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 굴러들어 온 돌 vs 박혔다 빠진 돌 (1)
“부탁 좀 드릴게요, 예?”
“아니, 글쎄. 다 정해 놓은 거라서 못 바꾼다니까.”
어딘가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소음 탓에, 은수는 겨우 들었던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소음의 근원지는 바로 건너편이었다.
도대체 뭣 땜에 아까부터 저렇게 실랑이지?
현재와 이 대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은수는 조용히 생각했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저렇게까지 해 가며 부탁할 게 대체 뭘까.
“거, 참 디게 시끄럽네. 얘기 끝났으면 빨리 가 봐요, 현재 씨. 정신 사나워.”
“예. 죄송합니다, 과장님.”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현재가 건네는 무언가를 주머니에 받아 챙기는 이 대리를 보며, 은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뇌물까지 먹여 가며 원하는 바를 얻어 낸 듯한 현재는 밝은 얼굴을 한 채 제자리로 돌아갔고, 박 과장은 옆에서 뭘 하거나 말거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팀장님, 계란 드실래요?”
“웬 계란이에요?”
“급하게 나오느라고 아침을 못 먹고 나와서, 어제 삶아 놓은 것 좀 가져왔거든. 하나 드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비닐봉지에 싸여 있던 계란을 야무지게 까서 건네는 박 과장의 손길을, 은수는 정중히 사양했다. 가뜩이나 입덧 때문에 난리도 아닌 판에, 화장실도 없는 버스 안에서 일을 치를 순 없었으므로.
할 수 없다는 듯, 은수에게 내밀었던 계란을 가져와 베어 먹는 박 과장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진짜 요즘 너무 안 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안 먹어서 어떻게 살아.”
“괜찮아요. 이 정도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아무리 그래도……. 혹시 아픈 거 말고,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요즘 들어 얼굴도 부쩍 어두운 거 같애.”
사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어지러운 증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먹는 게 별로 없어서겠지. 거기다 오늘은 버스를 타는 바람에 멀미까지 하고 있으니.
그래도 현재가 준 모닝 밴드인가 뭔가 하는 물건 덕인지, 입덧은 많이 완화되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의 손목에서는 주기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이 입덧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힘들어도 버티는 수밖에. 친언니 같은 박 과장이 혹여 심하게 마음을 쓸까, 은수는 부러 밝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가끔씩 입맛이 없을 때가 있더라구요.”
“흐음. 하긴, 나도 처녀 시절엔 가끔 그랬던 거 같애. 근데,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니까, 식욕이 막 주체 못 할 정도로 늘드라구요. 나한테도 한때는 팀장님 같은 몸매를 유지하던 시절이 있었지.”
“과장님 지금도 몸매 좋으신데요, 뭘.”
“옛날에는 이거랑 비교도 안 됐다니까. 그땐 진짜, 웬만한 연예인 몸매 후려칠 정도였는데.”
박 과장의 너스레에 은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과장님도…….”
“진짜라니까! 어쨌든. 그나저나 팀장님은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요?”
“만나는…… 사람이요?”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텐데, 저기 뒤에 있을 지훈이 생각나 괜히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런 은수를 눈치채지 못한 박 과장은 계란 하나를 더 까며 덧붙였다.
“팀장님도 이제 혼기 꽉 차셨는데 조만간 시집가야죠. 그러고 보니까 남자 친구 얘긴 들어 본 적이 없네.”
“남자 친구…… 없어요. 연애 같은 거 안 해요.”
계란 반쪽을 입 안에 쏙 집어넣은 박 과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그 좋은 나이에 연애도 안 하고 뭐 해요. 왜, 눈에 차는 사람이 없어서? 그럼 내가 소개 좀 시켜 줄까요?”
이거, 갈수록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네.
난처한 얼굴이 된 은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저는…… 사실 결혼 생각이 없어요.”
“결혼 생각이 없어요? 아니, 왜?”
물론 박 과장 정도라면 얘기를 해도 되는 상대겠지만, 이렇게 워크숍 가는 버스 안에서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웃긴 일이다. 그래서 은수는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그녀가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음을 대충 간파한 박 과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남은 계란을 야금야금 베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
“뭐…… 하기야 팀장님은 능력 있고 돈 잘 벌겠다, 괜히 그런 구렁텅이에 들어갈 필요 없긴 하겠다. 요즘은 그런 게 흠도 아니고.”
