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19. 엄마 아빠 싸움은 칼로 물 베기 (1)
“은수 씨.”
“…….”
“은수 씨, 정신이 좀 들어요?”
마침내 은수가 눈을 떴다. 마치 억겁의 시간이 흐른 듯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단 몇 초 정도만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천근같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어렴풋한 마지막 기억 속에 남겨져 있던 멀끔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현재…… 씨.”
그가 누군지를 인식하자마자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청결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나쁜 시큼한 냄새. 살짝 내리깐 시선 끝에는 링거 바늘이 꽂힌 자신의 손목이 보였다.
은수는 그제야,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왜 여기 있어요?”
잔뜩 잠긴 그녀의 목소리가 안쓰러운 듯 현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가능한 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은수 씨, 쓰러졌잖아요.”
“…….”
“오늘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현재의 대답에, 은수는 흐리멍덩한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했다.
쓰러졌다. 내가, 쓰러졌다. 그렇다면…….
천천히 기억을 곱씹던 그녀의 눈에 별안간 이채가 띠었다.
“아기는요?”
방금 전까지 죽은 듯 누워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날쌘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다짜고짜 질문 공세를 날리기 시작했다.
“아기는 괜찮아요? 이상 없대요? 무사하대요?”
“잠깐만, 잠깐만. 은수 씨, 일단 진정부터 해요.”
덩달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현재가 얼른 은수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역시나.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예상했던, 그 반응 그대로였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현재는 평소와는 달리 유독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기는 괜찮아요. 아무 이상 없대요.”
“……정말요? 진짜 괜찮대요?”
정말 괜찮은 걸까? 직접적으로는 아니어도, 바닥에 꽤 세게 부딪쳤던 것 같은데…….
자신을 붙든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은수의 눈동자에 걱정과 간절함이 어렸다. 그 맘을 이해한다는 듯, 현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의사가 확인하고 갔어요. 정말 괜찮대요.”
“……하아.”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의사’라는 단어에, 잔뜩 들어가 있던 긴장이 풀리며 은수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녀가 안도하는 걸 확인한 현재는 그제야 은수를 놓아 주었다. 힘이라곤 모두 빠져나가 버린 듯한 그녀에게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무 일도 없어서.
링거 때문에 불편한 그녀의 손이, 아직 얼마 나오지 않아 살짝 볼록하기만 한 배를 문질렀다.
“…….”
그녀가 하는 양을 잠시 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던 현재는 이내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본인부터 환자가 되어 내내 누워 있었으면서도, 깨어나자마자 하는 건 아기 걱정이라니. 그는 그녀가 안 그런 척하면서도 내심 아기를 정말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은수는 아기 다음으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작고 거칠었다.
“근데, 나 왜 쓰러진…… 거래요?”
“…….”
“요즘 좀 어지럽기는 했는데……. 그래도 내가 이렇게 기절까지 할 줄은…….”
그 말에 은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의 입술이 심각한 듯 일자를 그렸다.
“은수 씨 원래, 빈혈이 좀 있었어요?”
“……빈혈이요?”
빈혈기가 조금씩 있기는 했었지만, 심각한 정돈 아니었는데.
의아해하는 은수를 보며 현재는 곧바로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빈혈에 저혈당이 뭐예요. 내가 안 챙겨 준 것도 아니고.”
“…….”
“뱃속에 아기도 있는데 들어가는 건 오히려 평소보다 더 없으니까, 은수 씨같이 가녀린 몸이 그걸 견뎌 낼 수 있겠어요. 그렇잖아도 스트레스도 잔뜩 받는데.”
그가 속상함을 토해 내려는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배에 올라가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따뜻하게 그러쥐었다.
“힘들면 말하지, 왜 혼자 꾹꾹 참았어요.”
“…….”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은수 씨가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든 구해서 갖다 바쳤어야 했는데.”
“…….”
“빈혈약 먹으면 좋긴 한데, 지금은 초기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입덧이 더 악화될 수 있대요. 중기 접어들면 그때부터 먹으면 될 것 같아요.”
그의 포근한 말투, 따뜻한 눈빛에 은수는 괜히 뭉클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좀 불편해도 그에게라도 도움을 받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현재 씨 잘못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내 몸이니까, 내가 잘 간수했어야 되는데.”
은수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들은 현재는 픽 웃었다.
“은수 씨가 그렇게 말하면 나 더 미안해지는 거 몰라요? 아님 미안해하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
“은수 씨 몸이 이런 줄 알았으면 피구도 어떻게 해서든 못 하게 했을 거예요. 팀도 내 맘대로 바꿨는데, 그 정도쯤 못 했을까.”
……이 남자는 대체. 그의 태도는 어디 따로 믿는 구석이 있나 싶을 정도로 당당했다.
현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은수가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한 경기도 안 하는 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좀 그랬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다들 어디로 가고, 나와 이 남자만 여기에 있는 걸까?
“근데, 다른 사람들은요?”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현재가 멀뚱멀뚱 대답했다.
“사람들이야 다 숙소에 있죠. 지금쯤이면 아마…… 한창 술 마시고 있을 텐데.”
병실의 풍경과 제 배를 번갈아 보고 있던 그녀가 ‘술자리’란 얘기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기에 대한 걱정이 사그라지자 금세 또 다른 걱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이면 이 남자랑 같이 와서. 혹시 누가 의심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지금 몇 시예요?”
