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14. 당신이 애 아빠인 것 같아요 (2)
“팀장님, 아까부터 말씀드렸듯이 저도 그건 당연히 동의하는 바인데요.”
“…….”
“그러려면 제가 당연히 책임을 져야죠.”
그 말을 한 뒤부터 현재는 쉼 없이 은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삼계탕 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와서까지 현재는 진지한 어조,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녀가 애매하게 말한 탓도 있었지만, 남자는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은수는 길을 가다 말고 현재를 휙 쳐다보았다.
“아뇨. 그거랑 그건 다른 문제예요.”
“어째서요?”
현재의 짙은 눈썹이 불만스럽게 올라갔다. 은수는 일부러 한 템포 쉬고 대답했다.
“난 이 아일 혼자 키울 거니까요.”
순간, 그의 얼굴에 곧바로 얼빠진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예?”
“그럼, 내가 이 아일 현재 씨랑 같이 키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래요? 어떻게 같이 키울 건데요?”
“…….”
“뭐, 결혼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결단을 내린 그녀의 질문에는 전혀 거침이랄 게 없었다.
반면, 갑작스럽게 ‘결혼’이라는 단어를 맞닥뜨린 현재는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물론 아직까지 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아주 당연한 얘기였다.
“방법은 그것뿐이니까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무처럼 우뚝 서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쌩쌩 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은수는 시선을 내리깐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곤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현재 씨, 나 좋아해요?”
불시의 일격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랑해요?”
“……그건.”
거듭되는 어택에 잠시 현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은수가 말을 이었다.
“현재 씨는 몰라도 난 아녜요. 난 현재 씨를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결혼할 수 없어요. 아니, 실은 난 애초에 결혼 같은 거,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말은 장황하게 했지만, 결국 말뜻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럼, 미혼모가 되시겠단 겁니까?”
“네.”
“……제 아일 임신하신 몸으로요?”
“네. 할 수 있어요. 그럴 능력 정돈 충분히 있어요, 나.”
확신에 가득 찬 말투. 지난번처럼 은수는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지금까지 쭉 혼자서만 생각을 정리하고, 그걸로 이렇게 혼자만의 결론을 낸 뒤 그에게 디민 것이다.
고로, 지금 그녀는 도통 말이 통하지 않으리란 걸 현재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정말 눈앞에서 여자와 아이를 동시에 놓치게 될 수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현재는 일단 은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바람이 차요. 어디라도 들어가서 얘기해요.”
남자의 힘은 은수의 생각보다도 더욱 거셌다. 아마도 화가 난 탓일 테지.
지금은 그냥 말없이 끌려가는 게 상책일 거란 생각을 하며,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엔 은수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음료를 받아 와 창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음료를 마셨다. 은수는 유자차, 현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녀도 아메리카노를 마셨겠지만, 임신을 한 이상 카페인은 이제 은수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예 리드를 열어 커피를 통째로 마시는 현재를 보며, 은수는 마치 제가 마시는 양 입맛을 다셨다. 입 안에 머금은 유자차는 쓰다고 느껴질 정도로 달달했다.
창밖을 보며 입 안에 털어 넣은 얼음을 아드득 씹어 먹은 현재가 은수에게 시선을 두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네, 하세요.”
처음으로 제 맘을 고백하는 날이 이런 날이 될 줄이야. 현재는 개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됐다 싶은, 그런 역설적인 맘이 들었다.
“팀장님은 어떠셨을지 모르겠지만 전 그날 일…… 후회한 적 없습니다. 그때 그 일이 없었다 해도, 언젠간 그런 일이 벌어졌을 거라 생각하구요.”
“…….”
“그 일이 있고서야 깨달았어요.”
“…….”
“내가 팀장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조용히 듣고 있던 은수의 표정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뜬금없는 고백. 이것은 당초 은수의 시나리오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저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당연히 남자도 제 말에 수긍하고 따르게 되는, 그런 수순을 밟게 될 줄 알았는데.
은수는 밀려드는 당황스러움에 헛기침을 두 번 했다.
반면 현재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풀고, 이제껏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부었다.
“근데 내가 좋아하는 여잘, 그것도 내 아일 임신한 여자를! 가만히 미혼모가 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어야 되는 겁니까?”
“……도현재 씨.”
“그날 전 분명히 피임을 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제 아이가 확실하다면 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
“궁금하네요. 애초에 책임지라고 할 생각도 없으셨으면서 저에게 굳이 사실을 밝히신 이유가요.”
그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신 은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떳떳해지고 싶어서였어요.”
“…….”
“도현재 씨에게 얘기한 건, 그래도 아이 아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어요. 허락을 맡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 씨는 알아야 할 자격이 있는 일이니까요.”
“예의는 지키셨는데, 전 왜 기분이 나쁘죠?”
