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 내가, 임신을 했다구요? (2)
“뭐지?”
의아한 느낌에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그것은 비타민 음료였다. 그리고 병에는 자그마한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은수는 우선 포스트잇을 떼어내 내용을 확인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힘내세요.]
노란 바탕에 검정색으로 적힌, 간결하면서도 어른스러운 글씨. 따로 이름이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안 봐도 뻔했다. 이 글씨의 주인공은.
현재를 떠올린 은수가 제 손에 들린 포스트잇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는데도 이 남자는 정말 요지부동이구나.
그가 내게 이런 걸 남겨 놓은 건, 아마도 어제 병원에 다녀온 걸 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순간 은수의 머릿속에, 그가 지난번 회의 때 말했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타이밍도 얄궂지, 참. 내가 바로 당신이 말하던 그 임산부가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그는 뭐라고 반응할는지.
사정도 모르고 속 좋은 말을 남긴 그가 야속했지만, 그래도 은수는 그 덕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힘이 났다.
비타민 음료를 들어 손에 쥐었다. 날씬한 갈색 병에는 상품명과 함께 ‘힘내!’라고 외치는 유명 연예인의 사진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그가 의도하고 산 건 아니겠지만, 입덧엔 신 음료수가 좋다고 했다.
“그래…… 힘내야지.”
까드득.
뚜껑을 힘차게 돌려 딴 은수는 곧장 원 샷을 한 뒤, 병을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
“이제 일하자, 일.”
눈을 꾹 감았다 뜬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아이의 아빠이자 이 사태의 원흉이 남겨 놓은 포스트잇을 마치 부적처럼 제 재킷 주머니 안에 곱게 넣어 둔 채로.
* * *
회사에서 돌아온 은수는 한참을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물론, 그녀에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했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당연히 지우는 게 맞았다. 그녀는 지금 엄마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될 생각도 없었다. 결혼이 싫어 3년 사귄 남자 친구와도 헤어진 신세. 이러한 처지에 누군가와 가정을 이뤄서 아이까지 키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아이의 아빠는 다섯 살이나 어린 부하 직원이다. 하룻밤, 딱 한 번의 실수로 생긴 아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하나하나가 전부 한 가지 답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실제로 이렇게 고민해 볼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어. 개꿈 꾼 셈치고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 제발.
꼬르륵.
“……아이, 씨.”
정신은 죽고만 싶다고 하는데, 이 와중에도 몸은 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눈치도 없는 게.
“하여튼 밥때는 기가 막히게 맞추네.”
죽상을 한 은수가 부엌으로 나가 습관처럼 찬장을 열었다.
혼자 있으면 밥을 잘 해 먹지 않기 때문에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도록 즉석 밥이나 라면류를 항상 구비해 놓는 편이었다. 기분도 꿀꿀하니, 평소 좋아하는 라면을 먹으면 조금이나마 상태가 나아질까 싶었다.
그런데 익숙한 손길로 컵라면 하나를 꺼낸 은수가 포장을 뜯으려다 동작을 멈추었다. 비닐에 손을 대자마자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 때문이었다.
‘임신 중에 이런 걸 먹어도 되나?’
아차. 저가 생각해 놓고도 은수는 당황했다. 내가 이런 걸 왜 신경 쓰는 거지?
뭔가를 들킨 것처럼 당황스러워진 그녀의 눈길이 컵라면과 자신의 배를 번갈아 오갔다.
호기롭게 컵라면을 쥐었던 손에서 금세 힘이 빠졌다.
“……아오.”
신경질적으로 컵라면을 다시 박아 넣은 은수가 찬장을 쾅, 하고 닫았다.
저녁을 먹겠다는 생각은 금세 잊어버린 채, 속옷만 입은 그녀가 거울을 마주 보고 섰다.
오래전 인테리어용으로 사 뒀던 전신 거울을 이런 식으로도 쓸 줄이야.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몸은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모델 같은 몸매는 아니지만 썩 봐줄 만은 한 몸매. 지금껏 살면서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몸이었다.
머뭇거리던 은수의 손이 나름 판판한 배 위를 천천히 감쌌다.
살짝 나왔나? 아닌가?
하지만 배의 느낌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연히 아직까지는 생명의 고동 같은 게 느껴질 리 없었다.
“…….”
그런데 그 상태로 잠시 가만있으니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은근한 온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숨결. 그것이 손바닥뿐만 아니라 목구멍 바로 밑까지 천천히 퍼져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좁은 곳에 하나의 생명체가 싹을 틔웠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눈물겨웠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부터 제 안에서 숨 쉴 것을 생각하니 절로 숨이 가빴다.
저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히 이건 축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축복이 지금 그녀에겐, 너무나도 버거웠다.
아무래도 신은,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고른 것이 틀림없다.
왜, 대체 왜.
“……하필이면.”
나야?
