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24. 모든 건 타이밍 (1)
그렇게 자리를 옮겨 무사히 채혈까지 끝낸 은수는 카운터로 향하며 지갑을 꺼내 들었다.
병원을 올 때마다 나가는 건 돈이요, 얻는 건 부담이었다.
산모라면 무조건 써먹어야 한다는 바우처도 신청했건만, 지급된 건 고작 50만 원이 전부였다. 안 그래도 출산율 낮은 나란데, 이런 거에라도 인심 좀 팍팍 쓰면 어디 덧나나.
뭐, 그래도 나름 요긴하게 잘 쓰는 중이긴 하지만.
‘국민 행복 카드’라고 불리는 마법의 물건으로 헉 소리 나는 진료비를 결제한 뒤 그것을 지갑에 밀어 넣은 은수는 간호사로부터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이미 몇 번 사용했던 나머지, 영수증에는 크지 않은 잔액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아이고.
“몇 번만 더 오면 이것도 나가리구만.”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돈은 좀 나가더라도, 아이가 건강한지 확인은 해야 하니까.
하여튼 아이를 낳는다는 건 여러모로 힘든 일임을, 은수는 이럴 때마다 절감하곤 했다.
꼭 모르는 사람들이 임신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쉽게 떠들어 대곤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자들.
과학이 얼른 발전해서 남자도 임신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할 텐데. 가방을 고쳐 멘 은수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병원을 나가기 전, 은수는 습관처럼 가방에서 엽산을 꺼내 한 알을 손바닥에 털어 냈다. 현재가 선물해 준 이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알고 보니 엽산은 기형아 검사를 대비해 필수로 먹어 줘야 하는 영양제라나.
정수기에서 받은 물과 함께 한 알을 즉시 삼켰다. 정말 이것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늘 검사에서 좋은 결과를 받았기 때문에 병원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꿋꿋이 잘 버텨 주는 아기에게 고마워서라도 은수는 매사에 더 철저해지기로 했다. 마음가짐은 물론, 몸도 더 건강할 수 있도록.
병원을 나서자마자 꽤 매서운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몄다. 주차장으로 나온 그녀는 조심스럽게 운전석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았다.
“…….”
그런데 차에 오르고 나서 가만 생각하니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반차까지 냈는데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 안 될 말이었고. 그녀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쑥 나왔다.
“어디 가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 이른 점심이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 썩 나쁜 선택은 아닐 듯도 하고.
눈동자를 한껏 굴려 대던 그녀는 결국 안전벨트를 신경 써서 두르며 중얼거렸다.
“휴, 그래. 밥이나 먹자, 아가야.”
오늘은 더더욱 힘내야 될 이유가 있는 날이기도 하니까.
입술을 감쳐문 채 차에 시동을 건 그녀가 주차장을 재빠르게 벗어났다.
오늘은, 다름 아닌 그를 만나는 날이었다.
* * *
꽤 늦은 시간이었다. 저녁을 미리 먹을까 하다, 이야기를 끝낸 뒤 먹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밥만 미리 안쳐 놓은 채 소파에 앉았다. 집 안을 채우고 있는 소리는 오직 밥솥 돌아가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그녀는 소파에 양손을 짚은 채 곰곰이 생각을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솔직히, 겁도 났다. 워낙 감정적인 사람인지라.
그것만도 골치가 아팠는데 심지어 지금은 거기에다 오늘 목격한 것을 그에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추가되어 있었다.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그 얘긴 그냥 함구하는 것이 나을지도.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반갑지만은 않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군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필시 그일 것이었다.
그녀는 얼른 쫓아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와.”
이 집에선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 지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으로 들어가는 은수를 뒤따르며 지훈은 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그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게 매우 느릿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근데, 왜 하필 여기서 보자고 한 거야.”
그의 입장에선 이곳에 오기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혹시나 다른 곳에서 그런 얘길 꺼냈다가 누가 보고 오해라도 할까 싶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특히 다혈질적인 그의 성미를 감안하면 꼭 필요한 조치였다.
“……미안해. 조용히 얘기하고 싶은데, 마땅한 장소가 생각이 안 나서.”
“…….”
“여기, 앉아.”
예전 같았으면 편하게 눕거나 몸을 겹쳤을 소파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숨 막히는 침묵을, 은수가 먼저 깨뜨렸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아냐, 됐어. 긴 얘기 할 것도 아닌데.”
그에게 뭐라도 주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이려던 은수는 너무나 단호한 그의 말에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꺼냈다.
