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 모든 건 타이밍 (3)
저 얄미운 주둥이를 쳐버리고 싶다. 그냥 한 대 칠까?
‘내가 집을 가든, 깜빵을 가든 네가 알 바야?’
속으로 애써 분노를 삭이고 침착하게 서류철을 고쳐 안은 은수는 몸을 정면으로 돌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잖아도 그럴까 해요. 한 팀장님이 저 따라 팀장 되시기까지 딱 1년 늦으셨으니까, 그 정도는 푹 쉬다 와도 괜찮겠죠. 몇 년 동안 일하느라 휴가도 제대로 못 갔는데, 이참에 휴가 좀 즐기려구요, 저도.”
“…….”
“뭐, 물론 회사 입장에선 저 같은 인재가 놀면 손해라고 하기는 하던데.”
……물론 그건 임신 전에 했던 이야기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은수는 활짝 웃었다.
“일하는 데는 아직까지 문제없으니 걱정 마세요. 아기가 당장 나올 것도 아니고, 늘 일하던 몸이 집에서 쉬기만 하면 오히려 찌뿌둥할 것 같아서요.”
“……아아, 그래?”
말로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까불긴.
작정한 은수는 금세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냈다.
“그런데 전 오히려 한 팀장님이 좀 걱정되네요. 대충 들어 보니까, 요즘 홍보팀 사기가 말이 아니라던데. 속 좀 상하시겠어요.”
“…….”
“보통 그런 경우를 두고, ‘리더십의 차이’라고들……. 아, 죄송해요. 괜한 얘기를 했네요.”
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은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이 섹시하게 호를 그렸다.
“암튼, 수고하세요.”
속마음과 다르게 겉을 포장하는 것쯤은 사회생활에 도가 튼 그녀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눈치 없이 해맑게 생글거리며, 은수는 천천히 방향을 틀어 걸어갔다.
뒤통수를 통해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그가 지금 어떤 반응일지는 안 봐도 훤했다.
은수는 보란 듯 활기차게 걸어가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네까짓 게 나한테 왜 덤벼? 덤비길.
그러나 은수는 모퉁이를 돌아,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고작 임신을 한 것뿐인데,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불가촉천민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뱃속에선 아기가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도 허했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대접. 이런 취급은 생각보다 조금…… 아주, 조금…… 감당하기 힘들었다.
은수는 이제 살짝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자신의 배를 내려 보았다.
……미안해, 아가야. 이런 취급이나 받게 해서.
“…….”
축복만 받아도 모자랄 것을.
짠해진 그녀의 눈빛이 애틋했다. 이런 게 바로 모성애란 걸까.
이런 식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엄마를,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민 팀장.”
착잡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콜 버튼을 누르던 그때, 한 팀장보다 더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이었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온 그는 은수의 옆으로 다가와 서서 넌지시 물었다.
“괜찮아?”
그의 눈초리로 보아, 한 팀장과의 대화를 다 들은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간부 회의가 막 끝난 뒤였기에 그가 목격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가요.”
“……신경 쓰지 마, 저런 얘기. 다 쓸데없는 이야기야.”
자기가 이런 얘기를 할 깜냥이나 되나. 지는 저놈보다 더한 말도 했으면서.
지훈의 위로를 듣고 있던 은수는 속으로 비소를 날렸다.
“뭘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저는.”
띵, 하고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울렸다.
까마득해져 버린 기억 속 그날처럼, 은수와 지훈은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들어가 섰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금방 적막 속에 휩싸였다.
그 상태로 은수의 눈치를 보던 지훈이 살짝 머뭇거리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며칠 전 일 말인데.”
자그맣게 말을 걸어 오는 그 때문에, 정면을 향하고 있던 은수의 눈길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내가 너무 흥분했어. 네가 갑자기 임신을 했다고 하니까 너무 놀래서 홧김에…… 말이 좀 심하게 나왔던 것 같아. 미안해.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또 나왔다. 늘 같은 패턴.
홧김에 큰소리치고 화를 냈다가도, 며칠만 지나면 먼저 꼬리를 내리고 사과하는 그의 방식. 일방적으로 당했더라도, 당한 사람이 지레 미안해지게 만드는 화법.
예전에는 이런 면마저 사랑으로 포용하고 싶었다. 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감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마치 지훈이 예전의 그가 아닌 것처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깐 은수가 다시 시선을 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지금은 다 잊었어요.”
“다…… 잊어?”
사실 거짓말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사과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기에는 너무 멀리 지나와 버렸으므로.
이제 진정으로 이 남자를 자신의 인생에서 떼어 내야 할 순간이었다.
