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30. 동병상련 (2)
그의 말을 듣고도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가 자신과 이토록 비슷한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
어쩌면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페로몬이 존재해서 서로를 알아보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상처를 일찌감치 알아본 것처럼.
그리고 그에게서 남들과 다른 것을 발견한 자신처럼.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가끔 했었어요.”
“……어떤 생각이요?”
“……현재 씨한테서 가끔씩 그림자 같은 게 보일 때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난 그게…… 내 착각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아, 이건 말하지 않는 게 나으려나.
아까 전 그와 다툰 것이 생각난 그녀가 우뚝 말을 멈추자, 그가 계속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손을 더욱 단단하게 쥐었다.
“…….”
“…….”
덕분에 소심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현재 씨는 나랑 다르게 너무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나처럼 오기로 똘똘 뭉친 사람 같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내 맘대로 재단하고, 나와 현재 씨는 아예 어우러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
“미안해요. 맘대로 넘겨짚고, 그런 말해서.”
“괜찮아요. 이해해요.”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제 것만이 상처인 줄 알고 그에게 큰소리를 낸 것이 그녀는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상처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하는데. 서른두 살이나 되었어도 이기적이고 철없음은 여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하루였다.
나는 도대체 이 고질병에서 언제쯤이면 벗어날 수 있을까. 될 수 있으면 빨리 없애 버리고 싶은데.
“오늘…… 데이트했다는 예쁜 여자, 현재 씨 어머님이죠?”
“……네. 어떻게 알았어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여자라면서요. 그럼 빤하지, 뭐.”
그는 들켰다는 듯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오늘 엄마 생신이셨거든요. 그래서 간만에 에스코트 좀 해 드리느라.”
헐.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날에 이 남자는 여기서 뭐 한 거야?
“아니, 그럼 저녁까지 같이 먹지 그랬어요. 케이크도 같이 자르구.”
급 미안해하는 은수를 향해, 그가 걱정 말라는 표시로 웃어 보였다.
“그러려고 했는데, 엄마가 싫다고 먼저 집에 가시던데요, 뭐. 만날 봐서 징글징글한데, 뭐 하러 하루 종일 같이 있냐고.”
웬일인지 멍해진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은수에게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래도 촛불은 어젯밤에 불었으니까 괜찮아요. 걱정 마요.”
그런데 다시 본 은수는 어쩐지 굉장히 감명 받은 얼굴이었다. 마치 인생의 멘토를 찾은 것처럼.
“……어머님이 되게 쿨하시네요. 그 나이 대에 그런 분들 흔치 않은데!”
은수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여간해선 듣기 힘든 그녀의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그래서 그는 은수 또한 어머니에 버금가는 성격이라는 것은 굳이 상기시키지 않기로 했다. 말해 봤자 어차피 그녀의 반응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으므로.
* * *
어느샌가 그녀는 잠을 자겠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듯했다.
오히려 이제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에게 술술 풀어 놓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현재에게 이는 무엇보다 반가운 청신호였기에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 맞다. 현재 씨는 혹시 그런 적 없어요?”
“어떤 거요?”
“나 초등학교 때, 가족 신문 만드는 숙제가 있었거든요? 근데, 아빠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실을 게 없는 거예요. 인간이 도통 집구석에 안 들어오니까 당연하지.”
설마 초등학생이 이런 말투를 쓰지는 않았겠지. 그에게서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암튼 그래서, 그냥 죄다 나랑 엄마 얘기로 채워 갔거든요? 근데 선생님이 숙제 확인하고 혼내는 거 있죠. 성의 없이 해 왔다고.”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했겠어요. 웃기는 선생님이네.”
“그쵸? 그 선생님이 또 어느 날은, ‘은수는 아버님이 혹시 멀리 사시니?’ 그러는 거예요. 만날 행사 같은 데 엄마만 오고, 아빠 얘기는 하나도 안 한다고. 웃기죠.”
“그러네요. 원래 그런 행사는 아빠들은 잘 안 오는 건데.”
“그러니까요! 진짜 짜증 나서 확 엎고 싶은 걸 겨우 참았어요.”
억울하기는 엄청 억울한 모양이었다. 십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현재는 시원시원하고 화통한 성질은 초등학교 때에도 매한가지였나 보다고 생각했다.
답지 않게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던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민망한 듯이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내 얘기만 너무 많이 한 것 같네.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까 내 얘기도 많이 했잖아요.”
“그래두요. 현재 씨도 얘기해 봐요. 현재 씬 그런 기억 없어요? 섭섭했다거나, 아님…… 부러웠다거나.”
“……글쎄요.”
은수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그가 잠시 뒤 하나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랑 되게 사이가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하루는 아빠랑 레고 같이 맞췄다고 자랑하더라고요. 그게 조금, 부러웠던 거 같아요.”
