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 모든 건 타이밍 (2)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니?”
“사실이야. 지훈 씨 아이 아니야.”
“내 애가 아니면, 그새 딴 놈이라도 만났단 소리냐?”
“…….”
은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지훈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만 계속해서 내뱉었다.
“하, 넌 참. 다양한 방식으로 날 놀래킨다.”
“…….”
이 상황엔 이 말을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은수에게로, 별안간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워, 당장.”
“……뭐?”
“지우라고. 넌 그 아이 책임 못 져.”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지금 저게 할 소리인가?
갑작스레 화가 솟구친 은수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에 살기를 띠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 지우라고?”
그러나 지훈은 그녀의 무서운 기세에도 전혀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였다.
“왜, 내 말이 틀렸어? 결혼도 안 한다는 애가 무슨 수로 애를 키워? 지우는 게 답이지.”
“내 아이야. 지훈 씨가 그런 걸 왜 상관해?”
“어떻게 상관을 안 해! 네 아이기만 해? 내 아이도 되는데!”
잔뜩 흥분한 그는 임신한 그녀를 상대로 호통을 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언뜻 보기엔 젠틀하고 다정한 것 같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되기라도 하면 화내고 닦달하고, 그녀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곤 했다.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 애써 침착함을 찾은 은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흥분 가라앉히고, 생각해 봐. 기억 안 나?”
“…….”
“우리, 헤어지기 전 몇 달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이 아이가 당신 아이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은수의 말에 그는 잠시 지난 일을 돌이켜보는 듯했다. 실상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은 일인 터라 그도 충분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잠시 뒤, 그제야 그녀의 말을 수긍한 지훈은 또 다른 의문을 가지고 그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럼, 널 이렇게 만든 놈이 대체 어떤 놈인데.”
“…….”
“너 설마, 딴 놈 생겨서 헤어지자고 했던 거냐?”
“……그런 거 아냐!”
“아니면! 대체 그 아일 뭐라고 설명할 건데. 네가 무슨 동정녀 마리아냐? 저절로 애가 생기게?”
“……하아.”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그녀는 더 이상의 설명을 이어 나갈 자신이 사라짐을 느꼈다. 이렇게 흥분한 사람과 계속 대화를 했다간 정말로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이 아빠는 따로 있어. 그건 지훈 씨가 몰라도 되는 일이야. 회사에도 벌써 말했어. 어차피 내가 말 안 해도 자연스럽게 지훈 씨 귀에 들어갔겠지만, 적어도 지훈 씨는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거야.”
그녀의 말에 그는 의도적인 코웃음을 쳤다.
“하. 퍽이나 위해 주는 척하네.”
“비꼬지 마, 제발. 나도 힘들어.”
“그러니까 지우면 되잖아!”
정말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그녀는 지훈을 강렬하게 노려보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원하지 않은 아이라고 해서, 그 아이가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야.”
“…….”
“자꾸 그런 얘기 할 거면 나가 줘. 난 얘기 끝났으니까.”
단호하게 말을 마친 은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배를 감싸 쥐었다.
지훈은 그런 그녀를 허무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사방이 과하게 조용해서, 그가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리는 소리마저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정말, 최악이다. 이 상황.
“그래, 민은수. 너 참 잘났다. 매번 이런 식이지, 너는.”
“…….”
“어디 한번 계속 그렇게 살아 봐, 네 멋대로.”
맹렬하게 말을 내뱉은 지훈은 그 길로 곧장 그곳을 떠나 버렸다.
쾅, 소리를 내며 세차게 닫혀 버린 문 사이로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은수는 잠시 동안 그 상태 그대로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순간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반응을 예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아이를 지우라고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그녀였다.
화를 낼지언정, 적어도 그런 소리까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너 같은 건 차라리 낳지를 말았어야 하는데.’
‘…….’
‘네 주제에, 어디서 감히 큰소리야! 아빠 앞에서!’
언젠가 들었었던, 잊을 수만 있다면 죽도록 잊고 싶었던 그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둥둥 울렸다.
그것이 너무나 끔찍한 나머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아이가, 도대체 나와 다를 게 뭐지?
뱃속의 아이가 그런 모진 소리를 고스란히 들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미어졌다. 또한, 한때 정말 아이를 지워야 하나 고민했었던 자신이 지독하게 미워졌다.
더 이상은 약해질 수 없었다. 아니, 약해져선 안 됐다.
“…….”
폭풍이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밥솥은 밥이 다 되었다는 표시를 내며 칙칙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벌떡 일어난 은수는 얼른 부엌으로 걸어가 전기밥솥을 열고 홀린 것처럼 밥을 한가득 퍼냈다.
그러고는 냉장고에 그나마 있는 반찬들을 꺼내 금방 조촐한 저녁상을 차렸다.
