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31. 저 여자 알아요? (1)
은수의 집은 애당초 혼자 살기엔 다소 넓은 편이었다. 놀러 오는 사람마다 ‘우와, 집 크네?’라고 한마디씩은 꼭 했을 정도로. 발품을 팔아 전세로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이 집은 깔끔한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진, 그녀가 어릴 적부터 가져 왔던 로망의 집약체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은수는 집에 손님을 들이지 않기 시작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회사 생활로 워낙 바빴기 때문에 주말에나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으니까. 괜히 누가 와서 어지르거나 세간을 건드리는 것도 딱 질색이고.
하지만 그것은 몇 달 전까지의 이유였다. 그건 이제 거의 표면상의 이유가 되어 버렸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왜냐.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출산 및 육아 관련 서적, 태교 관련 용품 같은 것들이 집 안 가득 쌓여 있거나 나뒹굴고 있으니까. 임신했다고 광고를 하고 싶지 않고서야 이런 꼴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야심찬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가 옆에 놓여 있던 봉지를 뒤적거렸다. 이미 있는 것들도 모자라서, 어제 또 새롭게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려는 참이었다.
“아기의 감성 지수를 높여 주는 피아노 태교 음악…….”
어제 퇴근길에 음반 판매점에서 사온 CD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런 걸 듣는다고 정말 우리 아기의 감성이 좋아질까?
너무나도 상투적인 제목이 미심쩍기는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Q가 발달되면 좋은 거고, 안 되더라도 어차피 사람이 너무 감성적으로 살면 안 되는 거니까. 적어도 피아노 음악이나 클래식이 아기에게 해로울 건 없겠지. 좋아,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 컨트롤.
케이스에서 CD를 꺼내 트레이에 넣은 은수는 곡을 실행시키고 돌아와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별다른 곡의 소개도 없이, 첫 번째 피아노 연주곡이 다급히 흘러나왔다.
묵직하면서 잔잔한 소리.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잔물결처럼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 학원 앞을 지나가다 들었던 피아노 소리도 생각나고…… 귓가를 고요하게 울리는 피아노곡과 함께 하얀 천장을 보고 있자니 왠지…….
“…….”
졸렸다.
안 그래도 요새 졸려 죽겠는데 이것까지 들으니까 더하네. 이런 고상한 태교는 나한테 좀 무리인가.
몰려드는 잠을 셀프 따귀로 겨우 쫓아낸 은수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침대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화장대 옆 벽면엔 그녀가 며칠 전 붙여 놓은 연예인 사진들이 즐비했다. 원빈, 고수, 김태희, 장동건, 이영애 등. 은수의 기준에서 남신, 여신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코 관심은 없었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잘생기고 예쁜 아이를 낳으려면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을 많이 봐야 한다고.
그래서 일단은 아쉬운 대로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들을 프린트해 붙여 놓았다. 기왕이면 인화 사진이 좋겠지만 이것도 붙여 놓고 보니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갤러리에 걸린 명화를 감상하듯, 은수는 시선을 수평으로 이동하며 사진들을 쭉 훑었다. 저 인간들도 다 나랑 똑같은 생명체일 텐데 어째서, 도대체 뭘 먹고 저렇게 잘생기고 예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유유히 흐르던 시선이 제일 오른쪽에서 멈추었다. 열댓 개의 사진 중 마지막 사진은 요즘 막 주가가 오르고 있다는 신인 배우였다.
대충 인터넷에 쳤을 때 잘생기고 예뻐 보이는 사람들 위주로 다운 받았던 거라 이름은 잘 모르지만, 확실히 태교에 도움이 될 정도로 잘생기기는 했다.
그런데 마지막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꼭, 생김새가 현재 씨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음.”
물론 연예인이니 당연히 잘생기긴 했지만, 뭔가…… 남자답게 생긴 현재 씨가 더 나아 보이네.
문득 든 아무 의미 없는 생각에 픽 웃은 은수는 침대 옆 서랍에서 현재가 잊지 않고 챙겨 준 철분제를 꺼냈다. 그리고 엽산을 먹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그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덕분에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처음엔 이 힘든 걸 어떻게 열 달이나 버티나 했었는데. 화장실을 자주 가거나 뱃멀미가 나는 것처럼 어지럽고, 배가 간간이 뭉치는 등의 애로 사항들을 빼면 이 생활도 나름 할 만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아직은 아기가 제대로 크지도 않은 상태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지루한 태교는 일단 미뤄 두기로 하고, 교육 차원으로 ‘임신 출산 육아 대백과’를 읽으려 무릎 위에 올려놓던 찰나였다. 옆에 놓아두었던 은수의 휴대폰이 우렁차게 울렸다.
[도현재씨]
이 사람이 주말에 웬일이래.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은수가 조금 뜸을 들인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밥 먹었어요?]
언젠가부터 남자는 통화가 연결되기만 하면 인사는 고사하고 그녀의 식사 여부부터 확인하곤 했다. 무슨 영양사도 아니고.
어차피 그는 엄마처럼 득달같이 달려드는 타입은 아니므로, 그녀도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입맛이 별로 없어서, 아까 딸기 조금 먹었어요.”
[……딸기 갖고 되겠어요? 밥을 먹어야 되는데.]
“괜찮아요. 나중에 저녁으로 먹으면 돼요.”
수화기를 통해 그의 걱정스러운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입덧은 좀 어때요.]
“글쎄요……. 좀 나아지는 거 같더니 또 금방……. 난 아무래도 가늘게 오래 갈 것 같기도 하고.”