“어…… 여덟 시 좀 안 된 것 같은데요.”
남자의 불분명한 대답은 성에 차지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다래지더니, 그녀는 바로 주섬주섬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빨리 가요, 우리.”
“예?”
예고도 없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전개에, 현재는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도 가자구요, 빨리!”
* * *
숙소는 현재의 말대로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은수의 실신 때문에 야심차게 준비했던 체육 대회는 어영부영 끝나 버렸고, 그들은 서둘러 바비큐 파티 겸 술자리를 준비해야 했다.
그래도 알코올은 확실히 분위기 쇄신에 효과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그들은 금세 달아올랐고, 팀과 상관없이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진정한 친목 도모를 진행 중이었다.
“지금쯤이면 팀장님이 깨어나셨으려나. 괜찮아야 될 텐데.”
“그러게요. 아마도 깨어나지 않았을까요?”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술을 꽤 많이 마셔 얼굴이 붉어진 박 과장이 그새 다들 잊고 있던 현재와 은수의 얘기를 화두에 올렸다.
“연락 준다더니 아직도 안 오는 걸 보면 아직 안 깬 것 같기도 하고……. 근데 현재 씨만 덜렁 보낸 게 계속 맘에 걸리네. 다른 사람도 같이 보낼 걸 그랬나.”
박 과장과 달리 주량이 센 탓에,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얼굴 상태로 고기를 집어먹던 이 대리가 억울한 듯 대꾸했다.
“현재 씨가 자기만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겨 대는데 어떡합니까, 그럼. 무슨 공주 모시는 호위 무사도 아니고…….”
“하긴, 그건 그렇네. 언제쯤 올까 모르겠다.”
“근데 현재 씨……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긴 하죠. 그쵸, 과장님?”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팀장님은 별생각 없어 보이는데, 현재 씨는 확실히 달라. 팀장님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그게?”
그때, 갑작스런 등장에 모두가 깜짝 놀라 한곳을 쳐다보았다. 이 대리의 말 한마디에 뒷전에 조용히 서 있던 민희가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다.
“누가 누굴 좋아한다구요? 현재 씨가 팀장님을요?”
“아, 아니, 민희 씬 갑자기 와서 왜 이래?”
“듣다 보니 어이가 없어서 그러죠. 좋아하긴 뭘 좋아해요, 참나.”
“좋아하는 거 맞는 것 같던데, 왜?”
때 아닌 웅성거림에 약간 멀리 떨어져 있던 지훈도 그들을 주목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팀장’이 은수를 뜻하는 것임을 그도 모를 리 없었다.
다들 민희가 현재를 좋아하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나선 적은 없었기에 모두 놀란 상태였다. 민희는 취기에 힘입어 살짝 꼬부랑거리는 발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대리님! 현재 씨가 좋아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슨 팀장님을…….”
“……민희 씨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좀 심한 거 아니야?”
동료로서, 같은 여자로서, 그리고 또 한 사람으로서 은수를 좋아하는 박 과장이 민희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신입 사원인 민희는 가끔씩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아무리 은수가 팀장으로서의 직급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허물없이 잘해 주기로서니, 어찌 감히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민희는 상사의 지적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대꾸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니, 다른 사람도 당연히 아니지만, 팀장님은 더더욱 아니죠! 현재 씨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시잖아요. 완전 누나뻘인데, 그 두 사람을 엮으려 하시는 게 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이거 어째, 돌아가는 이야기가 좀 이상한데.
잠잠히 듣고 있던 지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대충 들리는 이야기로 봐서는, 남자 신입 하나가 은수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다. 심지어 그가 은수와 비밀 연애를 할 때에도 그녀는 뭇 남성들로부터 틈틈이 고백을 받곤 했으니까. 누군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건 그로선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지훈에게조차도 다섯 살 어린 신입 사원의 이야기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까 전 은수가 쓰러지고 난 직후, 자신이 무언가 손 쓸 틈도 없이 바로 그녀를 들쳐 업고 쏜살같이 달려가던 젊은 남자의 얼굴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은수가 많이 취했었던 그날, 그의 자존심을 무참히 상하게 했던 남자.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도 가끔 마주쳤던 그 남자.
그러고 보니 그 모든 게 은수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어차피 그 여자는 누가 자기를 좋아하든 말든, 그런 거 신경도 안 쓸 텐데.’
그렇게 끝이 나긴 했어도, 은수는 언제나 그에게 솔직한 여자였다. 그리고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 점 때문에, 그녀에게 쏟는 애정을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열렬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녀는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 신입 사원만큼이나, 자신과 오늘 한 조를 이뤄 경기를 했던 저 여자 신입도 패기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하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민은수 성격에 저 일을 알면 뭐라고 하려나. 아파서 다 죽어 가다가도 달려와 윽박지를 것만 같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 없는 데서 그런 얘기 하면 실례라는 거 몰라? 민희 씨 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만해.”
“저 멀쩡해요, 과장님.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야, 그만해, 이제. 정신 차려.”
“아, 내가 뭐.”
결국 보다 못한 유라가 민희의 등짝을 한 대 때리고 나서야 민희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진짜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네.
할 말을 잃어버린 박 과장은 애꿎은 이 대리를 걸고 넘어졌다.
“이 대리는 그러게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해 가지고!”
얼이 빠진 이 대리가 입을 딱 벌렸다.
“……왜 저를 갖구 그러십니까! 별생각 없이 한 얘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