식탁에 앉아 밥상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잃어버린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속으로는 계속 되뇌었다.
‘먹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기를 위해서.’
은수는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그것을 반찬도 없이 입 안에 욱여넣고 씹기 시작했다.
입 안을 뒹구는 따끈한 밥알들 사이로 찝찔한 맛이 느껴졌다.
“흡…….”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녀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
이 세상 누가 뭐래도 난, 이 아이를 지킬 거야.
훌쩍이는 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그녀는 겨우 울음을 참아 내며 꿋꿋하게 밥을 먹었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저녁이었다.
* * *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은수는 그 말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증거를 마주하고 나면 결코 의연할 수만은 없다는 걸,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중이었다.
“민 팀장.”
간부 회의를 끝마친 후, 왠지 모르게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회의실을 나오던 은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자동으로 인상이 써졌지만, 은수는 이내 표정을 고쳐 사무적으로 답했다.
“네, 한 팀장님.”
홍보팀 팀장, 한준호였다. 박 과장이 언급했던, 은수를 죽자 사자 따라다녔다는 그 뭇 남성들 중의 한 명.
아니, 사실은 선봉자라고 해 두는 쪽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훈 다음으로 가장 열정적인 구애를 했던 사람이니까.
“안색이 안 좋네. 어디 아픈 거 아냐?”
그의 말투는 묘하게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액면상으로는 걱정해 주는 멘트일지 몰라도, 그 말이 갖고 있는 뉘앙스는 결코 걱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걱정은 무슨. 차라리 어디 아프길 바라는 쪽에 가깝다면 모를까.
요즘같이 고달픈 때 안색이 좋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때문에라도 은수는 부러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태연한 은수의 대답에 능글맞은 웃음을 짓던 남자가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참, 소식은 들었어.”
“…….”
“임신했다며.”
역시나. 그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올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진한 향수 냄새에 팍 인상을 찌푸리던 은수가 조용히 대답했다.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갔나 보네요. 네, 맞아요.”
“……근데 말이야.”
그런데, 은수의 답을 들은 그가 갑작스레 귓속말을 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불시의 접근에 놀란 은수는 미미하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애 아빠는 대체 누구야?”
‘애 아빠’라는 단어에 긴장의 끈이 탁 풀려 버렸다.
금세 몸을 다시 곧게 편 은수가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 딴엔 비밀스럽게 물어본답시고 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 그의 질문과 몸짓은 의도와 관계없이 오히려 불쾌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설마, 무개념 아니고서야 누가 대놓고 그런 질문을 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그 무개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니.
잠시 입을 벌렸다 다문 은수는 다시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가 한 팀장님께 그런 것까지 말씀드려야 할 필요가 있나요.”
남자는 은수의 말에 태연자약하게 웃었다. 늘 있었던 일이라는 듯.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오는 남자마다 그렇~게 싫다고, 싫다고 튕길 땐 언제고……. 참 대단해, 은수 씨.”
어째, 임신을 한 뒤로 ‘대단하다’는 말을 전보다 더 자주 듣는 느낌이네. 그런데 이 인간에게서 듣는 건 왜 이렇게 기분이 유독 더러울까.
그는 은수보다 1년 선배였다. 또 은수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고, 줄곧 사회에서의 선배이자 인생 선배랍시고 은수에게 치근대던 사람이었다. 회사 일에 대한 조언을 해 주겠다는 구실로 근무 시간 외에 만나자고 한다거나, 밖에서 단둘이 밥 좀 먹자고 한다거나.
그럴 때마다 은수는 한결같이 무반응이었다. 사실 그렇게 다가오는 남자들이 한둘도 아니었고, 모조리 귀찮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대시했던 그는 은수에게서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어느샌가 제 풀에 지쳐 포기한 듯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 뒤로 은수를 만날 때마다 탐탁지 않은 눈빛, 비꼼 섞인 안부 인사 등을 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녀가 자신에게 구애를 했던 남자들 중 굳이 지훈을 택했던 것은, 바로 그런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지훈은 다른 놈들처럼 남들 앞에서 대놓고 치근대지는 않았으니까. 비록 물밑 작업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어도. 또, 그는 그녀에게 까였다고 그런 식으로 보복하는 치사한 사람도 아니었다.
“…….”
은수는 억지로 작게 미소를 지을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눈앞의 이 남자도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테니.
“그건 그렇고, 그 몸으로 일은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아까 보니까 회의 때도 내내 졸린 눈이던데. 졸리면 그냥 집에 가서 푹 쉬어.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해.”
“…….”
“어차피 애 낳으면 오래 쉴 거잖아. 안 그래?”
빙글거리며 물어 오는 얼굴엔 비웃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다사다난한 인생 때문에 초저기압이구만, 오늘은 아주 아침부터 일진 한번 드럽게 사납네.
깊은 짜증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