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29. 동병상련 (1)
늘 그랬던 것처럼 집 안은 조용했다. 기껏 들려오는 소음이라고는 현재가 설거지를 하면서 내는 소리와, 작게 틀어 놓은 TV에서 나는 소리들뿐이었다.
그에게 등 떠밀린 나머지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척했지만, 은수는 사실 싱크대 앞에 선 그의 뒷모습을 곁눈질하기 바빴다.
그렇게 소리치고 난 뒤, 잠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것 같던 그는 금방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하고 있던 요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수는 그런 그를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식탁 앞에 앉은 그 상태로 그의 모습을 그저 멀거니 지켜볼 뿐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던 스파게티는 생각보다 빨리 완성됐고, 그것은 은수의 예상을 뛰어넘어 훨씬 더 맛있었다. 아마도 실력보다는 다양하고 좋은 재료가 큰 몫을 한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비록 둘 다 한마디 말도 없이 접시에 코를 박을 기세로 흡입을 하기는 했지만, 불과 한 시간 전쯤 언성을 높이며 다퉜다고 하기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바로 집으로 향할 것이다. 그럼, 내일 회사에서 다시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저 남자를 이대로 그냥 보내는 게 맞는 걸까.
다시 TV에 시선을 두는 척하며, 은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은수 씨.”
“……네?”
어우, 하필이면 고개를 돌리자마자 부르고 난리야. 지레 놀라 버린 그녀의 대답이 한 템포 늦게 나왔다.
손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 내며, 마침내 그가 거실로 걸어오고 있었다.
스파게티 먹는 것까지는 어떻게 겨우겨우 넘겼지만, 아까 전 그 일의 여파 때문인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얼른 고개를 숙인 그녀의 귓가로 현재의 조용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은수 씨 졸려요?”
“……어…….”
늦은 저녁을 먹었다고는 해도, 자기엔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임신 탓에 워낙 잠이 많아진 터라 은수가 보통 이 시간쯤이면 잠자리에 들곤 한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음, 조금……요?”
은수가 작게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이 짧게 안방 문을 가리켰다.
“그럼, 방에 들어가요. 자는 거 보고 갈 테니까.”
“……나 자는 거요?”
“네.”
결국 고개를 들고 만 은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또르륵 굴렀다.
어떡하지.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누군가와 함께 잠을 잔 적은 있어도, 누군가의 시선을 받아 내며 잠자리에 든 적은 없다.
은수는 잠시 그를 쳐다보며 선뜻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그냥 혼자 잘 테니 먼저 가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
“…….”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별안간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양 어깨를 붙들어 단박에 일으켜 세운 것이다.
남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위아래로 커진 그녀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과 마주쳤다.
“……씻고 와요. 기다릴게요.”
속삭임에 가까운 짙은 목소리에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그의 얼굴과 향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방금 전 그의 말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냥, 그를 의식하느라 미처 지우지 못했던 화장도 지우고 이제 그만 잘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난.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아무래도 꼼짝없이 남자가 보는 앞에서 잠들게 될 판이었다.
* * *
“정말…… 이러고 자라구요?”
“……싫어요?”
“아니, 뭐…… 싫다기보단…….”
그의 앞에서 이렇게 민낯으로 있어 보는 건 처음이었다. 거기다 이렇게 혼자 누운 채로.
현재는 침대에 누운 은수의 옆에 붙어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쑥스러운 나머지 당장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아 내며 은수는 잠자리가 불편한 듯 몸을 뒤척거렸다. 그런 은수의 속내를 뻔히 알기에,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내가 보고 있는 게 불편해요?”
“……조금요.”
“그래도 참아요. 난 꼭 보고 가야겠으니까.”
“안 그래도…… 잘 자는데요, 나.”
“누가 은수 씨 자는 거 본대요? 우리 아기 자는 거 보고 간다고요.”
핑계도 좋아, 하여튼. 만날 아기 핑계 대면서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나 하고.
이제는 일일이 대꾸하는 것도 지겹다.
하는 수 없이 은수는 최대한 일찍 잠들기 위해 재깍 눈을 감았다. 빨리 그를 보내 놔야 맘이 편해질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 그에게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이 정말 가관이었다.
“화장 안 한 게 더 예쁘네.”
“…….”
“아기 같다.”
어우, 씨. 오글거려. 웬만하면 참고 자려고 했는데.
“아, 진짜.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여운이 잦아들기도 전에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리는 그녀를 보며, 그는 짐짓 놀란 체했다.
“자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저 능구렁이. 찌릿, 그녀의 눈이 그를 있는 대로 흘겼다.
“아니, 이렇게 몇 분 안에 잠들어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진짜예요. 난 자는 줄 알고 한 건데.”
뻥치고 있네. 들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면서! 잠이 확 달아나 버린 그녀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래 가지고 이 남자 말대로 잠에 들 수나 있을는지.