막상 말해 보라고 한 건 그녀였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온 단어는 어쩐지 그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레고요?”
“네. 어렸을 때 좋아했거든요. 형이랑 자주 맞추고 놀았어요. 그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서, 지금도 가끔 심심풀이 삼아 사서 맞추기도 하고 그래요.”
“그렇구나…….”
레고 맞추기라.
확실히 그답지는 않은 취미였지만, 새로운 걸 하나씩 알아 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그가 재미없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던 것처럼, 그녀도 그의 이야기를 공감해 주고, 오래오래 기억해 주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금 이 시간도 기분 좋게 꺼내어 볼 수 있는 추억들 중 하나가 되겠지.
“또요?”
“또…… 아, 아버지랑 목욕 같이 가는 친구들도 좀 부러웠다. 그리고 가족끼리 놀이동산이나 바다 같은 데 놀러 가는 것도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놀이동산’이라는 단어에 반색했다.
“어! 나두 놀이동산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는데.”
“은수 씨도 놀이동산 가 본 적 없어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럼 나중에 같이 가면 되겠다. 바다는요?”
“……바다야 뭐…….”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은수의 눈빛이 애달프게 이지러졌다.
“집 앞이라서 자주 갔죠. 그립다. 만날 나 혼자 놀았던 건 좀 슬프긴 하지만.”
“…….”
“나두 언니가 한 명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은수 씨는 외동이에요?”
“네.”
시골 마을에 살 적에는 거의 늘 혼자 있었다. 노령화된 곳이다 보니 또래 친구들이 많지도 않았고, 엄마도 낮이면 대부분 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그녀 혼자 집에서 시간을 때워야만 했으니까.
지난 기억을 돌이켜보는 듯 골똘해진 은수를 보며, 그는 왠지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여자에게 형제자매가 있었더라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부정적인 생각을 덜 하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근데 은수 씨 얼른 자야 하는데.”
“……아, 맞다. 현재 씨도 빨리 가야 하죠?”
“미안해요. 재운다고 해 놓고, 잠 다 깨는 이야기만 해 버렸네.”
“……아니에요.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하기 힘든 얘기였을 텐데.”
현재는 문득, 어릴 적 엄마가 가끔씩 불러 주던 자장가를 떠올렸다.
“……내가 자장가 불러 줄까요?”
“자장가요?”
갑자기 웬 자장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어릴 때 잠을 잘 못 자면 엄마가 가끔씩 불러 주셨거든요.”
“그래요? 우리 엄만 노래 잘 못해서 자장가가 아니라 오히려 소음 공해인데.”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투 때문에 현재에게서 웃음이 살짝 새었다.
“나도 잘하진 못해요. 그래도 은수 씨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불러 줄게요. 뭐예요?”
“음…….”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의 얼굴이 금세 짓궂은 표정으로 변했다. 나는 왜 이 남자만 보면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걸까.
“양혜승의 ‘화려한 싱글’이요.”
“……네?”
정말 근본 없이 튀어나온 선곡.
그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껏 큰맘 먹고 불러 주려고 했더니, 저런 노래를.
그러나 은수는 그의 반응엔 아랑곳 않고 장난을 이어 갔다.
“왜요, 그 노래 좋은데? 빨리 불러 줘요.”
“……다른 노랜 없어요?”
“없어요. 아, 참고로 영화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제일 좋아해요. 열 번 넘게 봤어요.”
……이거 어쩐지 장난 같지만은 않은데.
천연덕스러운 은수의 대답에 현재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도 덩달아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야 비로소 오늘 하루 동안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조금은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감정의 공유’란 무서운 것이었다. 한순간에 이렇게, 맘의 거리가 확 가까워질 줄이야.
“이상한 장난치지 말고 빨리 자요. 아침에 피곤해하지 말고.”
“알았어요. 자장가는 안 불러 줘요?”
이렇게 된 마당에 자장가는 무슨 자장가. 뻔뻔한 여자의 반응이 어이가 없어 그는 웃음이 나왔다.
“취소예요. 대신, 잘 때까지 옆에서 보고 갈게요.”
“……알았어요.”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의 눈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감겼고, 그의 커다란 손은 은수의 오른쪽 어깨를 규칙적으로 가볍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꽤 늦어져서인지,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는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
그녀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린 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은 정말 아이와도 같이 순수해 보였다. 평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만 같던 경계선도, 살짝 녹은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흐릿해진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순순히 나를 받아들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잠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그가 용기를 내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잘 자, 은수야.”
지금은 잠든 새를 틈타 겨우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언젠가는 눈을 맞추면서 해 줄 수도 있겠지.
이제는 그도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방을 나가려다 말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몸을 숙였다.
사랑을 담아, 그녀의 이마에 떨리는 입술을 맞추며 그는 생각했다.
이제 나쁜 기억들은 모두 밀어 두고,
당신이 부디, 좋은 꿈만 꾸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