그래서 은수는 일부러 과하게 각을 잡고,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그날 서 팀장님을 부른 건, 나중에 아이 아버지가 본인이라고 착각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미리 말 안 한 것 때문에 배신감 느끼실까 봐, 그걸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 거구요. 그게 전부였고,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
“어차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따로 있고, 제가 이 아이를 어떻게 하건 그건 서 팀장님이 상관하실 일이 아니에요. 우린 각자의 길을 택한 거예요. 이제 돌이킬 수 없다구요.”
“…….”
“더 이상은 이 문제로 왈가왈부할 일 없을 겁니다. 교제, 잘 이어 나가세요.”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말을 마친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다 말고 그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앞으론 꼭 존댓말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듣는 사람이 심히 불쾌해서요.”
지훈은 놀라움 반, 화남 반인 듯한 얼굴로 은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지훈’에게 이런 식으로 차갑게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 후 별다른 일 없이 엘리베이터 문은 스르륵 닫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은수는 내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되갚아 주긴 한 것 같은데 영 시원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윽박지르고 화를 낼 걸 그랬나 싶은 순간,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그 남자가 오늘 이 상황을 목격했다면 과연 뭐라고 했을까.’
그 남자가 옆에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현재는 오늘 개인 사정이 있다며 입사 후 처음으로 연차를 냈다. 심지어 은수에게조차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첫 휴가이니만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너무 힘든 상황이니까 누군가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요즘 항상 그녀의 옆에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면…….
‘은수 씬 워낙 혼자 알아서 잘하긴 하지만. 가끔은, 나한테 기댔으면 좋겠어요.’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요, 나.’
그녀는 조용히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정작 필요할 때는 없는 거야. 짜증 나게.
입술을 감쳐문 은수는 괜한 생각만 자꾸 드는 머리를 흔들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회사엔 아무 일 없죠? 시간 나면 전화 좀 해 줘요] 도현재씨
[무슨 일 있어요? 카톡도 안 읽고 전화도 안 받고] 도현재씨
[이거 보면 꼭 연락해요] 도현재씨
미처 확인하지 않았던 카톡은 어느새 그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몇 통을 보낸 건지. 연차까지 낸 사람이 놀기는커녕 내내 연락만 기다린 거야, 뭐야.
침대에 누운 채로 휴대폰을 올려다보고 있던 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침의 그 일로 인해 하루를 망쳐 버린 탓에 기분이 너무나도 저조했다.
밖에서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하다, 혼자 밥을 먹기도 뭐해서 그냥 집에 들어온 것이 약 한 시간 전쯤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화장을 지우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도 뒤로 미뤄 둔 채, 그녀는 바로 침대에 털썩 누워 버렸다. 그렇게 침대 속에 파묻힌 후에도 하루 종일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상념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서 확인한 현재의 카톡도 잔뜩 가라앉아 버린 그녀의 기분을 상쇄시켜 주지는 못했다.
휴대폰을 다시 덜렁 옆에 던져 둔 은수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
엄마 보고 싶다. 너무너무.
엄마 밥도 먹고 싶다. 특히, 엄마가 해 준 해물탕.
하지만 엄마에게는 아직 임신 사실조차 말하지 못한 신세였다.
그리고 아마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하긴 해야 되는데.”
어떻게 말하지.
엄마, 나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의 애를 가졌어. 이렇게?
“흐아아아…….”
나도 모르겠다, 진짜.
이상한 소리를 낸 은수는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그런데 그때,
띵동.
예상치 못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불 속에 있던 그녀는 흠칫 놀랐다.
“……누구지?”
이 시간에 여기를 올 사람이 전혀 없는데. 무섭게 뭐야. 이불을 젖힌 그녀가 고개를 빼꼼이 내밀어 현관 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띵동, 띵동.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는 계속해서 초인종을 울려 댔다. 그러나 잠시 뒤,
“은수 씨! 안에 있어요? 나예요!”
그녀는 우렁차게 자신을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목소리만으로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현재 씨!”
그였다. 평소답지 않게 그녀의 머릿속을 도통 떠나지 않던, 바로 그 남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너무나도 자기주장이 강한 목소리였으니까.
침대를 부리나케 박차고 나간 은수는 살짝 연 문틈 사이로 반갑게 고개를 내미는 그를 확인하고야 말았다.
이미 그가 왔단 사실을 알고 연 것이었지만, 실제로 대면하고 나니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 회사도 안 간 사람이 어째서 여기를……?’
그런데 놀라움으로 가득 찬 은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그가 별안간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어째 만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이렇담. 하다못해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은수는 괜히 찔리는 기분에 입술을 앙다물며 대답했다.
“아뇨, 전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