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 (2)
“어…….”
그곳엔 텀블러나 음료 컵 대신, 앙증맞고 귀여운 아기 신발 두 쌍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파랑색 하나, 분홍색 하나. 일전에 이미 한 번 봤던 그것이었다. 아까부터 내내 차에 타 있었으면서 이걸 어떻게 이제야 알았을까.
은수는 분홍색 신발을 냉큼 손바닥 위에 올려 보았다. 어찌나 조그만지 무게도 깃털 같다.
이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리며 은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조금, 아주 조금 더 알게 된 그는 예상외로 팔불출기가 상당한 사람이었다.
지난 주, 그녀의 폭탄선언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늦은 시간, 모두가 다 퇴근하고 은수 홀로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간 줄 알았던 현재가 무언가를 한 아름 들고 오더니 별안간 그녀의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뭐예요?”
“한번 봐요.”
그가 은수에게 보라는 양 고갯짓을 했다. 왜 저러지? 박스를 열어 본 은수는 깜짝 놀랐다.
“허어, 이게 다 뭐야……?”
거기엔 임신 관련 용품들과 아기 용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은수가 박스를 보고 놀라고 있는 사이, 뒷전에 서 있던 현재는 얼른 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내 은수에게 내밀었다.
“이거요.”
“이게 뭐예요?”
“모닝 밴드라고 하는 건데, 손목에 차고 있으면 진동을 줘서 입덧을 좀 덜하게 해 준대요.”
“……그런 것도 있어요?”
대체 무슨 원리지?
현재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으며 은수는 ‘세상 많이 좋아졌네…….’ 하고 늙은이 같은 소리를 했다. 역시 문명의 발전이란 좋은 것이었다.
은수의 반응에 픽 웃은 현재가 이제는 아예 주도적으로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엽산제예요. 원래 임신 전부터 먹어 줘야 좋다는데, 알았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먹고. 또…… 이건 칼슘, 그리고 이건 튼 살 크림이에요. 그 옆에 있는 건 코코넛 오일인데 이것도 튼 살에 좋다는 얘기가 있어서 같이 샀어요.”
“이, 이걸 다, 어떻게……?”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이야. 놀라워하는 은수의 표정에 현재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혀로 입술을 훔쳐 냈다.
“인터넷이요. 모르는 게 많아서 검색 좀 했어요.”
“아……. 고마워요.”
“은수 씨가 고생하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요. 이거 다 사려면 돈 깨나 들었겠는데.”
“돈이야 벌면 되죠. 신경 쓰지 마요. 다 필요한 것들이라고 해서 샀으니까.”
“……근데 이건, 당장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은수가 보란 듯 아기 신발과 아기 옷을 들어 보였다. 현재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건 그냥 귀여워서. 나중에 사려고 했는데, 자꾸 눈에 밟혀서요.”
“근데, 이거 다 내가 가지고 가라고요?”
“너무 많은가. 몇 개만 가져가고 나머진 나중에 줄까요?”
“아니에요. 어차피 차에 싣고 가니까 상관없어요. 그냥…… 양이 엄청나다 싶어서.”
그러면서 은수는 신발 여러 개 중 하나를 집어 현재에게 내밀었다. 예쁜 분홍색.
“눈에 밟혔다면서요. 하나는 가지고 있어요.”
“아, 사실은 한 개 더 샀어요, 파랑색. 차에 놔뒀는데.”
“음, 이건 분홍색이니까 짝 맞춰서 둬요. 어차피 딸인지 아들인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그럴까요?”
분홍색의 아기 신발을 받아 든 현재는 잠시 머뭇거리다 재킷 주머니에 그것을 쏙 넣었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없어요.”
“정말요?”
“네.”
“이상하네. TV에선 임신하면 다들 뭐 먹고 싶다고 난리던데.”
눈을 땡그랗게 뜨고 물어 오는 남자가 우스웠다. 먹고 싶은 게 없긴 왜 없어. 사실 무지 많았다.
지난밤만 해도 그랬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양념 치킨이 먹고 싶었다. 그 좔좔 흐르는 윤기와, 매콤달콤하고 바삭한 맛. 옛날에 먹던 그 맛이 그리워 한 마리 시켰었는데, 또 구역질이 나는 바람에 얼마 먹지 못하고 방치해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한마디라도 했다간, 뭐가 됐든지 공수해 오겠다고 옆에 붙어서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그건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차라리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내가 알아서 사 먹고 말지.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 선물도 줬으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요.”