“미안해요. 기분 나빴으면 사과할게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난 현재 씨를 한 번도 남자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물론 그때는, 현재 씨가 정말 멋져 보여서…….”
순간, 은수의 말이 놀랍다는 듯 현재의 눈썹이 비틀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덧붙였다.
“그치만, 그건 순간의 흔들림이지 사랑이 아니잖아요.”
“…….”
“그런 감정 없이 의무감만으로, 아이 때문에 책임감만으로 하는 결혼은 싫어요. 그런 결혼이 얼마나 갈 것 같아요? 나도 나지만, 현재 씨가 먼저 지칠 거예요. 난 그러기 전에 현재 씨한테 최대한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답을 제시해 주는 거구요.”
그녀의 말은 반박하려야 반박할 수도 없게 무척 논리적이었다. 이럴 때조차 빈틈없는 그녀답다고 해야 할까.
“참 말씀 잘하시네요, 은수 씨. 팀장님다워요.”
“비꼬지 마요. 난 진심이에요.”
현재는 신경질적으로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 컵에 남아 있는 건 자잘한 얼음뿐이었다.
확실히 화가 많이 나긴 한 것 같았다. 항상 차분하고 부드러웠던 그답지 않은 모습에, 은수는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가슴이 뛰었다.
“방금, 최소한의 예의라고 하셨죠.”
“…….”
“죄송하지만 전 ‘최대한’으로 예의를 지키고 싶습니다.”
“…….”
“우리 아기한테요.”
우리 아기.
그 말이 은수에겐 너무나 생경하게 다가왔다. ‘우리’라는 수식어는 언제 들어도 이상했다. 그 말로 한데 묶였던 경험이 별로 없는 은수로서는 그저 부하 직원일 뿐이었던 도현재가 말하는 ‘우리’라는 단어가 더더욱 낯설었다.
언제부터 나와 저 사람이 ‘우리’였을까…….
잠깐 은수가 생각에 빠져 있는 틈 사이로, 현재가 조용히 덧붙였다.
“은수 씨 남편 역할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난 그냥, 우리 아기의 아빠가 되고 싶은 거예요. 정말 저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으시다면 아빠로서의 역할까지는 뺏지 말아 주십시오.”
얄궂게도, 그 말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한 풀 꺾여 버린 은수는 최대한 인정할 수 있는 선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그래요, 좋아요. 아빠의 역할을 하는 것까진 뭐라 하지 않을게요.”
“…….”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타협할 때는 타협하더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해야 했다.
숨을 고르던 은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재 씨는 아빠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세요. 나도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테니까요. 대신, 그건 현재 씨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까지예요.”
그녀의 말에 현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나중에 현재 씨가 정말로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생기게 되면…… 그땐, 나랑 아기는 생각하지 말고 현재 씨 뜻대로 하라구요.”
하지만…… 내가 결혼하고 싶은 건 당신이지 다른 여자가 아닌데.
“……내가 은수 씨와 결혼하고 싶다면요?”
“……내 말을 제대로 듣긴 들은 거예요? 난 결혼할 생각 같은 거 없다고 했잖아요.”
“하아.”
이제 현재는 차마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팀장님. 아니, 민은수 씨.”
“…….”
“참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알아요. 이기적이지 않았음 지금의 나도 없었으니까.”
“…….”
입술을 다문 채 노려보듯 강렬한 눈빛으로 은수를 쳐다보던 현재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요?”
“내가 은수 씨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아기도 포기하고, 은수 씨도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할게요. 근데 만약에.”
“…….”
“은수 씨가 조금이라도, 정말 요만큼만이라도 날 좋아하게 되면.”
남자의 눈빛은 놀라울 만큼 비장했다.
“그때는 무조건 와야 돼요, 나한테.”
그는 이제 그들이 팀장과 부하 직원 사이라는 건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말은 은수의 마음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은수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치 은수가 그들 사이에 팽팽하게 쳐 놓았던 결계를 송두리째 부숴 버리기라도 한 듯, 지금만큼은 평소의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그가 아니었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아뇨.”
“…….”
“내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은수는 자신에 차 있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 * *
“병원에선 얼마 정도 됐대요?”
“9주 정도요.”
“아닌 척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네. 너무 확실하네요, 날짜가.”
내 애 아니라고 내빼기는 애초에 글렀구만.
조수석에 탄 현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허무한 듯 웃었다. 그는 은수가 병원에서 받아 온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사진을 쥔 그의 손마디는 생각보다 굵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손마디가 굵은지 가는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은수는 앞으로 그에 대해 알아 갈 게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는 마치 아기를 쓰다듬기라도 하는 양, 사진을 계속해서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다 현재가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혹시 그 사이에 뭐, 애기한테 안 좋은 거 먹었다거나, 그런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