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23. 커밍아웃
“…….”
“…….”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헤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럴 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까 더 볼 만하네.
은수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의 눈치를 보며 포크에 파스타를 빙빙 감았다.
확실히 그들의 표정은, 아까 전 점심 쏜다는 이야기에 좋아하면서 따라나서던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잠시 뒤, 개중에 그나마 이성을 되찾은 정 대리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죠? 팀장님이, 임신을…….”
“…….”
“……말도 안 돼.”
그러나 은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 돼요. 진짜 임신했으니까.”
“…….”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공짜 점심 얻어먹으러 와서 핵폭탄 선언을 듣게 된 1팀 여직원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 박 과장이었다.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결혼하기 싫다던 사람이! 이게 무슨 소리야?”
본의 아니게 그녀를 속인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기를 가진 것뿐이지 결혼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언니 같은 그녀에게 미안해진 은수가 나지막이 변명하듯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결혼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임신만 했을 뿐이에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박 과장은 당장 답답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인 듯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잖아요. 결혼도 안 한다는 사람이 무슨 애를 가져?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야, 글쎄.”
‘그러게 말이에요. 왜 하필 저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저도 믿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몇 번이고 묻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어차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다 늘어놓지 않는 한, 이 상황이 이들에게 온전히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이상은 말을 아끼기로 결심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면 길어요. 그냥,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그럼, 아이 아빠는? 누군지 알아?”
“알고 있어요.”
“…….”
“그럼 저번에 청국장 집에서도…… 그게 입덧하시는 거였어요?”
“……네. 그렇더라구요.”
엄청난 충격에 빠진 그들은 잠시 동안 음식을 깨작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하기야, 처녀인 줄로만 믿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임신했다고 하는데…… 나 같아도 이러겠지.’
은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있던 그때, 박 과장이 다시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그러면, 회사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계속 다녀야죠, 힘닿는 데까지는.”
“임신한 사람이 안정을 취해야 될 텐데……. 일이 그렇게 고된데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아직은 괜찮아요. 나중엔 좀 생각을 해 봐야겠지만.”
씁쓸한 표정이 된 은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아침, 위층으로 가서 임신 사실을 통보하고 온 길이었다.
미혼에 능력도 있어서, 이것저것 핸디캡이 많은 ‘여자’임에도 기껏 팀장으로 진급시켜 놨더니.
고작 엊그제 같은 그 일을 뒤로한 채, 덜컥 애를 가졌다고 선언해 온 그녀가 그들로서도 어이가 없을 것이었다.
억지로 웃어 보이며 떨떠름하게 축하한다고 말하던 이사의 눈빛이 도저히 잊히질 않았다.
하지만 은수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임했다. 비록 당당할 것 하나 없는 처지이긴 해도.
그런데 잠잠하게 있던 민희가 불쑥 은수를 깨웠다.
“팀장님, 혹시…… 다른 사람들도 이 사실, 알아요?”
“……다른 사람, 이라뇨?”
의아해하는 은수의 표정을 본 민희가 성마르게 덧붙였다.
“저희 말고 남자 직원들이요. 예를 들면, ‘현재 씨’라든지.”
“……아.”
저 입에서 그 남자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지.
늘 저런 식인 말본새가 매우 못마땅했지만, 은수는 겨우 감정을 숨긴 채 대답했다.
“현재 씨는 알고 있어요. 어쩌다 보니 알게 되어서.”
“…….”
“근데 그 외엔 아무도 몰라요. 다른 직원들한테는 여러분이 말 좀 해 주세요. 제가 직접 하기는 좀, 그러네요.”
“아.”
은수의 대답을 들은 민희의 표정이 웬일인지 갑작스럽게 180도 바뀌었다.
“……그래서 현재 씨가 그렇게 팀장님을 챙겼었구나. 그쵸. 그런 거죠, 팀장님?”
……맞다고 해야 하나. 임신 때문에 챙긴 건 맞는데.
뭐, 굳이 아니라고 할 것까지는 없으니까.
“……네, 뭐.”
작게 “어쩐지…….” 하고 중얼거리는 폼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
“전 그런 줄도 모르고, 팀장님한테 공 던지고 그랬는데.”
이제 와서 저런 표정 지어 봐야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왜 모를까.
은수는 속으로 화를 삼켜 내며 애써 웃었다.
“게임이었잖아요. 그리고 민희 씨가 말했듯이, 몰라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은수의 말에 민희는 언제 미안했냐는 듯 금세 생글거렸다. 한순간에 확 핀 것이, 마치 봄날이 찾아든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고요. 팀장님, 뭐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임신한 사람들은 다 신 거 찾고 그러던데, 제가 좀 사다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민희 씨.”
갑자기 불편하게 왜 저래. 평소엔 관심도 없더니.
그러나 민희를 필두로 다른 사원들도 속속 참견을 시작했다.