‘구렁텅이’라는 표현이 우스워 은수는 픽 웃었다. 혹시 박 과장님도 결혼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박 과장님은, 결혼 생활 어떠세요?”
뜻밖의 질문에 잠시 멈칫한 박 과장은 이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남들이랑 똑같죠. 결혼이 별건가. 근데 원래 결혼은, 당사자 둘보다 주변 사람들이 중요한 법이거든. 특히, 시댁 식구들.”
“…….”
“그래도 나는 시댁이 좋아서 좀 편해요. 시누이도 착하고, 시어머니는 애 다 봐주시고. 요즘 애 키우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나도 원래 하나만 낳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둘째까지 낳았지. 아예 안 생겼음 모르지만, 생긴 걸 뭐 어떡해. 지울 수도 없고.”
“……그쵸.”
제 뱃속에 얼떨결에 ‘생겨 버린’ 생명 하나를 담고 있는 은수로서는 너무나 공감되는 말이었다.
어느새 박 과장은 계란 두 개를 다 끝내고 손을 탈탈 턴 뒤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 부분은 잘 생각해 봐야 돼요. 지금은 혼자 살아도 괜찮지만,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괜찮을지 어떻게 알아. 남편이고 자식이고 주변에 아무도 없고, 막상 혼자서 쭈그렁 방탱이 되면 그때 가서 후회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요.”
박 과장은 페트병을 손에 쥔 채 계속해서 성토하듯 말을 이었다.
“나이 들수록 친구고 가족이고 다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남는 건 나 혼자거든. 그때 남는 유일한 친구가 남편이라고 할 수 있죠. 뭐, 경우에 따라 강아지나 고양이일 수도 있지만.”
“…….”
“결혼하는 거야 팀장님 자유니까 알아서 하시는 건데. 난 그냥 팀장님이 아까워서 그러지.”
“제가요?”
“이 정도 외모에, 그 정도 능력이면 선 자리가 줄줄이 들어올 텐데. 적당히 괜찮은 사람 있으면 골라잡아요, 그냥. 청춘이 아깝잖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꼭 이런 식으로 그녀를 과대평가하곤 했다.
제 일처럼 아쉬워하는 박 과장의 마음을 알기에 기분 좋게 웃은 은수는 고개를 슬슬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저 인기 없어요.”
“에게. 그럼 그, 홍보팀 한 팀장이랑, 또 누구야…… 또……. 아이, 하도 많아서 누군지 기억도 안 나네. 하여튼, 팀장님 죽자 사자 쫓아다닌 사람들 있었잖아. 그 많은 사람들은 다 뭐예요.”
“……그건, 뭐…….”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입사 초기부터 몇 년 동안은 은수도 사내에서 꽤 인기가 많은 여직원 중 하나였다.
어린 나이에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예쁘장했던 20대의 은수는 꽤 많은 남직원들이 흠모한 대상이었다. 물론 지훈도 그렇게 은수를 좋아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문득 옛 생각을 떠올린 은수가 피식 웃었다.
“다 옛날 얘기죠. 지금은 안 그래요.”
“에이, 또 누가 알아요. 누가 남몰래 팀장님 좋아하고 있을지.”
비밀이라도 얘기하려는 듯, 박 과장이 은수의 귓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솔직히 우리 팀만 해도, 도현재 씨 봐요.”
“……네?”
예상치 못한 구석을 찔린 은수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여기서 저 남자 얘기가 왜 튀어나오는 거지?
“지난번에 약 사 올 때도 그렇고, 현재 씨 분명히 팀장님한테 맘 있어요. 좋아하니까 그러는 거지.”
“……에이, 아니에요.”
“아니긴. 봐요,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민희 씨가 그렇게 줄곧 들이대는데도 둘이 진전이 전혀 안 되잖아. 현재 씨가 팀장님한테 맘 있어서 그런 거라니까.”
역시나. 박 과장같이 눈치 빠른 몇몇은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이미 간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정말 일이 우습게 될 수도 있다.
