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34. 옆 차를 추월할 때의 쾌감 (2)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현재가 이윽고 생각을 끝낸 듯 입을 열었다.
[아뇨. 없어요, 약속 같은 거.]
어라?
너무 단칼에 잘라 버려서 당황스러운 쪽은 오히려 은수였다.
분명히 있을 텐데, 없다고……?
“……정말요?”
[네. 그럼, 오늘 은수 씨 일 끝나면 갈까요?]
“……그, 그래요.”
[마치고 나오면 전화해요. 데리러 갈 테니까.]
“어…… 네.”
통화 종료를 누른 은수는 밀려드는 의아함에 창 너머의 그를 쳐다보았다. 민희와 유라는 밖에 나갔다 왔는지 이제야 자리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마침 잘됐다는 듯 현재가 민희를 성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민희 씨.”
“네?”
은수는 얼른 팀장실 입구 쪽으로 다가가 문을 살짝 열고는,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는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저…… 정말 미안한데.”
“…….”
“내가 오늘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그러는데, 오늘 사 주기로 한 것 다음으로 미뤄도 돼요?”
현재가 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고 좋아하던 민희의 표정이 일순간에 일그러졌다.
“……무슨 약속이신데요?”
당연히 돌아오리라 예상한 질문에,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던 현재가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보자고 해서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민희가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는 눈으로 현재를 쳐다보았다.
“네? 현재 씨…… 여자 친구분 없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현재는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여자 친구는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이요.”
“…….”
“미안해요. 다음에 더 비싼 걸로 먹어요.”
“…….”
지금 저 말이 나는 왜 이렇게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은 건지. 언뜻 팀장실 쪽을 쳐다보는 듯한 현재를 보며 은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여자 친구는 아니지만, 도현재가 좋아하는 사람.
예의를 최우선으로 중요시하는 도현재 같은 사람이 선약마저 깨고 만나려는 사람.
그러니까…… 도현재에게 일순위인 사람.
……그게, 나인가?
색다른 충격에 멍해 있던 은수는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면서 그제야 나갈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별다른 걸 챙길 정신도 없이, 대충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한 뒤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곧장 올라탔다.
그리고 은수는 혼란스럽게 올라오는 감정들로 인해 어지러워졌다. 정말, 그야말로 뱃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언제나 쿨하기만 하던 자신이 말도 못 하게 유치한 방식으로 그들의 약속을 깨게 만들었단 사실에 은수는 급속도로 민망해졌다.
저 여자가 아무리 그런 식으로 나왔다고 한들 그러면 안 됐었는데…….
난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전화를 했던 거지?
은수는 내내 손에 붙잡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건,
“…….”
지금 자신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
힘없이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은 은수가 손목으로 머리를 짚었다.
‘서른둘이나 먹고 참 잘하는 짓이다, 민은수.’라는 생각을 하면서.
* * *
삼계탕의 빛깔은 지난번과 같이 영롱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현재의 삼계탕은 너무나도 맛있게 먹는 주인 덕에 확확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은수의 것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와는 정확히 반대로.
잘 먹질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내내 일이든, 행동이든 집중을 제대로 한 게 없었으니까.
“맛있어요, 현재 씨?”
“네. 은수 씨가 왜 여기 삼계탕을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그쵸, 맛있죠.”
“근데, 먹고 싶었다면서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입덧 때문인가?”
“아니에요. 머, 먹어요…….”
마지못해 젓가락으로 닭을 헤집으며, 은수는 저도 모르게 눈앞의 남자를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다른 남자들 같으면 닭 뜯는 모습이 영 별로일 만도 한데 이 남자는 그렇지도 않고, 하여튼 뭐든지 완성은 얼굴이라니까.’
그녀에 한해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현재가 그런 끈덕진 시선을 놓칠 리 없었다.
그 또한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은수를 쳐다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근데 왜 그렇게 쳐다봐요, 먹는 사람 민망하게.”
“아.”
정신 차려, 민은수! 너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가 뭐가 멋있다고 자꾸 쳐다봐?
이 모든 일의 원흉은 필시 임신이었다. 물론 아가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그러나 분명 임신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 것만은 확실했다.
‘신경 쓰지 말자.’
남자 몰래 날쌔게 고개를 흔든 은수가 살점을 떼어내 입 안에 넣는 찰나였다.
“참, 은수 씨.”
“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평일엔 회사 때문에 늘 보는 얼굴이므로 주말엔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해 여간해선 만나지 않기로 한 그들이었다. 당연히 은수의 일방적인 주장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지만.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입술을 일자로 만들고는 반문했다.
“……왜요?”
“딴 건 아니고,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면…….”
어쩐지 최근의 그답지 않게 굉장히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저러지. 은수는 고기를 꼭꼭 씹으며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랑, 영화 볼래요?”
“……영화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영화라니. 나랑 단둘이 영화를 보겠다고?