그렇게 은수는 크리스마스 날 산타처럼 박스를 품 안 가득 안았다. 그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현재가 주차장까지 박스를 들어다 주었음은 물론이다.
아빠로서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겠다더니, 그는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순수한 아빠로서의 애정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닐 것이었다.
“…….”
은수는 한순간에 입 안이 씁쓸해졌다. 이렇게 속없이 고마워하고 좋아할 때가 아닌데.
똑똑.
“은수 씨, 안 가요?”
도통 나오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여긴 현재가 창문을 두드렸다.
“네, 가요!”
파랑색 신발 옆에 핑크색 신발을 다시 가지런히 놓아두고 한숨을 쉰 은수가 어두운 표정으로 차문을 열었다.
* * *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어느덧 물러가고, 이제는 거의 초봄 날씨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만하면 놀러 가기에 딱 괜찮은 날씨였다.
그러나 막상 늘 입던 정장을 벗어 던지고 평상복을 입은 은수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일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워크숍은 무슨.’
왜냐하면 오늘은 분기별로 한 번씩 돌아오는 부서 워크숍 날이었으므로.
사실 은수도 워크숍 같은 사내 행사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름 활동적인 걸 선호하는 편인 터라 지겨운 사무실로부터 하루 이틀쯤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좋아했었는데.
“팀장님, 안 타세요?”
버스 앞에서 머뭇거리던 은수를 뒤에서 따라오던 유라가 깨웠다.
“아, 네. 먼저 타요, 유라 씨.”
상큼하게 웃어 보인 유라가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들어가지 못한 채 버스 앞을 서성였다.
더 이상 홀몸이 아니게 된 지금, 과격한 운동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러한 행사가 반가울 리 없었지만, 사실 은수가 워크숍에 가기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안 타십니까?”
다소 낮고 굵은 목소리.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아이, 씨. 먼저 타 있는 줄 알았는데. 하여튼 운도 지지리 없어.
은수는 곧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찌푸렸던 표정을 풀고는 지훈을 향해 돌아보았다.
“아, 네. 먼저 타세요, 서 팀장님.”
도대체 왜, 부서 워크숍을 1팀이랑 2팀이 통합해서 가라는 거야? 엄연히 다른 부서인데.
자신을 힐끗 보고는 먼저 버스에 올라타는 지훈을 보며 그녀가 속으로 푸념했다.
원래라면 따로 가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지난주 간부 회의가 발단이었다.
요사이 바쁜 회사 사정을 감안해 최대한 일정을 쪼개 다녀오되, 마케팅팀의 전체 사기도 진작시킬 겸 두 부서가 워크숍을 함께 다녀오라는 말도 안 되는 명이 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사정을 모르는 팀원들은 사람이 많으면 더 재밌고 좋지 않겠느냐며 다들 찬성을 해 버렸고.
어쩌겠는가. 다른 데는 강해도 팀원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팀장인 것을. 별수 없이 그녀도 오케이를 했다.
결국 불편해진 건 은수뿐이었다. 최대한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그를 피해 볼 심산이었는데. 벌써부터 한 번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이 짓을 하루 종일 해야 한다니. 드넓게 펼쳐진 고생길이 그녀의 눈앞에 선연해지기 시작했다.
아, 짜증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그녀는 머리끈을 꺼내 손목에 걸치고,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다. 임신을 한 뒤로 부쩍 머리가 많이 빠지는 요즘이었다. 숱이 너무 많은 것이 콤플렉스였건만, 그것이 지금은 얼마나 다행인지.
“팀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어, 현재 씨.”
이 대리, 태섭과 함께 버스에 실을 커다란 박스를 들고 오던 현재가 은수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짜증이 나 있던 은수가 저도 모르게 살짝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의 눈길은 그녀의 손목에 걸린 검정색 머리끈에 가 있었다.
“머리, 묶으시게요?”
일을 할 때는 보통 생머리 상태로 다니는 그녀였기에, 머리를 묶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그 앞에서 묶은 머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네. 많이 움직여야 될 텐데, 거치적거리잖아요.”
“아…….”
이해했다는 듯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머리끈에 머물러 있던 그의 눈길이, 솜털이 돋아난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슬쩍 향했다.
