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33화 (33/128)

# 33

33. 옆 차를 추월할 때의 쾌감 (1)

“뭐 먹고 싶은 건 없대요?”

“네? 아, 딱히요.”

“은수 씨 말고, 우리 아기요.”

그거나 그거나…….

현재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은 은수가 아기와 소통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 배를 잠시 내려다본 뒤에 말했다.

“없다네요.”

“그럴 리가요.”

“얜 아직 위도 없고 장도 없어서요.”

“……그래도 지금쯤이면 대부분 완성은 됐을 걸요. 초기 몇 주만 지나도 내장은 거의 완성된다던데…….”

진지한 얼굴로 임신 지식을 곱씹고 있는 남자가 우습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여웠다.

저렇게도 나에게 뭘 먹이고 싶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은수가 자신을 뒤따라 내리는 현재에게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기면 말할게요. 참, 나 오늘 점심 때 외근 나가요.”

“아, 그래요? 사무실로 복귀 안 하세요?”

“아마도요. 거기서 바로 퇴근할 것 같은데.”

“아.”

“…….”

“그럼 저녁에 같이 못 가겠네.”

너무 적나라하게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말에 질겁한 은수가 타박하듯 현재의 팔을 아프지 않게 한 대 쳤다.

“목소리 좀 낮춰요! 누구라도 들으면 어쩌려구.”

“듣든 말든.”

어깨를 들썩이며 빙긋 미소를 지은 현재가 은수의 어깨를 안마하듯 살짝 주무르곤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아기 엄마, 오늘도 수고해요.”

아니, 저 사람이!

귓불이 화르륵 달아오른 은수가 먼저 사무실로 걸어가는 현재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질색했다.

저번에 갑자기 안은 것도 그렇고, 요즘은 이런 식으로 사람 놀라게…… 은근히 능글맞은 행동도 잘한단 말이야.

그의 향기가 제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은 느낌이다. 발갛게 물든 볼에 얼른 손등을 갖다 댄 은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흘깃거렸다.

저런 걸 보면 진짜 순둥이는커녕…….

“늑대야, 늑대.”

그것도 날 작정하고 홀리려는 늑대.

입술을 앙다물곤, 어깨에 멘 핸드백 끈을 꼭 쥔 은수가 성큼성큼 사무실로 향했다.

* * *

오전 근무를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은수는 팀장실로 돌아와 외근을 나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참.”

이것저것 서류들을 챙기던 은수가 멈칫했다. 일에 정신이 팔려서 속옷을 갈아입는 걸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씨.”

아래가 축축해진 느낌에, 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백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요즘은 분비물이 많이 늘어서 하루에 두세 번은 꼭 속옷을 갈아입었다. 임신하면 분비물이 많아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원래 분비물이 거의 없던 편이라, 항상 보송하고 깨끗한 속옷에 익숙해져 있어 더욱 힘들었다.

‘하여튼 가지가지로 엄마를 피곤하게 하는구나, 아가야.’

화장실 칸에 들어간 은수가 집에서 가져온 지퍼 백에서 속옷을 꺼내 갈아입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휴, 그래도 엄마가 참아야지. 뭘 어쩌겠니. 이게 네 잘못도 아닌데.

속옷을 다 갈아입고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타일에서 나는 울림소리와 함께 섞여 들려왔다. 누군가가 화장실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냥 밖에 나가서 먹을걸. 역대급으로 맛없다.”

“내일은 그러지 뭐. 맞다, 팀장님 벌써 가셨나? 나 제출할 거 있는데.”

“몰라? 아까 보니까 자리에 없던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영락없는 유라와 민희였다. 보나마나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러 온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은수는 ‘나 아직 여기에 있는데요.’ 하고 소리를 내려다 그만두었다.

이제 속옷도 다 갈아입었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지. 왤까?

그건 그냥 직감이었다. 왠지 나가면 안 되겠다는.

곧 칫솔질을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화장실을 울렸다. 민희가 거품을 문 채로 웅얼웅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 오늘 현재 씨랑 저녁 먹는다?”

현재? 너무나도 익숙한 그 이름에 관심이 갔다.

조금 뒤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었던 속옷을 따로 챙긴 봉지를 백에 구겨 넣던 은수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칸막이 밖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유라가 거품을 뱉자마자 “뭐? 네가 왜.” 하며 놀란 목소리로 반문하는 것이 들렸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민희에게서 흥흥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번에 내가 현재 씨 자료 조사 도와준 적 있었거든. 고맙다고 하길래 그냥 그러고 때울 거냐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그럼 어떻게……?’라고 하는데 너무 귀여운 거 있지!”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저녁 한 끼 사 달라구 했지?”

“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엔 젤 먼저 올라간다더니!”

별 쌩 쇼를 하고 자빠졌네. 저게 얌전하긴 뭐가 얌전해.

이상하게도 욕지거리가 올라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목소리를 잔뜩 낮춘 민희가 유라에게 속삭이듯 소리를 냈지만, 작은 소리도 어마어마하게 증폭되는 화장실이다 보니 은수에게까지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재빨라두 우리 팀장님만 하겠니. 대체 누구랑 그렇고 그랬길래 임신까지 한 건지, 어휴.”

