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21. 엄마 아빠 싸움은 칼로 물 베기 (3)
“아, 이거, 잘 쓰고 있어요. 고마워요.”
“…….”
“원리는 모르겠는데, 꽤 효과 좋은 거 같아요.”
그러면서 입덧을 언제 했냐는 것처럼, 두툼한 고기를 집게로 집어 입에 넣는다.
살짝 비위가 상한 듯한 표정이 올라왔지만, 이내 그녀는 고기를 꿀꺽 삼켜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짠해지는 건 왜일까.
차마 미안하단 말은 못 하고 괜히 이런 곳까지 자신을 데려온 은수의 마음을 뻔히 알 것만 같아서, 현재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하던 중, 씩씩하게 고기를 씹던 은수가 불쑥 이야기를 꺼내었다.
“서 팀장님이랑 나.”
“…….”
“무슨 사이인지 그렇게 궁금했어요?”
그가 젓가락을 손에 든 채로 은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반찬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실은 아무 사이 아닌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랑 나…… 사귀던 사이예요. 3년 사귀고, 몇 달 전에 헤어졌어요.”
“…….”
“그날,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예요.”
물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왜 이렇게 마음이 저린지.
현재는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때문에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뇨, 안 되는데요.”
그러고서 그녀는 픽 웃었다. 정색을 하고 안 된다고 하는 통에 순간 긴장했지만, 이내 그녀의 장난임을 알아챈 그도 덩달아 살짝 웃었다.
잠시 뒤, 웃음기를 거둔 그녀가 손바닥에 상추를 얹고 이것저것을 올려 쌈을 싸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결혼하기 싫다고 했거든요.”
“…….”
“웃기죠. 여기저기 나랑 결혼하겠다는 사람 천진데, 난 싫다고만 하고.”
“…….”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나는, 전혀 웃기지 않은데.
자조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인다고, 현재는 생각했다.
얘기를 하는 동안 큼지막하게 쌈을 싼 그녀가 현재의 앞에 그것을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덧붙였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그런 질문에 대답해 주는 거.”
“…….”
“얼른 먹어요. 빨리 가게.”
사실은 왜 결혼이 싫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현재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 * *
“은수 씨, 어디 가요?”
“땡땡이쳤는데, 빈손으로 가긴 좀 그렇잖아요.”
고깃집을 나온 은수는 곧바로 건너편에 있는 슈퍼로 향했다.
술고래 몇몇이 섞여 있으니 분명 준비해 간 술이 모자랄 것이다. 해서, 기왕 가는 김에 술도 더 사 가고, 안주도 좀 더 사다 주려는 생각인 것이었다.
역시나 팀장님다운 생각이네. 현재는 대꾸 없이 은수의 뒤를 따랐다.
은수를 만류하고 대신 바구니를 손에 든 현재가 맥주와 소주 몇 병씩과 마른안주, 과자들을 담았다. 바구니를 살짝 무겁게 채우는 동안, 현재는 멀찍이 있는 은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카운터 옆에 서 있는 은수는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
뭘 저렇게 집중해서 보는 걸까.
어느새 바구니를 다 채워서 계산대로 가지고 온 그가 그런 은수를 깨웠다.
“은수 씨, 뭘 그렇게 봐요?”
“네? 아, 아니에요…….”
“먼저 나가 있어요. 내가 얼른 계산하고 나갈게요.”
“아니에요, 내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고기 은수 씨가 샀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내가 살게요.”
“……그래도…….”
결국, 현재에게 떠밀린 은수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현재는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냉큼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계산을 다 하고 꽤 무거운 봉지를 손에 든 채로 슈퍼에서 나오자 당연히 보이리라 생각했던 은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덜컥 놀란 현재가 두리번거렸다. 그때, 옆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쭈쭈, 손. 손.”
“…….”
“에이, 손 달라니까. 아, 강아지니까 발을 달라고 그래야 되나.”
“…….”
“자, 그럼. 발. 발.”
“……뭐 해요, 거기서?”
“엄마!”
깜짝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왔으면 기척을 해야죠. 놀랐잖아요.”
“거기 뭐 있어요?”
“아, 여기 강아지 있어서요.”
자세히 보니 슈퍼 옆 한편에 누런 강아지 하나가 매여 있었다. 아마도 슈퍼에서 기르는 강아지인 듯했다.
흔히 볼 수 있는 누렁이였지만 태어난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크기가 매우 작았다. 쭈그려 앉아 누렁이의 털과 머리를 쓰다듬는 은수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강아지,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키운 적 있어요?”
“……아뇨. 한 번도 없어요.”
그녀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걸로 조금 점수를 딸 수 있으려나. 큼큼 헛기침을 한 그가 짐짓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 집에도 있어요, 강아지.”
강아지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가 그 말을 듣자마자 현재를 휙 돌아보았다.
강아지가 그렇게 좋은가. 반응을 보면 확실히 점수를 따기는 할 것 같은데, 왠지 개한테 밀리는 듯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정말요? 종이 뭔데요?”
“포메라니안이요.”
“우와, 예쁘겠다. 그럼 하얗겠네요?”
