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 나도 알아요, 그런 기분 (1)
바로 인정하기에는 어쩐지 자존심 상해서 부인을 해 보았지만, 역시나 그는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딱 봐도 매우 미심쩍어하는 표정.
“……얼굴은 그게 아닌데요.”
“내 얼굴이 왜요.”
“수심이 가득하잖아요. 얼굴이 좀 까칠해진 것 같기도 하고.”
……무슨 귀신이야, 뭐야.
당혹스러운 나머지 은수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슬쩍 문질렀다. 그렇게 티가 나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통 모르겠다고 하던데.
그는 확실히 은수에 한해서는 특히 더 눈치가 빨랐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근데…… 여긴 왜 온 거예요?”
남자는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는 듯 씩 웃더니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죠.”
……그럼 설마, 연락 안 된다고 이렇게 집까지 찾아온 거야? 그거 몇 통 좀 대답 안 했다고?
어차피 내일 회사 가면 볼 수 있는 얼굴인데?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로, 현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요.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죠?”
재차 물어봐도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이상하네.
“……저기, 은수 씨…….”
현재는 결국 오른손가락을 들어 스윽 집 안을 가리켰다.
“나, 들어가지…… 말까요?”
“……아.”
그 말에 그녀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래도 손님인데 내내 밖에 세워 놓을 뻔했네.
하긴,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기도 뭐하지.
은수는 하는 수 없이 길을 터 주기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요, 일단.”
아마 그는 애초부터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가 마지못해 들어오라고 하자마자 이렇게 냉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비집고 들어오는 걸 보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신발을 벗고 저벅저벅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은수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점점 더 고단수가 되어 가는 남자에게 오징어마냥 말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제야, 그가 심지어 빈손으로 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현재 씨, 뭐가 이렇게 많아요?”
“저녁 먹었어요?”
“……아뇨, 아직.”
“잘됐네요. 안 그래도 끼니 걸렀을 것 같아서 장 좀 봐 왔는데.”
뭔가가 한가득 들어 있는 봉지를 근처에 있는 식탁 위에 내려놓은 그가 은수를 향해 물었다.
“여기, 좀 써도 되죠?”
이 남자가 설마, 날 위해 요리를?
놀라움의 연속으로 눈이 휘둥그레진 은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서 요리하게요?”
“네.”
“……뭐 해 주려구요?”
“스파게티요. 어려운 건 못 해 주겠고, 그나마 쉽잖아요.”
“…….”
“배고프죠? 얼른 해 줄 테니까 잠시만 앉아 있어요.”
허, 참. 내가 남자가 해 주는 스파게티를 다 먹어 보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은수는 마치 제 집인 양 부엌을 누비기 시작하는 현재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뭐, 그래도 해 준다는데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가뜩이나 오늘은 직접 해 먹고 싶지도 않은 날이었으니까.
못 이긴 척 은수는 그가 사 온 것들이 뭔지 대충 훑어보았다.
“뭐가 되게 많네. 새우도 있고.”
정말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새우부터 양송이, 온갖 야채들까지. 스파게티에 들어가는 재료란 재료는 모조리 들어 있었다.
포장된 깐 새우를 슬쩍 집어 드는 은수를 향해 그가 물었다.
“새우 좋아해요?”
“네. 사실 오늘 해물탕 먹고 싶었는데.”
해물탕?
간만에 그녀에게서 뭘 먹고 싶었다는 소리가 들리자 현재는 금세 반색을 했다.
“그래요?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사 올까요?”
말하기가 무섭게 벗어 놓은 외투부터 집어 드는 그를 본 순간, 은수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손톱을 깨물었다.
하여간, 이 남자 앞에선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니까.
“아니, 됐어요! 이거면 됐지 또 뭘 사 온다고 그래요.”
“그래도, 오랜만에 은수 씨가 먹고 싶다고 한 거니까…….”
“새우도 해물인데, 뭐. 그건 다음에 먹고, 와서 하려던 거나 마저 해요. 배고파요.”
이미 외투에 팔을 반쯤 끼워 넣고 당장이라도 떠나려 했던 현재는 은수의 강력한 만류 탓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의 배고프단 말 한마디가 그를 제 맘대로 ‘요리’할 수 있게 하는 카드임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뭐 찾아요?”
“어…… 팬이랑 도마요.”
“아, 그거 싱크대 밑에 있는데.”
“…….”
“……그냥 내가 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은수 씨는 쉬어요. 저기 가서 TV나 봐요.”
하지만 은수는 애먼 남자에게 주방을 맡겨 놓고 한가롭게 TV나 볼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혹시나 그가 부담되지 않도록 뒷전에 서서 그의 모습을 잠시 관망했다.
“…….”
나름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어째 준비하는 모양이 좀, 많이 어설프네. 아무래도 서툴러 보이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요리를 하겠다고 나선 거지?
아니나 다를까.
식탁 쪽으로 돌아서다가, 멀찍이 선 은수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는 것을 본 그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근데 사실은, 나 이거 많이 안 해 봐서 은수 씨 입맛에 맞을지 잘 모르겠는데.”
