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 (1)
혹여 제가 주었던 소화제를 먹었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물음에 은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감기나 체한 건 줄 알고 약을 먹을 뻔했는데, 다행히 그때 병원에 가서 안 먹었어요.”
그녀의 대답에 현재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이제부터는 뭘 먹기 전에 꼭 한 번 생각하고 먹어요. 이게 아기한테 좋을지, 나쁠지. 나도 도와줄 테니까.”
화가 잔뜩 나 있었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 그는 또 한없이 유한 얼굴이었다.
아마 내가 한 걸음 물러서 주었기 때문이겠지. 현재를 옆에서 바라보던 은수가 그를 불렀다.
“현재 씨.”
“네?”
“현재 씨는…… 무섭지 않아요?”
“어떤 게요.”
“아빠가 된다는 거요.”
계속 보아 봐야 달라질 것 없는 초음파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은수를 보았다.
“현재 씨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또…….”
“스물일곱이 어려요?”
“나에 비하면 어린 거죠.”
“고작 다섯 살 차이예요.”
“그게 적어요?”
“많지도 않죠.”
“그래도 어려요.”
“은수 씨.”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른 그가 짐짓 인상을 썼다.
팀장님 소리는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이제 대놓고 이름을 부르는 그가 당황스러웠지만, 방금 전 그 말엔 왠지 모를 힘이 느껴져 은수는 계속해서 대꾸하던 입술을 다물었다.
“우리나라에선 군대까지 다녀온 남자를 어리다고 하지 않아요.”
그, 그건…… 맞는 말이지만.
정곡을 찔린 나머지 대답을 못하는 그녀를 보던 현재가 픽 웃었다.
“음.”
남자는 잠시 고개를 들어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생각보다 더 빨리 이런 일이 다가와서 좀, 놀라기는 했어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무섭다기보다는…….”
“…….”
“기쁘네요, 행복하고.”
초음파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눈빛에선 이제 꿀마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은수를 똑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말했듯이, 제가 아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다음에 날 닮은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종종 하곤 했는데.”
“…….”
“그 아기를 가진 사람이 은수 씨여서, 솔직히 좀 좋네요.”
“…….”
“사실은 좀 많이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 눈길과,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은수는 잠시 민망해져서, 얼른 둘러댈 말을 생각해 내었다.
“아기는 유전자가 중요하니까요.”
“…….”
“반쪽은 날 닮으면 당연히 예쁠 테니까, 그러니까…… 현재 씨한테는 이득이죠. 나 같은 얼굴이 어디 흔한가.”
뾰로통한 그 말에 현재는 비싯 웃었다.
“네. 예쁠 거예요, 엄청.”
은수 씨를 닮으면 눈도 쌍꺼풀 져서 동그랗고, 코도 오뚝하고, 입술도 앙증맞겠다.
남자는 이목구비라곤 하나도 안 보이는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아기의 얼굴을 그려 보는 듯했다.
은수는 왠지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좀 의외였다. 그가 이렇게 임신 소식에 기뻐할 줄은.
“입술은…… 현재 씨 닮으면 좋겠어요.”
“입술요? 왜요?”
“웃을 때 예쁘잖아요. 옆에 동굴도 패이고.”
남자의 외모는 다른 곳도 준수한 편이었지만, 특히 입술이 예뻤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그가 환하게 웃을 때면 웃는 거 하나는 참 예쁘네,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말에 남자는 예의 그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날 닮았으면 하는 부위가 하나는 있어서.”
“…….”
“앞으로 하나씩 늘려 갈 거예요. 다음 주는 눈, 다다음주는 코, 이런 식으로.”
현재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은수의 눈을 응시했다.
“아기, 포기하지 않아 줘서, 그리고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워요.”
“…….”
“진심이에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선 은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
그 순간, 평온했던 은수의 심장이 잠시 덜컹였다.
……어차피 당신을 위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는데, 새삼스럽게 고마워하긴.
저도 모르게 깨문 입술이 아파 왔지만, 그녀는 화답하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내린 이 결정을, 나는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 * *
머리를 드라이하고 화장품을 얼굴에 찍어 바르는 손길이 분주했다.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는 늦게 일어나 마음이 조급한 터였다.
임신을 한 이후 은수는 잠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올빼미 생활을 했던 그녀가 일부러 일찍 자는 습관을 들이고, 혹시나 일어나지 못할까 싶어 알람을 5~10분 간격으로 여러 개 맞춰 놓고 잠에 들게 된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간신히 평소처럼 출근할 수는 있었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겨 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스러웠다. 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운전 중에 졸음이라도 오면 큰일인데, 어디 뾰족한 수가 있어야지. 내가 재벌 딸이라도 됐으면 개인 기사를 붙이는 건데.
구두에 발을 겨우 끼워 넣던 은수가 괜히 구시렁거렸다.
“어?”
그런데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온 은수의 눈앞에, 누구의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하얀색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는 마치 의도한 것처럼 건물 앞을 대놓고 가로막고 있었다. 어느 차도 주차장에서 나올 수 없게끔.
아니, 바쁜 아침 시간에 이래 놓으면 차를 어떻게 빼라고. 누군지 몰라도 완전 똥 매너네.
