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28화 (28/128)

# 28

28. 나도 알아요, 그런 기분 (2)

저 남자와 더 말을 섞고 있다간 이보다 더 이상한 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요리 구경이고 뭐고 얼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기는데, 별안간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에서 우렁찬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 온 거 아니에요? 은수 씨 폰 같은데.”

“……어, 네…….”

남자의 말에 무심코 내려다본 휴대폰에는 발신자의 이름이 떡하니 떠 있었다.

발신자는 얄궂게도 엄마였다.

‘엄마는 왜 또 지금 전화를 하고 난리야. 타이밍하고는.’

그래도 엄마에게서 온 전환데 굳이 방까지 가서 받을 필요는 없겠지.

받기 전, 잠시 현재 쪽 눈치를 보며 주저하던 은수는 조심스레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어, 엄마.”

‘엄마’라는 단어에 저를 힐끔 돌아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를 의식하지 않는 척, 그녀는 태연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어. 저녁은?]

“어…… 지금 먹으려구.”

[많이 늦네. 일찍 좀 먹지.]

“회사가 늦게 끝나서…….”

휴대폰 성능이 과하게 좋은 나머지 소리를 낮춘다고 했는데도 대화 소리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들렸다.

오늘따라 엄마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큰 것 같은지. 한껏 부풀어 오르는 민망함에 몸 여기저기서 땀이 비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너 또 밥 안 먹고 라면 먹으려고 그러지.]

“아냐! 오늘은 진짜 아니야.”

[밥 좀 먹어, 밥. 그러다가 방부제 쌓여서 무덤 가서도 안 썩어.]

“……엄마는 말을 해도 꼭!”

그가 쿡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냥 방에 가서 받을걸. 은수는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다.

“왜 전화했는데. 무슨 일 있어?”

그런데 잘만 말하고 있던 엄마는 그녀가 용건을 묻자마자 갑자기 뜸을 들였다.

왜 그러나 의아해하고 있던 사이, 곧이어 엄청나게 숨죽이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다른 게 아니고, 엄마가 이번엔 진짜 놓치기 아까워서 그러는데……. 다다음 주 말쯤에…….]

별생각 없이 듣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그 말 한마디로 인해 확연히 달라졌다.

서두가 이렇다면 뒷얘기는 빤한 것이었다. 그놈의 선. 선!

앞에 현재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은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 또 선 얘기 하려고 전화했어?”

[아, 아니, 화내지 말고 들어 봐. 미숙이 아줌마 알지? 엄마 친구. 걔가 아는 사람 아들이라는데, 인물도 좋고 사람이 정말 괜찮대. 학교도 엄청 좋은 데 나왔다더라!]

그 ‘엄마 친구’라는 아줌마들은 만날 같은 레퍼토리로 은수를 꼬신 지 오래였다. 질리지도 않나, 정말!

그녀의 머리에서는 어느새 폴폴 김이 올랐다.

“누구는 좋은 데 안 나왔어? 나도 어디 가서 학교로는 안 꿀려! 이제 그 얘기 하는 것도 안 지겨워, 엄만? 내가 선은 무슨 선이야!”

은수는 어릴 때부터 소문난 고집쟁이였다.

물론, 그 고집이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너무 아까워서 그러지! 그냥 학교가 아니야. 하버드래, 하버드! 너 얘기하니까 그쪽에서도 엄청 반가워하더라. 이런 기회 진짜 흔치 않다니까, 은수야? 너무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통화가 계속될수록 은수는 점점 자제력을 잃어 갔다. 현재의 등장으로 인해 그나마 가라앉았던 속이 확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흔치 않긴 개뿔. 하나도 안 아까워. 오히려 내가 아깝지! 하버드건 뭐건, 남자 한 트럭 갖고 와 봐, 내가 결혼 같은 걸 하나!”

[은수야, 생각이나 한번 좀 해 ㅂ…….]

“아, 진짜. 됐어! 나 끊는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통화 종료를 누르고는 폰을 식탁 위에 툭 던졌다.

대체 이 무의미한 싸움은 언제쯤이면 끝이 날는지. 이젠 정말 선을 포기할 때도 됐는데.

냅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힘이 빠진 그녀는 옆에 있던 식탁 의자에 풀썩 앉아 버렸다.

전쟁 같은 상황 속에 어느새 잊혀 있던 존재인 현재가 그녀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가 이런 상황에 그녀를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열심히 재료들을 썰고 있던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은 채,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님이세요?”

“……네.”

왜 또, 이 남자 앞에서 이런 꼴이냐고.

은수는 밀려드는 수치스러움을 참아 내며 식탁에 팔꿈치를 괸 채 머리를 받쳤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불쑥,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은수 씨.”