처음엔 분명 안 그랬는데, 남자는 어째 갈수록 뻔뻔해지고 있었다. 내가 너무 풀어 주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현재 씨 때문에 못 자겠어요.”
“왜요. 나 아무 짓도 안 하는데.”
“그렇게 계속 보고 있으면서 아무 짓도 안 하긴…….”
“억울하네. 내 눈에도 자유가 있어요. 내가 보고 싶은 걸 볼 자유.”
“……암튼, 계속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까 잠이 안 온단 말이에요.”
결국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그가 마치 선심 쓴다는 듯 여전히 그녀를 부드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얘기 하나 해 줄까요?”
……이야기?
툭 튀어나온 단어에 순간 긴장한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무슨…… 얘기요?”
대답하기 전,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도 왠지 그녀만큼이나 긴장한 모양새였다.
“……내 얘기요.”
“…….”
“하지, 말까요?”
아마도, 아까 전 그가 한 말과 관련이 있는 얘기일 것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
“듣고 싶어요. 해 줘요, 현재 씨 이야기.”
얼핏 씁쓸함이 감도는 미소를 짓던 그는 그녀의 채근에 힘입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음, 어디서부터 말해야 되지.”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느라 입술을 다물었다.
급한 성미 탓에 조바심이 일었지만, 은수는 잠자코 그가 말을 이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곧이어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수 씨한테 그런 아버지가 있었듯이…… 나한테도 아버지가 있었어요. 은수 씨 아버님처럼 돌아가신 분은 아니지만……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나요.”
그가 기억을 더듬어 보는 듯 눈을 굴렸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됐었나. 그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어요. 사유는 아버지의 외도였죠. 엄마를 만나기 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따로 있었거든요.”
“…….”
“집안에서 반대했던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나서 아버지는 엄마와의 결혼을 후회했대요. 그래서 늦게라도 되찾고 싶다고, 엄마와 헤어지고 그 여자와 재혼을 하셨어요.”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꺼내어 놓은 이야기들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밝고 구김살 없게만 보이던 그에게 이런 과거가 있었다니.
은수는 이 놀라움을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어머니가 평생 일을 하시기도 했지만, 아버지한테서 위자료도 받고, 양육비 겸 생활비 차원으로 돈을 꾸준히 받았거든요.”
“…….”
“그래서 그 뒤로는…… 엄마랑 형이랑 나랑. 이렇게 셋이서 살았어요. 밥도 셋이서 같이 먹고, 잠도 셋이서 같이 자고. 쭉 그렇게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문득 그녀는 엄마와 단둘이 보냈던 그 수많은 밤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아빠라는 사람 없이도 그녀는 엄마와 함께 참 행복했었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지 간에.
이 남자도…… 나와 똑같이 그러했을까. 그를 보는 은수의 눈빛이 짙어졌다.
은수를 향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사실 난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다들 잘생긴 아빠 닮아서 좋겠다고, 커서 여자들 꽤나 울리겠다고 그랬었는데.”
“…….”
“근데 난…… 그 말이 너무너무 싫었어요.”
“…….”
“그 말이 꼭, 나도 나중에 커서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될 거라고…… 저주하는 것처럼 들렸거든요.”
그것은 은수의 것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아픔이었다. 어쩌면 ‘아들’과 ‘딸’이라는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몰랐다. 보통,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이 많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조금 북받친 듯한 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난 절대 아버지를 닮지 않았어요. 차라리 엄마를 더 닮았다면 모를까.”
“…….”
“나도 처음엔 은수 씨처럼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결혼 같은 거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요. 근데…….”
“…….”
“고작 그런 사람 때문에 내가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랑을 부정하면서 살게 됐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억울하더라고요.”
그의 따뜻한 손이 침대 위에 놓여 있던 그녀의 손을 감싸 쥐더니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그래서 더 밝아지려고 노력했어요. 안 그럼 엄마도 속상해하실 테니까.”
“…….”
“그렇잖아도 아빠 없이 자랐다고 놀림 받을까 봐 평생 걱정뿐이셨거든요.”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 그것은 동질감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이제야 그녀는 그가 자신의 임신 사실에 왜 그리 기뻐했는지, 그리고 그가 왜 그리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는 결코, 누구의 전철도 밟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쨌든,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의 내가 됐고, 이렇게 은수 씨를 만났어요. 어떻게 보면 신기하죠. 은수 씨 말처럼, 원래 은수 씨는 나한테 팀장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
“어떨 때는 세상에 저렇게 철두철미한 사람도 없다 싶지만, 또 언뜻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 같고. 그런데도 또 가끔은 이상하게…… 웃는 얼굴 뒤에 숨은 슬픔이 보였어요.”
“…….”
“그게 왠지 나랑 비슷해 보여서…… 그래서 자꾸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간 건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