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 엄마 아빠 싸움은 칼로 물 베기 (2)
한편 은수와 현재는 숙소에 가는 문제를 두고 대치중이었다.
은수는 이제 결과도 확인했으니 얼른 가자는 입장이었고, 현재는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병원에서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니, 지금 이 몸을 하고 대체 어딜 간다는 거예요. 여기 좀 더 있다가 가요.”
“아기는 괜찮다면서요. 그럼 나도 괜찮아요. 더 지체하면 사람들이 오해할 거예요. 뭐, 이미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오해요?”
당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신발을 신는 그녀를 막으며 현재가 물었다.
현재의 저지에 잠시 머뭇거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들 오해하고 있어요. 현재 씨가 날 좋아한다구요.”
“…….”
“날 생각하는 현재 씨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자꾸 이렇게 나랑 엮이는 걸 보이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
“평소에도 그렇구……. 오늘만 해도 자꾸 나랑 같은 팀으로 붙여 달라느니, 같은 조 하겠다느니……. 자꾸 그러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
“벌써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다 어쩌라구요.”
억울한 듯 내뱉는 은수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현재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오해가 아니죠.”
“…….”
“내가 은수 씨 좋아하는 거, 은수 씨도 알잖아요.”
“…….”
“틀린 말도 아닌데.”
지금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나?
갑자기 끓어오르는 짜증을 콱 누르며, 은수는 애써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치만 계속 이렇게 현재 씨가 날 유달리 챙기고, 남들 앞에서 티를 내면…… 그럴 때마다 난 어떡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구요.”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잖아요. 이런 상황에, 그렇게 사람들 상상 자극해서 좋을 게 뭐예요!”
“…….”
“내가 어떨지 생각은 해 봤어요? 현재 씨가 그러면, 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냐구요!”
지금껏 미처 하지 못하고 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말을 다다다 늘어놓은 은수가 급박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현재의 눈빛이 한껏 흥분한 은수의 눈빛과 맞닿았다.
“……너무 그렇게 열 내지 말아요. 아기한테 안 좋아요.”
자기만 끝까지 이성적인 척. 누구는 아기 걱정 안 하는 줄 알아?
잔뜩 비틀린 감정 탓인지, 그녀는 마음조차도 삐딱해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
“……좀 부담스러워요, 불편하고.”
결국,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방금 전 말은 괜히 한 걸까? 말을 내뱉자마자 은수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살짝 상처받은 듯한 현재의 눈빛이 강렬하게 그녀를 관통했다.
약간 물러서 있던 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그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불편해요? 부담스럽고?”
……상처 줄 생각 같은 건 없었는데.
물론 화가 났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결코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한순간에 낭패감이 밀려든 은수는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마음 상했다면 사과할게요.”
은수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어서인지, 어느새 그에게서 나는 머스크향이 아까 전 코를 찔렀던 병원 냄새보다도 더욱 짙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그만의 향기였다.
그것을 느끼자 그녀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근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요.”
짧게 이어진 침묵에 먼저 균열을 낸 것은 현재였다.
당연히 자신의 말을 따지고 들거나 책망하겠거니 생각하며 은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서지훈 팀장.”
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예기치 못한 이름에 은수는 당황한 눈빛으로 현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과 은수 씨, 무슨 사이인지.”
“…….”
“내가 물어봐도…… 됩니까?”
그에게서 흘러나온 질문은…… 정말 뜻밖의 것이었다.
그 상태로 제자리에 얼어붙고 만 은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혹시 이 남자가,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러나 은수는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간신히 되찾은 채 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사이냐뇨?”
은수의 반문에도 현재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서 팀장님과 은수 씨요, 아무 사이도 아닙니까?”
그도 나름대로는 짐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은수는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라……. 지금으로 따지면 그렇기는 한데.
그에게 뒤질세라 덩달아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은수가 저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네.”
그녀의 대답에 현재의 눈썹이 바로 불퉁하게 올라갔다.
“정말이요?”
“……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닙니까.”
아니라면 아닌 거지, 이 남자는 뭘 이렇게 꼬치꼬치 물어보는 거야?
몹쓸 반발심이 올라와 그녀의 목구멍을 툭 건드렸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돼요? 아니라구요.”
격앙된 감정 때문인지 말이 자꾸만 부드럽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는 은수의 말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
“…….”
“은수 씨 지금, 내 눈 못 쳐다보잖아요.”
그제야 은수가 다시 고개를 들어, 살짝 놀란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았다. 타박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투는 방금 전 은수만큼이나 무덤덤했다.
“다 티 나요. 은수 씨가 거짓말하거나, 당황할 때.”
“…….”