“대리님 말씀으로는, 오래된 남자 친구는 있는 것 같다던데. 남자 친구인가?”

“몰라. 암튼 혼자 멋있는 척,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꼴좋다 야.”

“야,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왜, 맞는 말인데. 어차피 외근 나갔는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얘기해. 빨리 저녁이나 됐으면 좋겠다!”

……저것들이 진짜.

은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꼭 사춘기 소녀들 같다. 중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는 선생님이 한번 웃어 주기만 하면 그냥 입이 헤벌쭉 귀에 걸려선 책상 위로 쓰러지는 아이들 말이다.

도현재가 그렇게 좋으면 제발 좀 꼬셔 보시지. 나한테는 만날 전화에 문자에 난린데.

은수도 물론 뒤에서 말을 하리란 건 알았지만 직접 듣고 보니 그것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수준 낮은 것이었다.

가뜩이나 임신으로 인해 예민한 상태이고 기분은 수직으로 낙하했지만, 애당초 민은수는 이 정도 말에 흔들릴 만한 배포는 아니었다.

달칵.

은수는 거침없이 칸막이 문을 열었고, 열심히 입 안을 헹구고 있던 민희와 유라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거울에 비친 은수의 모습을 발견한 그들은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은 은수가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로 걸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민희와 유라의 사이로.

또각또각, 화장실 안에 은수의 구두 소리만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세면대의 물을 튼 은수는 일부러 느릿느릿 손을 씻었다. 민희와 유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기가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슥슥 닦아 내고 있었다. 대강 눈치로 보아, 혹시나 못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옆에 있는 민희가 지금 떨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져서, 은수는 웃음기를 띤 채로 입을 열었다.

“강민희 씨가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예?”

잔뜩 당황한 목소리. 고개를 든 은수가 거울을 통해 민희를 쳐다보며 픽 웃었다.

뻔뻔할 거면 끝까지 뻔뻔하든가. 재미없게……. 뒷담화는 언제나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걸 왜 이렇게들 모르는 건지.

은수는 조용히 페이퍼 타월을 뜯어 손을 닦고, 립스틱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 그러고는 막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오늘 저녁에 데이트한다고 했죠?”

“…….”

“잘해 보세요. 부디, 잘되길 빌게요.”

데이트를 할 수 있으면요.

뒷말은 속으로 넘기고, 은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욕까지 해 가며 굳이 같은 수준이 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이미 상대는 궁지에 몰린 쥐였다.

은수는 둘을 뒤로하고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 * *

솔직히 말해서, 이건 질투라기보다…… 너 한번 엿 먹어 봐라, 같은 마음이었다.

팀장실로 돌아온 은수는 다시 짐을 챙기다, 휴대폰을 들어 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블라인드가 덜 걷힌 창을 통해 이제 막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온 그의 뒤통수가 보였다.

연결음 소리를 들으며 은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

잠시 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폰을 다른 곳에 놓아두려다 액정에서 은수의 이름을 확인한 그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는 것이 보였다.

은수는 거두절미하고 불쑥 본론부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겼어요.”

[어! 뭔데요?]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 목소리부터가 신이 났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먹고 싶은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홧김에 지르고 본 거라, 생각해 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뭘 말하지? 고민하던 은수가 잠시의 침묵 끝에 답을 내놓았다.

“일본에서 먹었던 초밥이요.”

[일본……이요?]

“네. 꼭 그거여야만 해요, 꼭.”

[…….]

‘일본에서 먹었던 초밥’ 소리가 나오자마자 남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말이 없어진 걸 보니 진짜 일본행 비행기라도 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인 듯했다.

뭐든 구해 오겠다고, 말만 하라던 현재의 모습이 떠올라서 은수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농담이에요.”

[……놀랐네. 오늘 일본 가야 되는 줄 알고.]

“농담 취소하고 싶어지는데요.”

[……비행기 표 끊어요?]

정말로 비장한 목소리다. 기분이 말도 못 하게 가라앉은 상태인데도 그의 말에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오려 했다.

“아서요. 참아요.”

[그럼, 진짜로 먹고 싶은 게 뭔데요?]

“……어, 그게…….”

먹고 싶은 것보다는 오로지 그가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장소가 어딜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은수의 머릿속에 지난 번 그와 함께 먹은 삼계탕이 팍 떠올랐다.

“……삼계탕…… 먹고 싶어요.”

[삼계탕?]

“네. 저번에 먹었던 거.”

[아…….]

말을 하다 보니 은수는 지난번에 자신의 폭탄선언 때문에 그가 거의 삼계탕을 먹지도 못했던 게 생각이 났다.

아마 맛이라곤 하나도 기억이 안 날 테지. 은수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에 먹고 싶어요.”

[……오늘 저녁이요?]

“왜요? 다른 약속 있어요?”

[아, 저 그게…….]

난감하거나 머쓱할 때면 뒷머리를 긁는 그의 버릇이 또 나왔다.

선약을 깨면 그가 곤란해질 것이다. 그래도…… 그가 민희와 밥을 먹는 건 끔찍이 싫었다. 그것도 단둘이서 먹는 건 더더욱. 누가 들으면 못된 심보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랬다. 알 게 뭐야, 내가 기분 나쁘다는데.

그나저나 저 남자가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은수는 얼른 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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