그렇잖아도 늦어서 예민한 상태에 그 꼴을 보니 아침부터 짜증이 확 끓어올랐다.
아, 이젠 이렇게 욱하면 안 되는데.
자칫하다 태교에 지장이 생길까, 도를 닦는 기분으로 애써 맘을 가라앉힌 은수는 차주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섰다. 분명히 사람이 안에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아침 햇살이 반사되는 창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주먹 쥔 그녀의 손이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저기요.”
대충 남자이겠거니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은수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차창이 스르륵 내려갔다.
“어, 은수 씨.”
그녀를 보자마자 올라가는 입꼬리가 쓸데없이 해맑았다.
“생각보다 늦었네요?”
활짝 웃고 있는 남자는, 뜻밖에도 도현재였다.
* * *
“어떻게 된 거예요? 이렇게 갑자기…….”
“위험하잖아요, 임신한 사람이 운전하면.”
“……나 이래봬도 7년 무사곤데.”
“은수 씨야 잘하겠죠. 근데 애먼 놈이 갖다 박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렇긴 하지만…….
말 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은수였지만, 현재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방금 전처럼.
은수를 힐끔 보며 미소를 지은 현재는 사이드 미러를 주시하면서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요 며칠 봤는데, 운전하기 좀 힘들 것 같아서요. 앞으로는 아침저녁 같이 출퇴근해요.”
“네? 아, 아녜요. 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집도 가까워서 괜찮아요. 조금만 일찍 나오면 돼요.”
“아니, 그래도. 혹시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정 그럼 근처에서 내려 주면 되죠. 조금만 걸으면 되잖아요.”
“…….”
“그게 좋지 않겠어요, 우리 아기한테?”
현재의 태도는 확고했다. 어쩐지 남자의 뜻대로 말려들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에 은수는 괜히 창밖을 보는 척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지금 이 남자는, ‘날’ 위한 게 아니라 ‘아기’를 위한 거라고 하면 내가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 거야. 분명히.
은수는 저만큼이나 똑똑한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현재의 나이는 분명 그녀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하는 행동만 보면 오히려 다섯 살 많은 오빠 같을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굳이 집 앞까지 찾아와 그녀를 픽업해서 회사까지 데리고 가는 배려, 운전이 힘들 거란 생각에 기사를 자청하는 세심함, 거기다가 그녀의 거절을 전면 봉쇄해 버리는 고단수적인 면모까지.
그 외에도 남자는 스물일곱이라고 하기엔 과하게 어른스러운 면들이 많았다. 단정한 얼굴이며 훤칠한 키, 중저음의 목소리 같은 요소들이 그런 면을 더욱 부각시키는 건지도.
어쩐지 출근할 때마다 슬쩍슬쩍 보는 듯하더니, 남 몰래 날 관찰한 모양이네.
덕분에 편한 출근길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그가 너무 신경이 쓰였다. 평소 그에게서 나던, 차 안에까지 배어 있는 머스크 향이 자꾸만 코를 찌르는 것도.
“…….”
“…….”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뚝 끊겼다. 그래도 차를 얻어 타는 이상 뭐라고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그러려 해도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다.
평소에는 운전에 거슬려 잘 듣지 않는 아침 라디오 소리가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그나마 소리를 메워 주는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고통의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그들은 어느새 회사에 도착했고, 그는 꽤 뛰어난 실력으로 주차까지 끝마쳤다. 시동을 끄고 사이드 브레이크 레버를 당긴 그에게 은수가 넌지시 물었다.
“근데, 현재 씨 원래 운전했었어요? 차는 익숙한 것 같긴 한데.”
“가끔요. 일부러 안 가지고 다녔어요. 근데 이젠 자주 타고 다닐 일이 생겼으니까.”
“……아.”
“오늘 끝나고 데려다줄 테니까 먼저 가지 마요.”
“근데…… 진짜 매일 이러려구요?”
“웬만하면. 싫어요?”
“아니 뭐, 싫기보다는…… 매일은 현재 씨도 좀 힘들 거 같고, 나도 신세 지는 것 같아서 불편하고 그러니까…….”
“…….”
전에는 몰랐는데, 은근히 표정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여자였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더듬거리며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은수를 현재가 잘라 냈다.
“알았어요. 매일은 말고, 일주일에 몇 번씩. 그 정도는 어때요?”
“……글쎄요.”
“아니면 한 달에 몇 번이어도 되고. 은수 씨가 편한 대로 해요. 난 다 괜찮으니까.”
“…….”
이쯤 되면 완곡한 거절이라는 걸 이 남자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웃는 낯의 그에게 차마 싫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정성인데. 아빠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사람을 무작정 거부하기도 그렇고.
“이제 가요.”
그녀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알아들은 그가 먼저 차를 나섰다.
그러나 은수는 내리기 전, 아직 훈훈한 기가 감도는 차 안을 잠시 둘러보았다.
별다른 소품이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쿠션이나 방향제 같은 거라도. 차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게 왠지 주인을 닮은 듯했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기웃대던 시선이 좌석 사이 공간에 닿자마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