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13. 당신이 애 아빠인 것 같아요 (1)
[혹시 오늘 저녁에 퇴근하고 시간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도 문자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현재는 한참 전에 온 문자를 틈만 나면 다시 읽었다.
그 일 이후 그녀가 처음 보내 온 문자였다. 누군가는 그냥 단순한 연락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현재에겐 문자 하나도 남달랐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끈질기게 자신을 피해 다니던 그녀였다. 가끔은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단단한 장벽을 쳤고, 현재는 그 벽을 굳이 뚫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서였다.
마음 같아선 당연히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대체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엄연히 그녀는 상관, 그는 부하 직원이었다. 상관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하는 건 그가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도덕 시험 때마다 백점을 놓치지 않았던 도덕적인 인간 도현재는 사회에 나와서도 여전했다.
물론 은수는 상관이기 이전에 좋아하는 여자였지만.
좋아하는 여자라고 생각해도 답은 변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를 지켜 주고 싶은 건 당연한 본능이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키다리 아저씨처럼 뒤에서 묵묵히 바라만 봐도 좋다고, 욕심이 나더라도 참을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룻밤을 빌미로 여자를 발목 잡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녀가 불편해하는 것 같을 때마다 먼저 자리를 피해 준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웬일로 그에게 연락을 했다. 현재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Yes’를 보냈다.
그녀가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 때까지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조급해진 것이었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보기로 약속을 하고도, 현재는 여자의 문자를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 문자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또 문자에서 왠지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아서.
그렇게 몇 시간 지나니 그 몇 글자 안 되는 게 절로 외워질 정도였다.
“많이 기다렸어요?”
카페 앞에 서 있던 현재를 익숙한 목소리가 깨웠다.
“추운데 안에서 기다리지…….”
“아닙니다. 저도 금방 왔습니다.”
혹시나 그녀가 미안해할까 싶어, 현재는 손사래를 쳤다.
사실 마치자마자 온 거라 기다린 시간이 짧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하나도 춥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은수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으니까.
다만 여자는 그와 다른 것 같았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저녁 공기에 은수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러다 또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닐지. 이 와중에도 그녀를 걱정하는 그는 그 스스로 생각해도 중증이었다.
내가 이러는 걸 이 여자는 알긴 알까.
아마도 모르는 것 같은 눈치인 은수는 바로 어딜 가려는 것처럼 핸드백을 고쳐 멜 뿐이었다.
“우리 일단 저녁부터 먹죠.”
“저녁이요?”
“네. 배고프지 않아요?”
“배가 고프긴 한데…… 따로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있으세요?”
“음.”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은수는 미리 생각해 놓은 양 금방 답을 내놓았다.
“삼계탕이요.”
“삼계탕이요?”
복날도 아니고 한겨울에 갑자기 웬 삼계탕?
의외의 메뉴 선택에 현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팀장님이 삼계탕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반면 은수는 심드렁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네. 요즘 내가 영양 보충을 해야 할 일이 좀 있거든요.”
“……아…….”
어차피 그에게 메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먹고 싶은 거라면 뭔들 같이 못 먹으랴. 그게 행여 가죽이라도 그는 씹어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 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럼 그리로 가요. 내가 잘 아는 집 있어요.”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앞장선다. 이럴 때마저 리더십을 발휘하는 여자가 왜 이리 귀여운지.
나라님도 구제 못 할 콩깍지가 잔뜩 씌어 버린 현재는 그렇게 은수에게 이끌려 삼계탕 집으로 향했다.
“삼계탕 두 개 주시구요. 하나는 인삼이랑 대추 빼 주세요.”
자주 와서인지, 은수는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 듯 당당하게 요구하며 삼계탕을 주문했다. 그 나름대로는 첫 데이트 같은 느낌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첫 데이트에 삼계탕은 지독히 언밸런스였다.
그래도 자신을 내내 피하던 은수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아서, 배경이 삼계탕 집이라고 해도 현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밑반찬들이 나오고, 현재와 은수는 짜기라도 한 듯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 은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요즘 일은 잘돼요?”
“……네, 덕분에.”
여기까지 와서 일 얘기라니. 참 은수답다고 생각했지만 현재는 그런 대화를 따르기가 싫었다.
“밖에 나와서까지 일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이제 우리 얘기를 좀 해요.”
“……우리, 얘기요?”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은수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 많은 얼굴이 되었다.
내 말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현재는 은수의 눈치를 살살 봤지만, 은수는 그 뒤로 자신만의 생각에 빠졌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삼계탕 두 개가 은수와 현재 앞에 각각 놓여졌다.
그런데 삼계탕을 받은 은수는 숟가락을 들기는커녕, 코부터 그 앞에 가져다 대었다. 마치 먹이 냄새를 맡는 개라도 되는 것처럼.
‘왜 저러지? 상한 것처럼 보이나?’
