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 엄마 아빠 싸움은 칼로 물 베기 (4)
“먹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아까 보니까 소시지 뚫리겠던데.”
“…….”
“이런 가공식품 별로 좋진 않겠지만, 제대로 먹은 것도 없으니까 이거라도 많이 먹어요.”
“…….”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나 은수 씨 덕에 눈치만 엄청 늘고 있는 것 같아요.”
보나 마나, 먹고 싶은 걸 티 내기 싫어서 그렇게 말도 안 하고 쳐다보기만 했을 것이었다.
이거 계산대에 놓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그는 얼른 손바닥 위에 있는 소시지 하나의 비닐을 훌렁 까서는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손에 든 소시지를 보며 잠깐 주저했지만, 이내 마치 햄스터마냥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보더니 슬쩍 한입을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네.”
희한하지. 나도 이게 왜 먹고 싶었을까.
약간의 치즈향이 풍기는 소시지를 야금야금 베어 먹으며,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엄마랑 같이 슈퍼에 가면 계산할 때 꼭 엄마가 하나씩 사 줬었거든요. 다른 건 비싸니까 잘 못 사 주고, 선심 쓰는 척 이런 거 하나 쥐어 주면 엄청 좋았었는데.”
“…….”
“그냥, 쪼끄만 슈퍼를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먹고 싶었나 봐요.”
역시 그녀를 내보내고 사길 잘했다. 앞에서 샀으면 분명 사지 말라고 했겠지.
잘 먹는 여자의 모습을 보니 그는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은수 씨.”
“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또 웬 부탁. 이젠 이 남자가 뭘 말하면 두려움이 먼저 드는 은수였다.
“……뭔데요?”
현재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열리다가 꾹 닫혔다.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것인 듯했다.
그러나 결심한 그는 이내 다시 입술을 떼었다.
“뭔가 불편하다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달라고요.”
“…….”
“뭔가를 맘대로 쉽게 결정 내리지도 말고, 나 너무 밀어내지도 말고요.”
“…….”
“은수 씬 워낙 혼자 알아서 잘하긴 하지만, 가끔은 나한테 기댔으면 좋겠어요.”
“…….”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요, 나.”
그는 마지막 말을 유난히 힘주어 말했다.
내가 그렇게 모진 말을 해도 이 남자는 어쩜 이리 한결같은지. 은수는 괜히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방금은, 꼭 남편 같았어요. 아기 아빠 아니고.”
“……아, 미안해요. 선을 넘은 건가.”
그가 왼손으로 뒷머리를 헤집는다. 요즘에서야 알게 된, 현재가 머쓱해할 때면 나오는 버릇.
“그래도 약속해요. 혼자 낑낑거리면서 말도 안 하고 그러지 않기로.”
“…….”
“그리고…… 정말 말하기 싫더라도, 차라리 말을 안 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안 된다고 말을 해. 거기다…… 방금 그 말은 좀, 무시 못 할 정도로 감동적이기도 하고.
은수는 결국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자.”
그가 은수의 앞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을 보며 잠시 주저하고 있던 은수는 뒤따라 조심스럽게 반대쪽 새끼손가락을 들어 그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약속.”
“…….”
“약속한 거예요.”
“……알았어요.”
자꾸만 이렇게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이유를, 은수는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어쨌든 아이를 지키려면 그의 도움은 불가피했다. 직장을 다니는 여자가 홀로 임신 사실을 숨기며 버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나 오늘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
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면서, 은수는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했던 고민을 이제 끝내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두려움 때문에 미뤄 놓고 싶었던 것.
하지만 이젠 괜찮았다. 괜찮아야 했다.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요.”
“…….”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아요.”
“……뭘요?”
미혼모의 낙인쯤이야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면 감수해야 하는 거니까.
“아기요, 내 아기.”
마치 결단을 내리기라도 한 듯한 은수의 얼굴을 보며, 현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리고 말았다.
“설마, 임신했다는 거…… 밝히실 생각이십니까?”
은수는 입술을 모은 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대한 빨리요.”
언젠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갑작스럽다니.
현재의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아무리 시원시원하고, 한 번 결정하면 거침이 없는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결정까지 이렇게 단숨에 내려 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것도 저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은수는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사실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이 결정은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마음이 바뀔 일은 없었다. 오늘처럼 기절까지 해 버린 이상은.
이건…… 자신이 쥐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내려놓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건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1순위였구요.”
“…….”
“하지만 지금은 아기가 생겼고, 난 이제 그 둘 중 하나를 1순위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둘 다 포기할 수 없게 됐어요. 그런 내가 그 둘을 다 지켜 내기 위해선 가능한 한 빨리 밝히는 게 최선일 것 같았어요.”
반쯤 남은 소시지를 살짝 쥔 손이 미미하게 튀어나온 배를 슥슥 어루만졌다.