어리벙벙해 있는 은수에게 현재는 변명하듯 성급히 덧붙였다.
“이번에 임신을 주제로 한 영화가 하나 나왔더라구요. 어차피 영화니까 현실적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같이 보면 괜찮을 것 같아서.”
“아…….”
그럼 그렇지. 핑계 없이 이렇게 나올 남자는 아니었다.
자신에게서 답을 기다리는 남자를 보며, 은수는 입술을 물었다.
‘이거 설마, 데이트 신청인가?’
은수는 여전히 그를 빤히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덕분에 현재는 조바심이 일었다.
“……싫어요?”
“…….”
“은수 씨가 정 안 되면 나 혼자라도 보고요.”
그의 말이 왜 협박처럼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누가 싫다고 했나.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남자의 눈빛은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초롱초롱했다. 은수는 일부러 시선을 삼계탕으로 떨어뜨리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스케줄 봐서요.”
시원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말투.
그러나 현재는 긍정이 섞인 것 같은 그녀의 대답에 금방 화색을 되찾았다.
“그럼 시간 되면 같이 가는 거예요.”
“……네.”
확인 사살을 끝낸 현재는 언제 초조했었냐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삼계탕 국물을 들이켰다.
뚝배기에 몽땅 가려지는 그의 얼굴 쪽을 바라보며 은수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어쩌자고 승낙을 한 거야…….’
분명 도현재에게는 무조건 No만 외치기로 했었는데. 웬일인지 Yes를 외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듯한 요즘이었다.
사실 그녀는 원래 현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했고, 애인이 아닌 이상 남자와 단둘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모조리. 몽땅.
‘그래, 영화 한 편 같이 본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임신 관련 영화잖아? 괜찮을 거야.’
이미 한 말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교육용으로 보는 것이라고, 맘속으로 애써 합리화를 한 은수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남자의 얕은 수에 기꺼이 넘어가 주는 자신이, 그녀는 매우 낯설었다.
* * *
맹세하건대 한 주가 이토록 빨리 지나간 것은 처음이었다.
삼계탕을 먹으며 그와 약속을 한 것이 어제 같건만 디데이는 어느새 내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의 차를 얻어 타고 퇴근하는 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대충 귀로 흘리며, 은수는 정말로 내일 그와 영화를 봐야 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네? 뭐라고 그랬어요?”
“무슨 생각 하냐구요. 엄청 심각하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운전을 하던 그가 픽 웃었다.
그가 저렇게 웃을 때마다 은수는 어쩐지 제 마음을 훤히 내보이는 것 같은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다섯 살이나 어린 주제에. 왜 저렇게 애늙은이 같아 가지고.
“그 영화 말고 다른 영화 볼까요?”
“……왜요?”
“은수 씨가 딱히 내키지 않는 것 같아서. 무슨 영화 좋아해요?”
“어.”
사실 은수의 영화 취향은 명확했다.
“공포 영화나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거……?”
한 치의 고민 없이 흘러나온 은수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은수 씨 그런 거 좋아해요?”
그닥 좋은 뉘앙스는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은수의 표정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왜요. 그런 게 뭔데요.”
“좀…… 의외라서. 여자들은 보통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요. 보통 로맨스 좋아하지 않나, 다들? 사랑 이야기 같은 거.”
내가 다른 여자들하고 같다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오산이지. 이제껏 보고도 모르나.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난 로맨스 싫어요.”
“왜요?”
“이 세상에 그런 이야기는 존재할 수가 없거든요. 난 비현실적인 거 딱 싫어하는 타입이에요.”
“그럼, 판타지도 싫어요?”
“좋아해요. SF나, 아님 마블 영화 같은 거. 그냥 나는 ‘기승전로맨스’가 별로인 건데.”
“엄청 극단적이네요.”
“그런가. 로맨스 빼고 웬만한 건 다 잘 봐요. 코미디도 좋아하고. 괜히 끝에 가서 사람 질질 짜게 하는 그런 거만 아니면, 뭐.”
그녀의 대답에 그가 아뿔싸, 하는 표정이 되었다.
“내일 볼 영화, 약간 그런 건데. 좀 슬프대요.”
“아…… 그래요?”
“딴 거 볼래요, 그럼? 난 딴 것도 괜찮아요.”
“…….”
“대신 공포 영화 같은 건 안 되고요. 임신한 사람이 그런 걸 보는 건 말도 안 되니까.”
“…….”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동네의 풍경을 응시하며 은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런 영화는 질색이었다. 대충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지 빤히 보이는 영화들.
하지만 애초에 그의 제안을 쉽게 승낙한 것은, 그것이 임신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영화라면…… 굳이 그와 봐야 할 이유가 없는 거였다. 애석하지만.
“아뇨. 그거 볼래요. 임신이랑 관련된 영화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럴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이 남자는 내가 무슨 마음으로 한 말인지도 모르겠지. 그 생각을 하니 은수는 어딘지 모를 곳이 찝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