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32화 (32/128)

# 32

32. 저 여자 알아요? (2)

“……그건 왜요?”

1차 검사가 끝난 뒤, 그에게도 당연히 보여 줬던 사진이었다.

이미 설명도 다 끝낸 걸 굳이 왜 달라고 하지? 은수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그냥…… 갖고 싶어서요. 나도 아빤데, 자식 사진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죠.]

허, 참. 누가 보면 벌써 낳은 줄 알겠네, 하는 생각이 은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여튼 되게 유난이라니까.

“뭐…… 알았어요. 좀 이따 보내 줄게요.”

[네. 먼저 끊어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폰을 옆자리에 내려놓은 은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런데 미안해서인지, 그것도 아님 어떤 이유에선지…… 자꾸만 눈길이 폰 쪽으로 향했다.

아니, 사실은 남자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주말에 대뜸 전화를 해서 태몽 얘기를 꺼내는 남자는 그밖에 없을 것이다. 엉뚱하긴.

“…….”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몽은 그저 전화를 걸기 위한 구실이었나 싶기도 했다.

기왕 전화해 줬는데 다른 얘기도 좀 물어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너무 매정하게 끊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읽으려던 책에는 시선이 안 가고 자꾸만 가만히 누워 있는 폰에만 시선이 간다.

‘아…… 신경 쓰여, 진짜.’

은수는 결국 폰을 다시 집어 들고 꾹꾹 카톡을 남겼다.

[저녁 때 별일 없으면 전화해요.]

이 정도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정도겠지.

문장 옆에 노란 숫자 ‘1’이 뜬 것을 확인한 은수는 이윽고 폰 갤러리를 열었다.

* * *

전화를 끝내고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폰이 다시금 진동했다.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던 그가 폰을 확인했다.

[저녁 때 별일 없으면 전화해요.]

정말 무뚝뚝한 카톡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여간해선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여자이기에 이 정도면 그래도 많이 발전한 셈이었다.

‘다섯 시만 되면 바로 전화해야겠다.’

흐뭇한 마음으로 카톡 창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밑으로 곧장 사진 하나가 뜨더니 쭈루룩 사진 몇 개가 연달아 전송되었다. 그가 보내 달라고 요청한 초음파 사진들이었다.

그의 얼굴에 금세 함박웃음이 걸렸다.

누가 급한 성미 아니랄까 봐, 이런 사소한 것조차 회사에서 일처리 하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

어쨌거나 원하는 바를 얻어낸 현재는 컴퓨터를 이용해 재빨리 사진을 다운 받았다. 그러고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마우스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그와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카페가 하나 떠 있었다.

[xxx 대표 임신, 출산, 육아 커뮤니티 <맘스터치>]

초음파 질문 방에 들어가 글쓰기 버튼까지 눌러 놓고도 현재는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쓰지.”

비록 가입을 하고, 몇 주를 대기하면서 조건을 만족해 등업까지 마쳤건만 막상 글을 올리려니 가슴이 떨렸다. 이러다 남자인 거 들켜서 쫓겨나면 곤란한데.

키보드 위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손이 마침내 한 자 한 자 입력하기 시작했다.

[제목 : 초음파 성별 좀 봐주세요!          별이맘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첫 아이라서..

성별이 많이 궁금하네용ㅠㅠ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초보맘이라 그런지

초음파로 봐서는 잘 모르겠고ㅠㅠ...

초음파 잘 보시는 맘님들 도와주세용~!!]

다른 회원들의 글을 참고하며 나름 열심히 썼다. 이 정도면 티는 별로 안 나겠지?

우여곡절 끝에, 만족한 얼굴로 등록까지 마친 현재는 댓글이 달리기를 기다리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친절한 맘들이 곧 현재의 글에 댓글을 마구 달아 주었다.

스크롤을 내려 보는 현재의 눈길이 매우 진지했다.

[러블리허니 : 사진으로봐선 초기같은데.. 아직 성별확인하기엔 이른거 같네요ㅠㅠ 조금 더 기다려보세요^^]

[토리맘 : 다리사이보니까 딸이요]

[꼬물마미 : 저도 딸같아요ㅎㅎ]

[봄맘 : 잘 모르겠지만 딸같네요^^]

“…….”

아직 확실치는 않아도, 우선 희망은 있어 보였다.

임신에 한해선 통달한 것 같은 선배 맘들의 댓글에, 현재는 은근한 기쁨을 느끼며 말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작 그에게 사진을 보내 준 은수는 열심히 독서만 하고 있을 뿐, 그가 이러고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 * *

며칠 뒤.

간만에 은수는 원래의 기상 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했다.

