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 굴러들어 온 돌, 박혔다 빠진 돌 (2)
팀장의 도발적인 발언에 2팀 팀원 대부분은 동시다발적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쏟아 내었다. 반면 1팀 팀원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뭐야, 벌써부터. 신경전이야?”
“아, 열 받아. 우리도 저런 말 한마디 했어야 되는데!”
“우리 팀장님은 착해서 저런 말 못 해요.”
팀장인 은수 또한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지훈 쪽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이 대리는 서로를 쳐다보는 두 팀장 가운데서 고래 사이에 낀 새우처럼 멋쩍은 듯 웃었다.
하지만 그는 쇼맨십의 대가답게 잠깐 분위기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더니, 정말 안타깝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이고. 그런데 이걸 어쩌죠, 서 팀장님. 안타깝지만 오늘은 그런 게 소용이 없을 텐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대리?”
은수의 질문에 이 대리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은 1팀 대 2팀이 아니라, 청팀 대 백팀이거든요. 저희가 임의로 두 팀을 섞어서 따로 팀 명단을 준비해 놨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대뜸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걸 확인한 각 팀에서는 곧바로 원성이 쏟아져 나왔다. 뻔히 마케팅 1팀, 2팀으로 나뉘어 있는 마당에 청팀, 백팀이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리는 아랑곳 않고 다 구겨진 A4용지 한 장을 얄밉게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가 언급한 ‘저희’란 필시, 이번 워크숍을 주도적으로 준비한 각 팀의 대리들을 말하는 것일 테다. 어쩐지, 일할 때보다 더 신이 나서 준비한다 했지. 은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물론 여러분들의 불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이렇게 단합 대회를 하는데, 각 팀으로 찢어져서 경쟁의식만 부추길 순 없잖습니까? 두 팀이 한데 섞여서, 팀의 자존심보다는 친목 도모를 위해! 그리고 엄청난 경품들을 위해! 힘을 모으자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주최 측의 농간에 불만을 표하려던 직원들은 그제야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 워크숍의 취지이자 명분인 ‘친목 도모’를 강조하는 그 말에 아무도 뭐라 대꾸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팀장님들을 붙여 놓는 건 말이 안 되겠죠? 일단 팀장님 두 분이 양쪽으로 서 주십쇼. 지금부터 양 팀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청팀. 서지훈 팀장님이 주장이시고요. 팀원은, 2팀 장성규 과장님, 1팀 강민희 씨, 2팀 한숙경 씨, 1팀 오태섭 씨…….”
이 대리가 호명한 직원들이 하나둘씩 지훈 쪽으로 우루루 몰려가 섰다. 청팀 명단을 다 호명하고 난 이 대리는 나머지 반쪽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팀. 똑같이 민은수 팀장님이 주장이시고요. 팀원은 1팀 박승연 과장님, 2팀 고재진 씨, 1팀 윤유라 씨, 2팀 김수현 대리…….”
그리고 청팀과 마찬가지로 백팀의 명단을 줄줄이 읊어 내려가던 그가 어느 대목에서 갑자기 현재를 찌릿 노려보더니, 매우 마지못해하며 마지막 이름을 호명했다.
“마지막으로 1팀, 도현재 씨입니다. 이상 두 팀의 모든 선수 명단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현재는 가장 앞에 서 있는 조장 은수를 향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는 결국 목표를 쟁취하고야 말았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 아까 그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그제야 은수는 버스에서 보았던 실랑이의 진실을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도 현재는 태섭 대신 청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뇌물을 먹여 트레이드를 시도했고, 결국 성공한 것이겠지. 그건 또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주려는, ‘아이 아빠’로서의 생각일 것이었다.
입술을 비죽인 그녀는 곧바로 그의 미소를 외면했다.
어차피 항상 같은 팀이었구만, 고작 체육 대회 같은 팀 되는 게 뭐라고.
“첫 번째 종목은 짝피구입니다. 다들 옛날에 해 보셔서 룰은 아시죠? 두 사람이 짝을 지어서 손을 잡아야 하고, 손을 놓치면 바로 탈락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만 탈락시킬 수 있고, 여자는 여자만 탈락시킬 수 있습니다. 보통 남자분들이 주로 던질 테니까, 공격을 하시면서 동시에 여자 파트너도 보호해야 합니다.”
아마도 현재는 그녀처럼 첫 경기가 짝피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저희 팀장님과 한 조 하겠습니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한 현재는 그 다음 목표 설정에도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
“아, 예……. 그러세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백팀 조원들은 조금 떨떠름해하기는 했지만 굳이 거기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어차피 팀이 이렇게 된 이상, 누구와 조를 하든 어색한 건 똑같다 생각했으므로.
사실 반기를 들고 싶은 건 은수였다.
‘자꾸 이렇게 티 내면 어떡하라는 거야, 나보고.’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서지훈에 도현재까지. 이래저래 힘든 상황에 직면한 은수는 딱 죽을 맛이었다.
그런 은수의 속도 모르고, 투쟁 끝에 얻어 낸 산물인 양 호기롭게 은수의 손을 꼭 잡은 현재는 조용히,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팀장님은 그냥 제 뒤에서 피해만 다니세요. 제가 다 막을게요.”
“……네…….”
“너무 안 뛰어다니게 조심하시고요. 혹시라도 힘들거나 하면 곧바로 말씀하세요. 아셨죠?”
“알았어요.”
안심하라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벌써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에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부터 왠지 자꾸만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아까 전 교육 프로그램 때문에 앞에 나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도, 그녀는 줄곧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는 영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차에 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꼭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게…….
현재가 붙들고 있는 손은 어쩔 수 없으니, 자유로운 왼쪽 손을 올려 훤히 드러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딱히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박 과장님 말대로 요즘 너무 안 먹은 게 문제인 걸까.