“지금이야 티가 잘 안 나니까 괜찮지만, 조금만 지나면 배도 부를 거고…… 그때 가서 말하려면 더 곤란할 거예요. 매를 맞을 거면 차라리 미리 맞는 게 속이 편하죠.”
“…….”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처럼 아기가 위험한 환경에 놓이게 하는 일, 더는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임신 발표를 한다면 사람들은 수군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분명 그녀가 임신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행동할 것이었다.
그럼 오늘처럼 무리한 운동을 시킬 일도 없을 것이고, 일찍 퇴근하는 걸 말리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눈치는 좀 주겠지만.
그렇게 되면 적어도 아이는 별 탈 없을 테니까. 당장은 힘들되, 장기적으로는 편해질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 줄 알면서도 말리고 싶었다. 아이만 무사하면 뭘 하나.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릴 여자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아픈데.
그러나 결혼하자는 자신의 제안을 뿌리치고 미혼모가 되기를 자처한 여자는, 이미 무지막지한 희생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도저도 못 하게 된 현재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홀로 이겨 내고자 하는 여자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 텐데…….”
결혼도 안 한 팀장이 임신을 했다고 한다면 사람들 반응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수는 그를 힐끔 보더니, 가볍게 픽 웃었다.
“그런 게 무서웠음 낳겠다는 생각도 안 했어요.”
잠시 입을 다문 채 “음…….” 하고 소리를 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겁은 나죠, 나도 사람인데. 그치만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으니까,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겪어야 할 일이잖아요.”
“…….”
“난, ‘어차피 부딪쳐야 하는 거라면 내가 선빵을 때리는 게 낫다’는 주의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제 팔로 쾌활하게 현재의 팔뚝을 툭 쳤다.
“걱정 마요. 아빠가 누구라곤 얘기 안 할 거니까. 그 사람들도 최소한 눈치가 있으면 그런 건 안 물어보겠죠.”
지금 누가 그런 걸 걱정하고 있나. 내가 걱정하는 건 오로지 당신인데. 일부러 씩씩한 척하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현재는 그런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서서히 안타까움에서 안쓰러움으로, 또 안쓰러움에서 애정으로 변해 갔다.
“은수 씨.”
은수의 이름을 부르는 현재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나도 더 이상은 한계야. 참는 데도 한도가 있다고.
“네?”
“한 번만 안아도 돼요?”
……이게 무슨 소리야?
“네? 무슨…… 헉!”
은수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어깨를 제 품으로 힘 있게 끌어당겼다.
생각할 새도 없이, 졸지에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현재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사과처럼 물들었다.
‘내가 아이 아빠인 걸 감안해서 몇 걸음 물러서 준 건 맞지만, 이런 것까지 허락한 건 아니었는데!’
이러한 기습 포옹에 결코 가만히 있을 은수가 아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
그러나 현재 또한 그녀의 몸부림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워낙 기본적인 힘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터라, 먹은 게 없어 몸 가눌 힘도 약해진 그녀가 그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힘이 빠진 은수를 겨우 잠잠하게 만든 현재가 그녀를 꼬옥 끌어안고 토닥였다. 내가 곁에 있어 줄 테니 안심하라는 마음을 담아서.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요.”
“…….”
“너무 안아 주고 싶어서 그래요.”
사실은, 포옹이 아니라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간 길길이 날뛸 그녀임을 알기에, 그나마 자신의 알량한 인내심과 타협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
그의 뜨끈한 목덜미가 그녀의 뺨에 와 닿았다. 옷에 밴 섬유 유연제 향과 그가 가진 특유의 향이 섞여 은수의 코를 아찔하게 간질였다.
꼼짝없이 품에 가둬진 그녀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불시에 안긴 거라고 해도, 이렇게 빨리 뛰는 게 정상인 걸까?
그녀가 혼란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감쳐물자, 그의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통해 흘러들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걱정되는데.”
이상했다. 만날 듣던 목소리인데도,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한층 더 무겁고 진하게 들리는 게.
“솔직히…… 나도 아직은 괜찮을 거라고 말 못 하겠어요. 저질러 봐야 알 것 같아.”
‘저지른다’는 표현에 그가 쿡쿡 웃었다.
“나랑 삼계탕 먹던 날, 그날처럼만 해요. 당당하게.”
문득 그날 그가 지었던 표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야말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었는데.
소리 없이 살짝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짐짓 화난 척하며 말했다.
“……지금, 소시지 다 뭉개진 거 알아요?”
“하나쯤 뭉개지면 어떻다고요. 어차피 많이 사 놨는데.”
“손 찝찝해요.”
“씻으면 되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요?”
“모르겠어요. 가능하면 아침까지?”
“……제정신이 아니네요.”
“맞아요. 은수 씨 때문에.”
“……현재 씨는 진짜,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거예요.”
“그럴 일 없어요. 나 수영도 잘해요.”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고개를 걸친 채로 웃었다.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들뜨는 건 왜일까.
“다들, 많이 놀라겠다. 그쵸?”
“……그러게요. 다들 입이 떡 벌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