그럼 그렇지. 거창하게 시작한 거치고는 궁색한 말투네. 그녀는 벽에 기댄 채로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괜찮아요. 소스 사서 하는 거면 아무리 못해도 평타는 치니까.”
“……그래요?”
그런데 제 말에 안도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를 골려 주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근데, 그래도 이왕 해 줄 거면 면은 제대로 삶아 주는 게 좋긴 하죠. 알 덴테(al dente)로.”
“……알 덴테?”
아, 어차피 이 남자는 그것도 모르겠구나.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인 현재를 보며 은수는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요리 용어예요. 너무 부드럽거나, 너무 딱딱하지 않게 해 달라고요.”
요리와는 거리가 영 멀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은수가 그런 용어를 알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현재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은수 씨, 요리 좀 해 봤어요?”
이 정도는 요리 프로그램만 조금 봤어도 알 수 있는 거지만, 그래도 배운 건 사실이니까.
굳이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 기억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분명 요리를 배웠었다.
여자는 요리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누구 때문에.
“그럼요. 이래봬도 무려 학원까지 다녔었던 몸이라구요.”
“……그럼, 나중에 은수 씨가 만든 음식 먹어 볼 수 있는 거예요?”
“꿈 깨세요. 요리 관둔 지 오래니까.”
그 자세 그대로 은수는 그가 재료들을 꺼내고 팔을 걷어붙이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요리와는 하등 상관없는 생각이 들었다.
‘캐주얼 입은 것도 괜찮네.’
오늘 그는 깔끔한 회색 맨투맨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남자는 워낙 외모가 뛰어난 편이라, 어느 것을 입든지 잘 소화하는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서 그런가, 평소 회사에서 보던 각 잡힌 출근 복장보다는 이렇게 자유로운 느낌이 더 나은 듯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보다 지금처럼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가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예뻐?
‘어머, 미쳤나 봐. 예쁘긴 뭐가 예뻐?’
빠르게 스쳐 지나간 생각에 깜짝 놀란 그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임신으로 인한 어지럼증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가 안 되는 것이 분명했다. 암, 당연하지.
“은수 씨, 무슨 라면이 이렇게 많아요?”
그때, 불쑥 튀어나온 현재의 질문이 은수를 깨웠다. 그의 앞으로 열린 찬장에는 온갖 종류의 라면들이 그득했다.
아, 저길 깜빡 잊고 있었네. 금세 긴장이 풀린 그녀에게서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거기…… 내 보물 창곤데.”
“은수 씨 라면 좋아해요?”
“네, 엄청요.”
은수의 대답에 그는 일순 곤란한 표정으로 변했다.
“임신한 사람이 이런 거 많이 먹으면…… 안 좋을 텐데.”
참내, 그걸 누가 모르나.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은수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걱정 마요. 임신한 거 안 이후로 한 번도 안 먹었으니까.”
“아, 그럼 다행이고요.”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났다. 어째 임신한 뒤로 성격이 삐뚤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근데…… 오늘 현재 씨 어디 갔었어요?”
“네?”
그녀 자신도 모르게 톡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오늘 하루 내내 궁금했던 것.
……괜히 물어봤나?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덧붙이는 은수의 목소리가 조금 기어들어 갔다.
“……아니, 오늘 연차 내고 뭐 했냐구요. 그냥 개인 사정이라고만 하고…….”
“아…… 그거요.”
그에게서 흘러나온 답변은 매우 뜻밖이었다.
“데이트했어요, 예쁜 여자랑.”
그녀의 얼굴에 느낌표와 물음표가 동시에 떠올랐다.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데이……트요?”
데이트. 미혼 남자에게서 충분히 흘러나올 수 있는 단어인데, 순간 이상하게도 말문이 덜컥 막혔다.
데이트라니. 말도 없이, 도대체 누구랑?
갑자기 확 조용해진 그녀가 이상했는지 그가 휙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를 향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왜요. 질투 나요?”
“……지, 질투는 무슨!”
저 눈빛은 꼭, ‘질투 맞으면서 뭘 그러시나.’ 하는 눈빛 같은데.
너무나 억울한 탓에, 항변하는 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것이 그녀 스스로에게도 느껴졌다.
“아, 아니! 난 그냥…… 조금 갑작스러워서 그러죠…….”
“…….”
“연차까지 내고 데이트할 정도면…… 많이 좋아하나 보네요.”
그냥 놀라서 그런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더듬더듬 근본 없이 흘러나온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빙긋 웃는 남자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사악했다.
“좋아하죠, 많이. 세상에서 제일.”
다시 고개를 돌린 그가 칼을 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썰기 시작했다.
잔뜩 당황했던 것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괜히 머리를 마구 쓸어내렸다.
좋아하는 여자 있으면 나한텐 다행인 거지, 뭐. 괜히 귀찮을 일도 없고…….
그렇게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그때, 여전히 칼질에 열심이던 그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은수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거, 걱정은 무슨! 그런 거 아니거든요?”
누, 누가 걱정을 했다고!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데, 왜 갑자기 오버하냐고 할 것 같아 그럴 수도 없다. 하여튼 설레발이 우사인 볼트 급이시네. 내가 어이가 없어서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