“지훈 씨.”
“은수야.”
왠지 먼저 말하라고 양보할 것 같던 그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은수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내가 먼저 얘기할게. 실은 나도 할 얘기 있어.”
“……뭔데?”
은수는 애써 덤덤한 척, 지훈의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나, 여자 생겼어. 한 달 정도 됐다.”
“…….”
“나처럼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고, 아직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은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가 하는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어쩐지 미적지근한 은수의 반응 때문인지, 그의 말투는 매우 조급해 보였다.
“네가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 대충 짐작은 하고 왔어.”
“…….”
“근데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기엔 나도 이젠 너무 지쳤다. 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고 싶어.”
“…….”
“그러니까, 우리…….”
그렇게 계속 이어 가려던 지훈의 말허리를 은수가 갑작스럽게 잘라 냈다.
“……잘됐네. 다행이다.”
이거, 반응이 너무 싱거운데.
지훈의 눈초리에 의구심이 일었다.
“누군지…… 안 궁금해?”
내가 그걸 꼭 알아야 되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럴 타이밍이 아닌 것을 알기에 은수는 입술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물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알아, 누군지.”
“……뭐?”
지훈의 눈이 금세 놀란 눈으로 변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조금 뒤, 은수에게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봤으니까, 오늘 낮에.”
“…….”
그녀가 생각해도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 하필이면 그곳에서 지훈과 그 여자를 목격할 게 뭐람.
그곳은 평소 지훈과 자주 드나들던 일식집이었다. 지훈과 헤어진 후 한동안 발길이 뜸했었기에 오랜만에 돈가스나 먹을 요량으로 간 곳이었는데.
하필이면 다 먹고 주차장으로 향할 때, 발견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은수는 본능적으로 다른 차를 방패삼아 몸을 숨겼다. 그저 그의 얼굴을 밖에서까지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차에서 내린 건 지훈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내가 생각도 못 했던 여자라.”
“…….”
“차라리 선을 봤음 봤지, 두 번 연속으로 사내 연애를 할 줄은 몰랐는데.”
조수석에서 내린 여자는 지훈과 같은 팀에 소속돼 있는 여직원이었다. 얼핏, 이름도 알 것 같은.
의아한 느낌에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본 은수는, 곧 지훈이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일전에 그녀와 사귈 때도, 은근슬쩍 자신의 팀에 예쁘장한 여직원이 있다며 말을 흘리던 그였다.
같잖은 질투 유발 작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때마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도리어 화를 내곤 했었는데.
문득 옛 기억을 떠올린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어느새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다.
“……미안하다. 그렇게 됐다.”
“…….”
“그런 식으로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얄궂은 걸까.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
“헷갈린다, 좀. 내가 이걸 축하해 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
“축하해 주는 게 맞는 거겠지?”
그녀의 눈이 지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궁지에 몰린 지훈은 지금 그녀의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축하해, 지훈 씨.”
“…….”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고맙다.”
그렇게 들킨 것치고는 어째 너무나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지훈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다.
꼭,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폭풍전야와 같은 느낌.
“그럼…… 이제 내 용건 얘기해도 돼?”
“……용건?”
그녀는 잠깐 심호흡을 하더니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던 주먹을 꼭 쥐었다.
지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
“임신했어.”
은수의 폭탄 같은 그 말에, 지훈의 눈이 삽시간에 세모꼴로 변하며 팽창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뭐? 너 지금 뭐라고…….”
다시 말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할 수 없지.
또다시 크게 한 번 숨을 내쉰 은수는 이내 말을 이었다.
“아기를 가졌다고.”
한번 커져 버린 그의 눈은 줄어들 기미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럴 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아랑곳 않고 그녀는 핵심을 덧붙였다.
“그리고, 난 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야.”
“……너 미쳤어? 뭘 낳는다고?”
지훈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특유의 큰 소리로 은수를 향해 쏘아 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뭐, 아기를 가져? 야, 민은수. 넌 어떻게 된 애가!”
“…….”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갑자기 웬 아기 타령이야?”
“목소리 좀 낮춰!”
아마도 그는 미련이 남은 은수가 재결합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하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별생각 없이.
그의 얼굴엔 화가 나는 것과 동시에 두려움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미안했지만, 지금 은수로서는 이러한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안 지어도 돼.”
“…….”
“지훈 씨 아이 아니니까.”
화를 내던 지훈의 얼굴에 금세 얼이 빠진 표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