“……네.”

그녀가 무심코 대답했다. 이 남자가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왜 그렇게…… 결혼이 싫은 거예요?”

은수가 흠칫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지 못하게 날아온 질문이 퍽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놀라울 수도 있지만 정말 그랬다. 심지어 3년을 사귀었던 지훈조차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옳은 걸까? 그 맺힌 한을 다 얘기하려면 오늘 하루로도 부족한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머뭇머뭇,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엄마를 두고 결혼 생활 내내 바람을 폈거든요.”

“…….”

“아빠도 처음엔 안 그랬대요. 처음엔 엄마만 보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었대요. 그래서 엄마도 믿고 결혼까지 한 거였는데.”

결국 남은 건 호구가 된 엄마뿐이었지. 차라리 낳지 않는 게 나았을 거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린 나와 함께.

“여자들을 만날 바꿔 만나는 아빠한테 나랑 엄마는 오로지 눈엣가시밖엔 안 됐죠.”

“…….”

“결혼 같은 게 무슨 소용인지, 난 정말 모르겠어요.”

“…….”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혼자 살다 죽는 게 나아.”

그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이제야 그녀에게서 직접 대답을 듣게 된 현재는 씁쓸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은수는 순간 눈물이 울컥 올라오려는 것을 참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남자에게 굳이 그 이유를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물어 오는 그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너무나 따뜻해 보여서, 제 맘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털어놓고 싶어졌는지도 몰랐다. 마치 대나무 숲에 고민이 담긴 메아리를 풀어 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어도 눈앞의 남자는 지금껏 그녀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대쪽 같기만 한 사람.

그 뒤 잠깐 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속으로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 남자답게, 어쭙잖은 위로를 해 주겠지.’

그리고 또 남자만의 방식대로, 저를 달래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튀어나온 그의 말은 그녀의 예상을 무참히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건 은수 씨가 틀렸어요.”

“……네?”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세상에 꼭 그런 결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모든 남자가 은수 씨 아버님처럼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모든 남자가 그렇게 변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

“그런 사람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거예요. 변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원래 그런 거였는데 아닌 척했던 것뿐이라고요.”

“…….”

“그게, 나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하지 못할 이유는 못 되잖아요.”

그는 이상하게도, 평소답지 않게 매우 격앙된 듯했다. 엄청나게 낯선 느낌.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얼떨떨해하고 있는 사이, 그는 다시금 단단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내내 묻고 싶었어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 말고, 은수 씨가 정말로 왜 결혼을 하기 싫어하는지.”

“…….”

“근데 적어도 은수 씨가 방금 말한 그 이유는…… 납득이 안 돼요.”

그 말에 잠잠했던 은수의 눈이 흔들렸다.

“납득이…… 안 된다구요?”

“……그래요. 그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적어도 나한테는.”

“……어째서요?”

대체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상황이 어쩌다 이런 식으로 안 좋게 반전이 되었을까.

은수는 그의 말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종일 애써 눌러 놓았던 화가 석유를 부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한바탕 퍼붓고 나면 오늘 하루 동안 응어리져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지. 이 남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현재 씨가 뭘 안다고 그래요? 내가 말했죠. 현재 씨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

“내가 이렇게 짧게 말해서 그러나 본데, 난 현재 씨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어요. 아빠가 외간 여자랑 같이 교통사고 나서, 나란히 영안실에 누워 있는 꼴을 본다는 게, 상상이나 돼요?”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더욱 서러워졌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장장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춰 온 그녀의 가장 큰 치부였다.

“현재 씨가 내 맘을 어떻게 알아요! 아빠라는 사람이 가정에는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여자 만나기 바쁘고, 만날 엄마 울게 하고!”

“…….”

“자식한테 그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 줄 알아요? 좋은 부모님 밑에서 행복하게만 자란 현재 씨가 대체 뭘 안다고! 나한테 납득이 안 되니 뭐니 그런 식으ㄹ…….”

“알아요, 나도!”

다다다 쏘아 대던 중,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것은 마치 사자후와도 같았다.

제 의지와 다르게 소리친 것 같은 그는 전에 없이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

“…….”

“…….”

겁먹은 듯한 은수의 표정을 확인하자 금세 한풀이 꺾인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움츠러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낮고, 축축하게.

“……나도 알아요, 그런 기분.”

“…….”

“나도, 누구보다 잘 안다고요.”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언젠가 그에게서 생채기 같은 것이 언뜻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단순히 자신의 착각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생채기가 그의 눈빛 속에서 섬광처럼 번쩍 모습을 드러냈다. 은수는 곧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처와 매우 닮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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