……왜 저렇게 보지. 뭐 묻었나?
“…….”
마침내 머리를 다 묶은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자 헛기침을 살짝 한 그는 금세 은수의 얼굴에 시선을 두며 버스를 향해 손짓했다.
“얼른 타세요, 추운데.”
“네. 박 과장님은요?”
“자제분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연락 왔는데, 곧 도착하신답니다.”
“아…… 알았어요.”
그래, 뭐. 어차피 가야 하는 거니까 부딪치는 수밖에. 묶은 머리를 양쪽으로 질끈 당기면서 마음을 굳건히 다진 은수가 마침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은 간만의 나들이라고 들뜬 직원들로 인해 이미 시끌시끌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그녀는 좌석을 빠르게 스캔했다. 다행히 지훈은 멀리 뒷좌석 쪽에 자기 팀원들과 함께 있는 듯했다.
“……후우.”
나지막이 숨을 한 번 내쉰 그녀가 비어 있는 오른쪽 맨 앞좌석으로 재빨리 몸을 우겨 넣었다. 됐어. 이 상태로 쥐 죽은 듯이 갈 심산이었다.
‘어차피 분위기는 이 대리 같은 사람들 몇몇이 주도할 테니, 내가 뭘 하고 있건 상관없겠지. 여차하면 아프단 핑계를 대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무심코 홀드를 풀어 카톡을 확인했다. 두 개가 연달아 와 있었다.
[머리 묶으니까 더 예쁘네요.] 도현재
[물론 뭘 하든 예쁘지만] 도현재
……뭐야, 이건?
“이제 됐으니까 두 사람도 얼른 타.”
“네.”
버스 안으로 들어오던 현재의 눈빛이 카톡을 막 확인한 은수의 눈빛과 마주쳤다.
“…….”
얼굴을 보자 그의 메시지가 자동으로 음성 지원 되면서, 한순간에 은수의 뺨과 귓불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러나 불을 지른 장본인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맨 앞자리 안 불편하시겠어요, 팀장님?”
“네? 어…… 멀미가, 좀 있어서…….”
“그래요? 약을 드릴 수도 없고, 어떡하지.”
“괘, 괜찮아요. 여기 있으면 돼요.”
“현재 씨 진짜, 팀장님 무지하게 챙기네. 나한테 좀 그렇게 해 보지, 응?”
“챙기긴요.”
뒤따라 들어오던 이 대리가 지나가듯 농담을 던졌지만, 은수는 어쩐지 농담처럼만은 들리지 않는 기분에 어색하게 웃었다.
저 남자는 빨리 지나가기나 하지, 다 티 나게 뭐 하는 거야?
“아이구,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녀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지각한 박 과장이 부리나케 버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은수의 왼쪽에 박 과장이 자리 잡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혹시라도 다른 데 불편하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네. 고마워요.”
말을 마친 그가 그제야 유유자적 뒷좌석 쪽으로 걸어갔다. 그에 맞춰 은수의 고개도 스르르 돌아갔다. 그는 중간쯤에서 태섭과 함께 앉는 듯 보였다.
그 바로 건너편에는 설계해 놓은 것처럼 민희와 유라가 앉아 있었다. 통로 측에 자리한 민희가 은근슬쩍 자리를 바꿔 달라며 바로 옆의 태섭을 찔러 대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저래 봤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구만.
“……되게 열심이네.”
“네? 뭐라고 하셨어요, 팀장님?”
“예? ……아, 아니에요.”
박 과장의 물음에 흠칫 놀라 도리질을 한 은수는 누가 볼세라 뒤집은 채로 손에 꼭 쥐고 있던 휴대폰을 살며시 다시 들었다.
액정에는 여전히 그가 보낸 짧은 카톡이 떠 있었다.
……예쁘다고?
저도 모르게 올린 손이 포니테일로 잘 묶인 통통한 머리를 빗어 내렸다.
‘이런 얘기를 마지막으로 들은 적이 언제였지?’
지훈에게선 이런 사소한 칭찬조차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맘에 없는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그랬는지도. 머리만 해도 풀면 푸는 거고 묶으면 묶는 거고, 그게 그거다 식이어서 신경도 안 쓰였는데.
그 상태로 눈을 깜빡거리던 은수는 이내 제 손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날씨 때문인지, 워크숍 때문인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