누군가는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도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은수는 그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일어난 것도 그나마 어제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바로 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좀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엘리베이터 근처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은수는 엘리베이터를 불러 놓고 그 앞에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다.

졸려……. 졸려. 그렇게 자고도 또 졸려. 임신이 아니라 무슨 잠귀신이 붙었구만.

웬만하면 아침엔 괜히 튕기지 말고 현재의 카풀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분명 멀찍이 서 있던 여자가 제 옆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얼굴이 새침하고 앳되어 보이는 게 다른 부서 신입 사원 같긴 한데, 아주 초면이었다.

그런데 일부러 가까이 다가왔던 모양인지, 여자가 은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 마케팅 1팀 팀장님 맞으시죠. 민은수 팀장님……이시던가?”

“아, 네. 맞아요.”

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곧바로 질문이 이어서 들어왔다.

“……혹시 거기, 도현재라는 분도 계시지 않나요?”

“……네. 그런데요?”

대화가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 남자 이름은 여기서 왜 튀어나온담.

“아…….” 하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여자는 은수를 보며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더니, 금방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하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별꼴이야…….’

입술을 쑥 내밀었다가 다시 집어넣은 은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시선을 돌렸다.

불러 놓은 엘리베이터가 곧 도착했고, 은수는 문제의 여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은수에게는 이 시간이 출근 시간 중 제일 어색한 시간이었다. 괜히 엘리베이터에 붙여진 공고문도 봤다가, 광고도 봤다가……. 그러다 바로 옆에 붙은 사내 공모전 공고에 관심을 주려는 사이, 문이 닫히려 했다.

그때 “잠깐만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현재라는 것을. 그런데 그를 알아본 것은 은수뿐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도현재’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여자의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도는 것이 느껴진 것이었다.

“…….”

……뭐야, 얜?

은수의 눈이 옆에 있는 여자를 저도 모르게 주시했다. 그럴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아냐. 그럼 우리 팀에 있냐고 왜 물었겠어.’

‘아니 그럼, 대체 저 남자를 어떻게 안 거야? ……모르지, 그걸 내가 알 이유는 없잖아.’

그렇게 현재까지 태운 엘리베이터는 위층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은수가 속으로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중에도 여자는 옆에 선 현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저 정도면 자길 본다는 걸 알아챌 만도 한데, 꿋꿋하게 딴 데만 보네? 싶을 정도로.

“…….”

그러다 잠시, 현재의 눈길이 은수를 향한다 싶더니 이내 그가 입꼬리를 올려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현재의 행동을 내내 관찰하고 있던 의문의 여자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

웃는 낯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은수도 화답해 주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 인사를 했다.

내릴 준비를 하고 있던 것 같은 여자는, 그런 은수를 힐끔 쳐다보더니 대번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런 표정이지?’

그러나 자세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자는 은수를 쏘아보곤 휙 내려 버렸다.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면 알아채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얼떨결에 여자의 표정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은수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니 기가 찼다.

‘저 눈빛은 뭐야? 내가 무슨 자기 연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와 함께 다른 사람들도 다 내렸는지, 어느새 엘리베이터엔 은수와 현재뿐이었다. 왼쪽 벽을 쳐다보고 있는 현재는 방금 전의 은수처럼 공고문을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남자는 내가 방금 무슨 취급을 당했는지도 모를 거 아냐.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잘 닫혀 있던 뚜껑이 확 열린 기분이었다.

“저 여자 알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은수는 현재를 향해 다짜고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짜증이 난 탓에 투가 조금 과하게 나온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 내 기분을 어필하려면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은수의 기세에 퍼뜩 놀란 현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무슨 말인지…….”

“방금 내렸던 여자요. 아는 사이냐구요.”

현재의 얼굴에 금방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방금 누가 내렸는데요?”

마치,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

남자를 추궁해 볼 심산이었던 은수는 전혀 영문을 모르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입술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

말투나 표정을 보아하니 일면식도 없는 사이 같은데. 그런데도 그 여자는 이 남자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은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써졌다.

남자의 반응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 여자가 현재에게 일방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임을 대충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외모도 출중한 데다가 나름 친절한 성격이다 보니 남자는 다른 남직원들에 비해 확연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듯했다.

‘민희 씨 말고 다른 여직원들도 꽤 좋아하는 거 같던데……. 하기야 저 인물에, 저 성격에, 인기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은수의 눈치를 보고 있던 현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그분이랑 무슨 문제 있어요?”

“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요.”

은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현재 씨는 그 여잘 모르는 눈친데, 괜히 내가 알려 줄 필요는 없지.

다행히도 현재는 별 의심 없이 “네.”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지나가듯 그가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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