의아한 현재도 덩달아 냄새를 맡았다. 아무 이상 없는 것 같은데. 막 나온 삼계탕이 상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게 잠시 냄새를 맡던 은수는 숟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국물을 한입 맛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다행히 별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아, 시원하다. 현재 씨도 얼른 먹어요.”
“네.”
간만에 먹을 것 앞에서 기뻐하는 은수의 모습이 흐뭇해서, 현재는 야속함도 잊은 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런데 팀장님, 하실 얘기라는 게 뭡니까?”
“…….”
“아, 이런 데서 묻는 건 좀 그런가요. 그럼 나중에 자리를 옮겨서……?”
이제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들려던 여자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아, 그거요.”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게 뭔가 불안한데.
“나 임신했어요.”
역시나……. 잠깐, 뭐?
“……컥!”
난데없이 튀어나온 폭탄 발언에, 삼계탕 국물을 삼키던 현재는 사레가 걸렸다.
이, 이게 지금 젓가락으로 고기를 한 점 떼어 내던 사람한테서 나올 소리인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며 한껏 당황해 있는 현재의 앞으로 은수가 친히 물을 따라 놓아 주었다. 그러고선 오로지 눈앞의 삼계탕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재가 물을 허겁지겁 마시고 몇 번 콜록대고 있는 와중에도 은수는 여전히 젓가락 놀림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뒤, 현재의 사레가 간신히 멈추었다. 삼계탕에 다시 숟가락을 담근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웠다.
“방금, 제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여쭤 보는 건데.”
“…….”
“팀장님이, 임신을…… 하셨다고요?”
이제 화룡점정으로 닭다리 살을 찢어서 밥 위에 올려놓은 은수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현재를 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네. 제대로 들었어요. 나 임신했어요.”
현재는 은수의 얼굴이 과녁이라도 되는 양, 금방이라도 뚫어 버릴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숟가락을 입에 넣고, 꼭꼭 씹고, 다 넘긴 후에야 은수는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애 아빠가 도현재 씨인 것 같아요.”
순간, 그는 무언가가 저 땅속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는 은수의 모습이 늘어난 테이프처럼 느리게 재생됐다.
잠시 뒤, 현재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은수가 삼계탕의 3분의 1을 해치운 뒤였다.
“날짜에 들어맞는 날이 그날밖에 없어요. 분명히 그거 쓴 건 맞죠?”
“…….”
“사용법이 잘못됐든가, 콘돔이 불량이었든가, 둘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은수의 말투는 일관되게 무덤덤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은수는 이미 제 손에 거머쥔 것이 폭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걸 감수하고도 제 손으로 핀을 뽑은 것이었으니. 그러나 현재는 달랐다. 폭탄이 언제 터질지는 물론이고, 그 폭탄이 무슨 비밀을 품고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현재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부지런히 삼계탕을 먹는 은수를 부동자세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은수는 피임에 실패한 원인을 추측하면서도 태연하게 국물을 들이켰다. 현재 앞에 놓인 삼계탕은 숟가락만 담겨 있을 뿐 처음 그대로였다.
잠시 동안 둘 사이에는 은수가 열심히 닭을 발라내는 소리, 그리고 그것을 꼭꼭 씹어 삼키는 소리로만 채워졌다. 물론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도현재의 눈알 굴러가는 소리, 도현재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 등등이 가장 컸겠지만.
이 모든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은수는 그 말을 한 순간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물을 마셨다.
은수가 그러는 동안 현재는 괜히 이리저리 흩어진 물수건과 휴지 뭉치들을 한데 모아 두고, 수저통 뚜껑을 닫고, 조미료 통들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저걸 정리 벽이 있다고 해야 할지, 깔끔하다고 해야 할지. 현재를 지켜보던 은수가 빈 컵에 물을 채우려 물병에 손을 뻗는 찰나였다.
은수의 손이 거의 닿았던 물병을 현재가 홱 낚아채 대신 물을 따랐다. 늦은 저녁의 삼계탕 집은 오늘따라 사방이 조용해서 빈 컵에 또로록, 물이 들어차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다 따른 물병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은 현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매우 비장했다. 방금 전까지 별 의미 없는 행동들을 했던 것이 사실은 현재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팀장님.”
“…….”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라?
그러나 은수는 현재의 얼굴을 외면하며 도도하게 물만 마실 뿐이었다. 그의 말을 듣기나 한 것인지, 이제는 고개를 숙인 채 얼마 남지 않은 뼈들을 골라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현재는 책임지겠단 말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여자가 이상했다.
“팀장님?”
다시 한 번 부르고서야 은수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진지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은수는 문득 자신이 너무 냉정한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눈을 피했다.
“책임지지 마요. 책임지라고 한 말 아니니까.”
“그럼……?”
“…….”
“그럼 대체…….”
삼계탕 국물을 다 비울 때까지 은수는 말이 없었다.
답답한 건 당연했지만, 현재는 섣불리 채근하지 않고 은수의 눈치를 살살 보며 끈덕지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뚝배기째로 국물을 다 들이켠 후에야 은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통보예요. 난 아기 안 지울 거라는 통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