휴대폰을 귀에 댄 은수가 책을 휙휙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사람마다 입덧에도 차이가 있다지만, 그녀의 입덧은 왠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초반에 비해 살짝 꺾이는 것 같더니만, 14주를 넘기자 어째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위액을 토해 냈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의 매일 아침 만나게 되자 그 노란색 액체조차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 다만 이제는 시각까지 예민해지는 바람에 TV에서 뭘 먹는 장면만 보아도 채널을 돌려야 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입맛에 맞고 입덧이 덜해지는 게 딸기라서, 현재는 며칠 동안 마치 딸기 장수라도 된 듯이 딸기를 사다 바쳤다.
물론 지금도 딸기를 씻어 채반에 받쳐 둔 상태였다. 딸기라도 없었으면 오늘 내내 굶었을지도.
그래도 혹시 몰라 영양제들은 모조리 챙겨 먹었으니 별 탈이야 없을 것이다. 속에 들어간 게 그다지 없어 무기력감이 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를 걱정하는 따스한 목소리에 은수는 약간의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임신한 사람이 자꾸 마르기만 해서 어떡하죠.]
“휴, 일단 이 지긋지긋한 게 다 끝나야 뭘 하든지 하죠……. 근데, 나 뭐 먹었나 궁금해서 전화한 거예요?”
은수의 질문에 웬일인지 그의 대답이 한 템포 늦게 따라왔다.
[……아, 그것도 있는데, 실은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요?”
[혹시, 은수 씨 태몽 꿨어요?]
“태몽이요?”
아, 맞다. 임신한 사람들은 다 태몽 한 번씩은 꾸지?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알게 된 임신이라, 태몽 같은 것에 대해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사실 최근 들어선 한번 잠들면 엄청난 숙면을 취했기에 무슨 꿈을 꿨었는지도 모르겠다.
보통 임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꿈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도 하더라마는.
그런데 이 얘기를 이렇게 먼저 꺼냈다면 그가 그런 꿈을 꾸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현재 씨 태몽 꿨어요?”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런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은수도 갑작스레 흥미가 생겼다.
원래 아이 아빠가 태몽을 꾸기도 하나. 보통은 당사자나 지인들이 꾸는 것 같았는데.
“어떤 꿈이었는데요?”
잠시 생각하는 듯, 현재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바닷가나 강가 같은 데였는데, 밤하늘에 별이 진짜 많았어요. 정말 쏟아질 것처럼 가득한데, 거기 엄청 크고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있더라고요.]
별이라.
은수는 깜깜한 하늘에, 봉지에서 쏟아져 나온 사탕처럼 자그마한 별들이 달큰하게 떠 있는 모습과, 그 사이에서 홀로 외톨이처럼 빛나고 있는 별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땄어요?”
[네. 따서 안으려고 했는데, 그러기도 전에 갑자기 그 별이 품 안으로 쑥 들어오는 거예요. 꼭 별똥별 떨어지는 것처럼. 사실 오늘은 아니고 얼마 전에 꾼 건데, 엄청 생생했던 꿈이라 지금도 기억이 나요.]
“듣고 보니까 태몽 같긴 하다…….”
커다랗고 밝은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 전형적인 태몽의 패턴이었다.
오래전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태몽은 사과였다. 온갖 사과가 섞인 틈바구니에서 유독 빨갛고 크게 빛나던 사과를 골라 베어 먹었던 꿈이었다고 했었는데.
태몽이란 유난히 무리 중에서 튀는 뭔가를 안거나 먹거나…… 그래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게 이를테면 아기가 부모에게로 오는 과정이 되는 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현재의 목소리가 깨웠다.
[은수 씨는 태몽이 뭐였어요?]
“난 사과 꿈이요. 엄마가 사과를 따서 먹었는데 그게 나였다나. 현재 씨는요?”
[호랑이요.]
……어쩐지 이 남자와 어울리지는 않는 동물이다. 차라리 강아지라면 모를까.
“호랑이요?”
[네. 호랑이가 엄마 품에 안기는 꿈이었다던데.]
“아아, 먼저 와서요?”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돌진했다더라고요. 엄청 커다랗고 잘생긴 호랑이였대요.]
“……아들 꿈같긴 하다. 멋있네.”
물론 호랑이도 암컷이 있을 수는 있는 거지만.
하지만 그는 열성적인 아이 아빠답게, 이미 정보의 바다를 통해 또 하나의 지식을 습득한 모양이었다.
[검색해 보니까 별도 아들이래요.]
“아, 그래요? 벌써 찾아봤구나.”
[혹시 몰라서요. 예뻐서 딸인 줄 알았는데…….]
“뭐, 모르죠. 태몽이 꼭 맞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딸이면 좋을 것 같은데.]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꽤 간절하게 들렸다. 은수는 사실 아들이든 딸이든 별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올 줄 몰라서 깊은 생각까지는 해 보지 못했지만, 외동딸로 태어나 많이 서러웠던 은수로서는 기왕 혼자 태어날 거라면 아들이 낫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또, 우리나라에서 살기에는 남자가 훨씬 편하긴 하니까.
그래도 은수는 딸을 바라는 것 같은 남자에게 제 생각을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성별이야 부모 맘대로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나저나 빨리 이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음, 용건 끝났어요?”
[네? 아…… 네.]
“그럼 이만 끊어도 돼요? 나 책 읽어야 돼서.”
[아…… 그렇게 해요.]
그러라고 하면서도, 남자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는 게 티가 났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은수는 어쩐지 자신이 밀당의 고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도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남자가 일방적으로 저에게 까이는 느낌이 들 때면 미안한 마음이 자연스레 드는데, 솔직히 미안해야 할 일은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런……. 아무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네, 그럼 끊어요.”
[어, 잠시만요.]
그가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를 내었다.
“왜요?”
[혹시…… 그, 정밀 초음파 사진 좀 보내 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