실은 그냥 기권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기에, 아프다는 핑계를 대기도 뭣해서 딱 한 경기만 할 심산이었다. 아무리 몸이 중하다 해도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빼는 건 좀 그랬다. 어차피 남들은 임신한 줄도 모르는 상황인데.
병원에서 이제 아기도 뱃속에 안전히 자리 잡았다는 말을 들은 터라, 격하게 무리한 운동만 아니면 괜찮을 듯싶었다. 게다가 그가 가드까지 쳐 준다고 하니 훨씬 낫겠지.
손을 맞잡은 현재와 은수는 그어진 선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지훈과 민희가 한 조가 되어 서 있었다.
‘아, 하필이면 붙어도 저 둘이 붙냐.’
그녀의 전 남친과 현재를 짝사랑하는 여자가 한 조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 같은 조 구성이란 말인가.
현재의 어깨에 숨어 잠시 그들을 마뜩찮게 바라보고 있던 은수는 별안간 제 오른쪽 손가락에 부드럽게 얽혀드는 단단한 손가락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랐다.
“…….”
“…….”
손을 꽉 잡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깍지까지 낀 그가 잠시 고개를 돌려 은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마치 자신만 믿으라는 것처럼.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른 은수는 얼른 그의 시선을 피했다. 맞잡은 손은 이미 경기 시작도 전에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경기, 시작!”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적은 편이 아니다 보니 칸은 꽤 비좁은 편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양쪽 모두 아주 쉽게 탈락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방금 유라 씨 맞았어요!”
“안 맞았어요!”
“심판님, 보셨습니까?”
MC 겸 깍두기이자 심판을 맡은 이 대리는 유라를 향해 단호하게 바깥을 가리켰다.
“유라 씨, 탈락이요.”
“……아이, 씨.”
여자가 공을 맞은 조는 두 사람 모두 탈락이기에 모두 신중하게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돋보이는 건 역시 지훈과 현재였다. 두 남자는 공이 근처에 오기만 하면 맞기는커녕 무조건 잡아내었고, 슛도 기가 막히게 날렸다.
덕분에 파트너인 민희와 은수는 그다지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공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현재는 은수에게 공이 갈라치면 재빠르게 몸을 날려 은수를 보호했다.
갓 굴러들어 온 신입 사원이 활약하는 모습에 팀원들은 신나서 꺅꺅 소리를 질러 댔다.
“야, 도현재 멋있다!”
“현재 씨 나이스!”
현재와 지훈, 두 남자 사이에 이유 모를 불꽃이 튀었다. 두 에이스의 활약 덕분에 경기가 꽤 장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경기가 흘러갈수록 양상은 더욱 팽팽해졌다.
다들 어느 팀이 이길지를 두고 긴장감 속에 경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사실 그중 가장 긴장을 하고 있는 건 은수였다.
살짝 늦은 오후여서 그런지 볕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데도, 은수는 이상하게 자꾸만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이건 경기 때문이 아니었다. 뭐랄까……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느낌. 무언가 꽉 막힌 듯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온통 어지러웠다.
“자, 드디어 끝을 향해 달려가네요. 과연 어느 팀이 승리할지!”
마침내 양쪽엔 두 조씩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1세트를 가지고 갈 수 있다는 희망에 양 팀의 응원도 불이 붙었다.
공을 던지랴, 은수를 보호하랴, 한창 막바지인 경기에 열중하고 있던 현재는 어디선가 조그맣게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듯한 느낌에 뒤에 있는 은수를 힐끗 돌아보았다.
“…….”
그런데, 잠깐 돌아본 은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것도 모자라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란 현재는 경기 중이던 것도 잊고 은수에게로 완전히 돌아섰다.
“티, 팀장님, 무슨 땀이 이렇게…….”
현재가 은수를 돌아보며 방심한 그 순간이었다.
지훈의 뒤에 서 있던 민희가 쏜살같이 앞으로 나와 튕겨진 공을 잡아채는 것이 은수의 시야에 박혀들었다. 그리고 그 공은, 곧 현재와 은수 쪽을 향해 빠르게 슛이 되어 날아왔다.
당연히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순식간에 눈앞이 노래지고 있었다.
그토록 빠른 순간인데도 공의 움직임이 마치 슬로 모션을 걸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곤두박질쳤다.
은수는 곧, 자신이 꼼짝 없이 저 공에 맞게 될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퍽!
결국 은수는 예상했던 것처럼 왼쪽 팔을 세게 얻어맞았다. 탈락이었다.
하지만 배나 머리 같은 곳을 맞은 건 아니니 괜찮았다. 별로 아프지도 않고,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다. 이제 얼른 나가서 쉬엄쉬엄 수비나 해야지.
정말이지 은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팀장님? 팀장님! 괜찮으세요?”
“……현재 씨, 나…….”
왜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리질 않는 것일까.
대답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미 기력을 잃어버린 몸은 중력에 의해 땅바닥으로 스러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현재가 서둘러 받치려 했지만, 그조차도 미처 역부족이었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묵직한 타격감과 함께, 살짝 서늘한 흙의 느낌이 그녀의 옆구리와 등 쪽으로 퍼졌다. 지저분하게 일어난 먼지와 흙이 뒤섞여 얼굴 위로 훅 끼쳐 왔다.
무슨 일인지 판단할 정신은 애초에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곧이어 경악의 소음과 고함 소리 같은 것이 아득하게 귓전을 때렸다.
“티, 팀장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예? 팀장님!”
게슴츠레하게 뜬 그녀의 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오직, 화들짝 놀란 눈으로 저를 흔드는, 땀에 젖은 그의 얼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