만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한껏 기뻐하며 집으로 향했을 그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으니까.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은수는 ‘여보세요’도 없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현재 씨! 난데요.”
[어? 무슨 일이에요?]
헤어진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웬일로 전화를 다 줬냐는 투다. 기분 좋은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 은수는 죄책감이 더욱 뻐근하게 올라왔다.
“어…… 저기, 내일 우리 약속 말인데요…….”
[네. 왜요?]
“진짜 미안한데…….”
[…….]
“나, 내일 영화 못 볼 거 같아요.”
들뜬 듯했던 그가 일순 말이 없어지더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왜요?]
약속을 일단 취소해야겠기에 전화를 하기는 했는데,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미처 하지 못한 채였다.
사실대로 얘기해야 할까?
……맞선인데,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오른쪽 위를 굴러다녔다.
잠시 뒤, 그녀의 입에선 생각지 못한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대학 동긴데, 일본에 유학 갔던 애라서…… 간만에 귀국하나 봐요. 갑자기 연락이 왔네요. 얼굴 좀 보자고.”
[……아, 그래요.]
거짓말만 아니라면 그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은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 남자 성격상 내가 선약을 깬다고 해도 화를 내진 않을 거야.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은 역시나 적중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나 혼자라도 봐야겠다.]
“어, 아니에요! 다음에 나랑 같이 봐요.”
[…….]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러려고 그런 것도 아닌데. 알았어요. 그럼 쉬고, 또 연락해요.]
“……네.”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은수는 통화하는 동안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별문제 없이 속아 넘어간 것 같다. 이만하면 뻔뻔하게 연기도 잘한 것 같고.
“…….”
하지만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걸리는 건 그거였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하는 것.
어차피 그냥 형식적인 맞선일 뿐인데, 왜 선 본다고 말하질 못했을까. 솔직히 말했다면 그도 기꺼이 이해해 주었을 텐데.
은수는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 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영화를 보겠다고 하지 않을 것을.
‘그래도 약속해요. 혼자서 낑낑거리면서 말도 안 하고 그러지 않기로.’
‘그리고…… 정말 말하기 싫더라도, 차라리 말을 안 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언젠가 그에게서 들었던 것 같은 말.
‘거짓말하지 말걸.’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바로 다시 전화해서 아니라고 하는 것도 웃긴 일이고.
“……아, 나도 몰라.”
짜증 섞인 신음을 내뱉은 그녀가 옷더미 위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아직 운전을 못 할 정도로 크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오늘은 택시를 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그닥 여유도 없었다.
성마른 손짓으로 택시를 잡은 그녀는 훈훈한 기가 감도는 택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세화호텔로 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이 무슨 타이밍의 장난인지,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현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은 죄가 있어 차마 무시하지는 못하겠고, 은수는 어떻게든 빨리 끊어 버려야겠다는 각오로 오만상을 쓰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네. 현재 씨는요?”
[집에서 쉬고 있어요. 은수 씨 덕분에 쉬게 되고 좋네요.]
이러니 내가 안 미안할 수가 있나.
그는 별생각 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찔리는 게 있는 그녀로서는 그 말이 가시처럼 콕콕 박혔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안 미안해해도 된다니까요. 친구가 그렇게 갑자기 올 줄 은수 씨가 알았나.]
“그럼, 오늘 계속 집에 있을 거예요?”
[아마도요. 할 것도 없는데 집에서 영화나 볼까 봐요.]
“……그래요. 그래도 현재 씨가 말했던 그 영화는 나중에 나랑…….”
쿵!
“헉!”
꼭 함께 보자고, 그렇게 말할 참이었다.
별안간, 택시의 뒤꽁무니에서 뭔가 팍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사실 소리보다 감각이 먼저였다.
꽤나 묵직한 타격감이 허리께로 전해진 순간, 말을 하려던 그녀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자유로웠던 한쪽 팔은 위기감으로 인해 이미 배 전체를 감싼 뒤였다.
커진 그의 목소리가 멍멍하게 귓가를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방금 뭔가 부딪친 것 같은데?]
“……현재 씨…….”
그녀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덜컥 두려움이 엄습한 탓이었다.
[은수 씨, 왜 그래요? 은수 씨!]
그것은 정말로 사고였다. 수습하기도 어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