은수는 놀란 맘을 애써 부여잡고,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같은 팀 팀장이니까, 잘 보여서 나쁠 거 없으니까 그러는 거겠죠.”
은수의 항변에도 박 과장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 쓰읍 입맛을 다셨다.
“아닌 것 같은데…….”
“과장님, 현재 씨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려요. 제발 말이 되는 소릴 좀 하세요.”
그 말에 박 과장은 한순간에 어이없는 얼굴이 되더니, 은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다섯 살이 어디가 어때서?”
“……네?”
게다가 그 나이 먹고 그것도 모르냐는 듯 혀를 끌끌 차기까지.
“남자 나이,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거 아닌 이상 다 거기서 거기예요. 남자는 평생 애라는 말도 못 들어 보셨나.”
“…….”
“어차피 데리고 살아야 되는 거, 늙은 애보다는 진짜 애가 낫지. 안 그래요?”
“…….”
……아휴, 참. 말을 말자.
은수는 묘하게 논리 정연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박 과장의 말에 대꾸도 못 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의심을 받게 된 이상, 확실히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기회가 닿을 때, 그에게 튀는 짓은 각별히 자제하라고 일러두어야 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오늘 워크숍 가서 뭐 한대요? 교육 끝나고요.”
“어, 팀장님 프로그램 짠 거 못 보셨어요? 이 대리가 어제 보여 줬었던 것 같은데. 뭐 한다더라.”
기억을 더듬은 박 과장이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체육 대회요. 짝피구 한다던가?”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은수의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짝피구요?”
* * *
“자, 지금부터! 라프레즈 마케팅팀 춘계 단합 대회 겸 체육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
아무래도 지겨운 교육 프로그램을 막 끝마친 때라 그런지, 다들 놀 생각에 신이 난 듯했다.
오늘의 사회자는 마케팅 1, 2팀을 통틀어 가장 끼가 있는 이 대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모를 빨간 확성기로 인해 공터를 쩌렁쩌렁 울렸다.
“오늘 종목이 꽤 여러 개니까, 다들 지금부터 체력 안배하시고요. 각 종목에서 우승하신 팀에게는 다양하고 푸짐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다는 거, 모두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전문 행사 MC처럼 노련한 이 대리의 진행에 서른 명 남짓 되는 직원들 모두가 열광했다. 익살스럽게 얼굴 옆으로 V를 그린 이 대리가 웃음기를 거두고는 계속해서 진행을 이어 갔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체육 대회를 진행하기에 앞서, 오늘 두 마케팅팀이 한자리에 모인만큼, 두 팀의 팀장님들을 앞으로 모셔서 한 말씀 들어 보겠습니다!”
“……에?”
무슨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그 소리가 나오자마자 은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 대리의 등쌀에, 결국 은수는 지훈과 대칭되어 그의 옆으로 나란히 서야만 했다.
“아무래도 1팀과 2팀이 함께 있으니까, 1팀 팀장님부터 말씀하시는 게 좋겠죠? 그럼, 먼저 이쪽부터. 민은수 팀장님의 한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몇십 개나 되는 눈들이 한꺼번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덕분에 은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지금껏 1팀 팀원들에게 해 왔듯 이내 의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이렇게 두 팀이 함께 처음으로 이런 자리를 갖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참 기쁘구요. 간만에 일에서 벗어났다고 고삐 풀고 신나게 노는 것도 좋지만, 이런 시간일수록 누구 하나 다치지 않게, 서로 배려해 가면서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2팀 서지훈 팀장님. 한 말씀 하시죠.”
은수 쪽을 슬쩍 본 지훈도 이내 팀장다운 무게감을 실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1팀과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되어서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민 팀장님 말씀처럼 다치지 않게 다들 조심하셨으면 좋겠고요.”
눈빛으로 직원 전체를 아우르며 말하던 그가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1팀 쪽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만, 지금껏 저희 2팀이 숫자 하나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사내에서 살짝 기가 눌려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프로젝트 발표회가 아니라 체육 대회이지 않습니까. 저희 팀원들이 1팀보다 확실히 우세하다는 걸, 좀 보여 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