“입덧 심하면 아기가 건강하다는 증거라던데. 저번에 쓰러지신 거는 괜찮대요?”
“혹시 순대 간 먹고 싶지 않으세요? 그럼 아들이라던데.”
“초음파 사진 있으세요? 얼마나 됐대요?”
“잠깐만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질문 세례가 너무나도 부담스러워서, 은수는 일단 백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좀 이따 다시 와서 얘기해 드릴게요.”
사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얘기를 꺼내 놓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호언장담을 해 놓은 그녀가 폰을 들고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남 일인데 뭐가 저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예상은 했지만 반응이 생각보다 더욱 거세었다.
그래도 감당 못 할 정도로 부정적인 반응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여자 입장을 이해해서 그런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듯해 보였다. 심지어 싹퉁바가지 민희까지도.
‘하긴, 앞에서 대놓고 욕하지 않는 것만도 어디야.’
가게 밖으로 나온 은수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정직한 수화음 끝에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컬러링 따위를 해 놓을 남자는 아니었다.
[여보세요?]
“나예요. 지금 전화 가능해요?”
[네. 잠시만요.]
그는 지금쯤 구내식당에 있을 것이었다. 남직원들끼리는 오늘 거기로 간다고 했으니까.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현재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림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나왔어요. 말 잘했어요?]
잘한 건가. 잘 모르겠긴 하지만, 어쨌든 하기는 했으니 된 것 아닌가.
왠지 수행 실적을 보고하는 부하 직원이 된 느낌이었다. 이런 거 딱 싫은데.
입술을 비죽거린 그녀가 “네.” 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반응이 어때요?]
“그냥…… 다 놀란 것 같아요. 좀 쇼크도 받은 것 같고.”
[그렇겠죠. 이제 소문 퍼질 일만 남은 건가?]
“……아마도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 없는 말이 되어 달려 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직원들 몇몇은 타 부서 사람들과도 친하기에, 사내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일 것이다.
[그래도 이제 끝났으니까, 당분간은 마음 편히 먹어요.]
“끝이 나긴요. 아직 남은 과제가 산더미구만.”
[……부모님이요?]
아차. 엄마한테 말하는 걸 잠시 잊고 있었네.
그녀는 그제야, 그에게 자신의 가족 관계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그런 것까지 말해 주고픈 생각은 없었다. 굳이 알 필요도 없는 문제니까.
“아뇨. 엄마는…… 휴, 몰라요. 아직은 안 되겠어요, 엄마는.”
[그럼, 누가 남았는데요?]
“있어요. 암튼, 그쪽은 아무 내색 말고 있어요. 알았죠?”
[이름은 어디다 치우고 갑자기 ‘그쪽’이에요.]
“그럼 누가 엿들을지 모르는데, 여기서 대놓고 이름 부를까요?”
[아아.]
“좀 이따 사무실에서 봐요. 끊어요.”
하여튼 아무런 걱정이 없는 남자다. 어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지.
이럴 때면 ‘여자’라는 것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난 왜 하필이면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그녀는 꿀꿀한 기분으로 다시금 휴대폰을 들었다. 생각난 김에 해치우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손이 액정을 꾹꾹 터치했고, 지워 버리고 싶었지만 결국엔 지우지 못했던 그 이름을 찾아낸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통화가 연결되었다.
“어. 나 은수야.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미안한데, 오늘 밤에 좀 볼 수 있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채로 그녀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
하지만 만나고 싶지 않아도, 지금은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안 되면 내일도 괜찮아.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이제는, 사랑했던 이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지킬 차례였다.
* * *
의사가 쥔 펜 끄트머리가 모니터의 액정을 툭 건드렸다. 의사는 1차 기형아 검사 결과에 대해 한창 설명 중이었다.
“만약 태아에게 염색체 이상 질환이 있으면, 여기 ‘목 투명대’라고 하는 곳에 어떤 물질을 쌓아 놓게 돼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게 넓어지겠죠. 그 길이가 3밀리미터 이상이면 위험군에 속하게 됩니다. 다운증후군이라고, 들어 보셨죠?”
“아, 네.”
앞에 앉아 의사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은수는 살짝 긴장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수를 보고 씩 웃은 의사는 다시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1.1밀리미터로 정상이네요. 아주 잘 크고 있어요. 전체적인 크기는 조금 작은 편이긴 한데, 그래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여기 보시면 팔, 다리, 손, 발, 다 형태 잡힌 거 보이시죠?”
“네, 그러네요.”
그저 쬐끄만 꼬물이에 불과했던 아이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숨어 자라게 했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조금 전 정밀 초음파에서 보았던 아기의 손 모양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직은 너무 작아, 고사리 손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그것이 어찌나 애틋해 보이던지.
“코뼈도 정상이고, 머리뼈도 정상입니다. 오늘 피 검사도 할 건데, 그 결과는 나중에 2차 검사 때 교차 비교해서 알려 드리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