“매사에 그렇게 당당한 사람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는 세상에서 제일 난처한 얼굴을 하잖아요.”
“…….”
“아니에요?”
나직한 현재의 말에 은수는 진정으로 당황했다. 칼날도 아니고 총알도 아니건만, 뭔가 예리한 것에 관통당한 느낌이었다.
이제껏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또 이렇게까지 나의 감정 변화를 잘 알아채는 사람도 없었지. 심지어 엄마나, 친구들이나, 지훈과 비교해서도.
정곡을 찔려 버린 은수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떨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난 그냥 별생각 없이…….”
변명하듯 중얼거리던 그녀가 일순 뚝 멈추었다.
잠깐, 내가 이 남자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하지? 나한테 이 사람이 뭐기에?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현재를 쳐다보는 은수의 눈빛에 반항심이 일었다.
“내가 왜 이런 걸 일일이 현재 씨한테 말해 줘야 되죠?”
“…….”
“현재 씨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기껏해야 우리 만난 지 몇 달 안 된 사이잖아요.”
“…….”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나가는 말은 모조리 모질었다. 그러나 은수 스스로조차도 그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말이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왔다.
“현재 씨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현재 씬 내 애인이 아니에요. 남편은 더더욱 아니구요.”
“…….”
“행동, 확실히 해 줬음 좋겠어요.”
현재는 날카로운 말을 퍼부어 대는 은수를 아무 말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을 마친 은수가 다시금 눈빛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그래도 좀 심했나. 말을 다 하고 나서야 드는 이 후회는 대체 어떡해야 할는지.
잠시 뒤, 현재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알아요, 나 은수 씨한테 그런 사람 아닌 거.”
“…….”
“나도 잘 아는데, 그런데.”
“…….”
“그게 잘 안 돼요.”
그 말에 반쯤 내려가 있던 은수의 눈꺼풀이 말려 올라갔고, 두 사람의 눈빛이 부드럽게 얽혀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들이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그날만큼이나 달콤하고, 다정했다.
“은수 씨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지…….”
“…….”
“난 다 궁금합니다, 은수 씨에 한해서.”
“…….”
“그래서, 모른 척하려고 해도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돼요.”
“…….”
“미안해요. 자꾸 본분을 잊어버려서.”
상처 입은 사자의 눈이 이러할까.
평소엔 그렇게 남자답고 어른스러우면서도, 이럴 때 남자에게선 아직 채 영글지 못한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가시 돋친 제 말에도 한없이 따뜻하기만 한 그의 눈빛 때문에, 은수는 마음 한구석에서 미안함 비슷한 것이 뻐근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여튼 정말, 정말 많이 신경 쓰여. 짜증 나게.
“하지만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말을 마친 그는 금세 은수에게서 물러나 옷가지들과 소지품들을 챙겼다.
은수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 탓에 그 상태 그대로 오도카니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럼 여기 말고 거기 가서 쉬는 걸로 해요. 그건 괜찮죠?”
“…….”
“가요, 은수 씨.”
……왠지 이대로 가면 정말로 후회할 것만 같다. 너무나.
그때,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튀어나왔다.
먼저 병실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떼는 그를 보고 있던 은수가 재빨리 그의 옷소매를 잡아챈 것이다.
“잠깐만.”
“…….”
“잠깐만요, 현재 씨.”
의아한 표정의 그가 그녀를 향해 다시 돌아섰다. 은수는 왠지 모르게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얘기해야 할까.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를 않았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국 은수가 내뱉은 것은, 서툰 사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출발해서 도착하면…… 남아 있는 게 없을 것 같은데…….”
“…….”
“우리…… 가기 전에 땡땡이칠래요?”
* * *
지글거리는 소리가 좁은 가게 안을 울렸다. 야무진 느낌으로 고기 집게를 손에 든 은수는 열심히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잘 굽기는 하지만…… 임신한 사람이 이러고 있는 게, 참.
보다 못한 현재가 은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할게요. 이리 줘요.”
“내가 한다니까요. 현재 씨는 빨리 먹기나 해요. 오늘 하루 종일 수고해서 많이 배고플 텐데.”
예정했던 바비큐 파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아쉬운 대로 근처 고깃집을 가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은수의 제안 때문이었지만.
은수는 다 익은 고기를 현재 쪽으로 놓아 주었고,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그것을 천천히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은수가 오늘 중 가장 신이 난 얼굴로 현재에게 물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맛있는데…… 은수 씨는, 괜찮겠어요?”
“나도 좀 먹으면 되죠.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요.”
한창 고기를 뒤집던 그녀가 성가시게 내려온 소매를 걷었다. 고기보다는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던 현재가 그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그 물건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의 눈길이 와 닿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가 민망한 듯 살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