씩 웃은 그가 은수의 옆으로 다가가 똑같이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포메라니안이 다 하얄 거라는 편견을 버려요.”
“그럼요?”
“갈색이 섞였어요. 나름 예술적으로.”
“아아, 그렇구나. 궁금하다.”
강아지를 쓰다듬는 손이 마치 병원에서 배를 쓰다듬던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럽다.
물끄러미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현재가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좋아하면 한번 키워 보지 그래요? 혼자 있어서 외로울 텐데, 친구도 되고 좋잖아요.”
긍정의 대답이 들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난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강아지가 외로울 거예요, 혼자.”
그 말을 하고는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이윽고 덧붙였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아예 키우지 않는 게 나아요.”
지금껏 그가 본 것 중 가장 씁쓸한 미소였다. 왠지 모르게 말에 뼈가 있는 듯한 느낌.
이상하게도, 그녀를 달래 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왕 땡땡이친 김에 잠깐만 저기 앉았다 갈까요?”
* * *
“와, 그래도 교외로 나오니까 별이 보이긴 보이네.”
“그러게요.”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평상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홀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 그녀가 더없이 아름다워서, 현재는 홀린 듯이 밤하늘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서울 온 뒤론 별을 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
마치 어딘가에 고향을 숨겨 둔 듯한 말투였다.
“은수 씨, 원래 서울 출신이 아니에요?”
그러자 퍼뜩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아까 전 일 때문에 그는 질문을 하기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소심하기는. 살풋 웃은 그녀가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이래봬도 자랑스러운 경상남도 출신이에요. 나 꼭, 서울 토박이 같죠?”
“……네. 그런 줄 알았어요.”
다들 그렇게 오해들을 한다니까. 그녀가 양쪽 팔을 평상에 올리며 중얼거렸다.
“대학 가면서 처음 서울로 오게 된 거예요. 처음 왔을 때는 사람도 너무 많구, 너무 복잡하구…… 나랑은 영 안 어울리는 도시 같았는데.”
“…….”
“근데 또 살아 보니까 괜찮더라구요, 나름. 사투리 고치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옛날 생각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내리깐 은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쌀쌀한 밤공기와 부윰한 달빛, 별빛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 스무 살 때는 진짜 사투리 장난 아니었거든요. 동기들, 선배들 가릴 거 없이 다 나 놀려 대기 바빴죠. 어디서 촌뜨기 같은 게 굴러들어 와서,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재밌다구.”
“…….”
“지금 생각하면 참 악착같이 살았던 거 같아요. 남아 있는 건 오기밖에 없었고, 남들한테 지기 싫어서 참 아등바등 살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겠지만.”
“…….”
“생각해 보면…… 별이 안 보여서 못 본 게 아니라, 볼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
“그때는, 이렇게 여유롭게 밤하늘을 쳐다볼 여유가 없었으니까…….”
쓸쓸하게 읊조리는 여자의 옆모습을, 현재는 뭉클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없던 때에도 참 열심히 살았던 여자구나. 이 자리까지 정말, 괜히 온 것이 아니구나.
그러니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 세상이 다 무너진 기분이었으리라.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도 이젠, 이렇게 볼 수 있잖아요. 그거면 됐지, 뭐.”
“…….”
“저기, 현재 씨.”
“…….”
“오늘 피구할 때 멋있었어요.”
“……정말요?”
“네. 보기보다 운동 되게 잘하던데요. 다시 봤어요.”
이젠 내 얘기를 할 차례인가. 그녀를 보며 웃은 현재가 뿌듯한 얼굴로 입을 떼었다.
“사실, 나 원래 운동선수 하려고 했었어요.”
“진짜요? 어떤 거요?”
“축구 선수요. 일찍이 접었죠.”
“에이, 그럼 오늘 피구 말고 축구를 했어야 됐네. 그럼 우리 팀이 이겼을 텐데.”
“아니었을 걸요. 재능이 없어서 접은 거거든요.”
“……설마.”
“그래도 원래 운동하던 애들이 집중력이 있어서 공부를 더 잘해요. 뭐, 내가 그렇단 얘긴 아니고요.”
“…….”
자랑 아닌 자랑에 못 말리겠다는 듯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은수에게로 얼굴을 휙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 나한테 반했어요?”
아, 깜짝이야! 애 떨어질 뻔했네.
어느샌가 바짝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끔뻑끔뻑 쳐다보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저를 찍어 보이며 물었다.
“누가요. 내가요?”
“그럼 여기 은수 씨 말고 누가 있어요.”
“……허, 참. 퍽이나 그랬겠네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웃은 그가, 다시 얼굴을 제 위치로 돌려놓으며 농담 섞인 진담을 던졌다.
“아니라면서 왜 그렇게 웃어요, 사람 착각하게.”
이젠 맘대로 웃지도 못하겠네. 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쳇, 착각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네요.”
그녀가 그러는 동안, 현재는 옆에 놓아두었던 까만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그녀에게 건네었다.
“자, 이거요.”
“네?”
무심코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본 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내민 것은 슈퍼에서 파는 노오란 소시지였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다섯 개.
“이걸 왜…….”
본인이 그렇게 쳐다봐 놓고, 그녀는 이런 걸 왜 사 왔냐는 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