아무리 대가를 치르기로 했다지만, 내가 안고 갈 몫이라고 했지만.
이 정도는, ‘대가’라고 치기에도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
거울 속에 비친 은수는 끝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 * *
다음 날, 몽롱한 정신 상태로 회사에 출근한 은수는 잠시나마 조퇴를 할까 생각했다. 이젠 감각들이 예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미각과 후각은 그 정도가 심각했다. 지금도,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아침 대용으로 조금 먹고 있던 빵 냄새가 너무 역해서 팀장실로 막 도망 온 직후였다.
나 원, 이래서야 티를 안 내고 잘 숨길 수 있을는지.
한쪽 턱을 괴고 있던 은수가 그대로 무기력하게 책상에 엎드렸다.
그때, 요란한 진동 소리를 내며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발신자는 역시나 엄마였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전화하는 사람이 엄마 말고 더 있으려고.
은수는 여전히 엎드려 있는 자세로, 귀찮음을 무릅쓰고 한쪽 귀에 전화를 올렸다.
“여보세요?”
[어어. 아침 먹었어?]
“어, 먹었어.”
괜히 안 먹었다고 말하면 잔소리가 날아들 걸 알고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져 버린 그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인지, 엄마는 타박을 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회사겠네?]
“응.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네가 하도 전화를 안 하니까 내가 한번 해 본 거지.]
“아이, 뭐. 내가 뭐 얼마나 전활 안 했다구…….”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지?]
“그럼, 당연하지. 내가 밥 굶고 다니는 거 봤어?”
[괜히 인스턴트 같은 거 사 먹지 말고 밥 해 먹어, 밥. 알았지?]
“또또, 잔소리.”
잔소리가 싫은 척 볼멘소리를 하지만, 막상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진다. 또 마침 이럴 때 엄마가 먼저 전화를 준 것은 엄마에게라도 말하라는 신의 계시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너무 이른 거겠지?
당장이라도 사실을 털어놓고 싶은 것을 참고, 은수는 또다시 밀려드는 버거운 감정을 힘겹게 억눌렀다.
그래도, 엄마와 얘기를 하게 되면 이거 하나는 꼭 물어봐야지, 다짐했던 게 있었다.
“엄마.”
[어?]
“엄마는…… 나 임신했을 때 어땠어?”
[너 임신했을 때?]
별걸 다 묻는다는 어조였다. 잠시 말이 없던 엄마가 대꾸했다.
[어땠기는, 마냥 좋았지.]
“어떤 게 좋았는데?”
[뭐, 느이 아빠랑 엄마랑 반씩 닮은 애가 뱃속에서 숨 쉬고 있다니까 행복했지. 내가 집이 되어 준다고 생각하니까 신기했고. 가끔 뱃속에서 요동을 치고 난리를 부리면 얼마나 대단한 놈이 나올까 기대도 됐는데, ‘대단한 년’이 대신 나왔지?]
“엄만! 대단하면 대단한 거지 대단한 ‘년’이 뭐야.”
뜻밖의 질문이었긴 했지만 간만에 임신했을 때를 떠올리니 엄마는 즐거운 모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까르르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맞잖아, 대단한 울 딸내미.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은수가 잠시 머뭇거리곤 대답했다.
“그냥. 주위에 애 낳는 친구들도 속속 보이고 그러니까. 그냥 궁금했어.”
[부러워?]
“허, 부럽긴? 말도 안 돼.”
[으이그, 너도 얼른 시집을 가야 그런 애들 따라가지. 너 다음 주에 선 자리 들어왔는데 안 볼 거야?]
“당연하지. 내가 언제 선 나가겠다는 거 봤어요? 선 얘기 할 거면 끊어요. 나 바빠.”
[으유, 그 좋은 자리를 왜 다 마다해. 너 정도면 다 모셔 간다니까!]
“엄마!”
[아이, 알았어. 전화나 좀 자주 해.]
“알았어요.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응.”
엄마랑 통화를 하면 꼭 마지막은 선 얘기로 끝을 맺는 것 같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은수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만 좀 하라고 엄포를 놔야 하나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다고 포기할 엄마가 아니었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은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도현재와 민은수를 반씩 닮은 아기라. 생각만 해도 그건 너무 이상했다.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을 아기. 아직은 ‘낯설다’는 느낌만 가득했다.
엄마는 지금의 은수와 같은 상황을 ‘집이 되어 줬다’고 표현했다. 그 말에 은수는 더욱 착잡해졌다.
“…….”
집은 무너질 일 없이 튼튼하게 지어 줘야 하는 건데.
지어 주기는커녕 무너뜨릴 생각만 하는 엄마를 어쩌면 좋겠니.
* * *
‘9주 정도 됐네요. 이제 아기가 자리는 잡은 것 같지만 그래도 유산 위험이 좀 있으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입덧은 아직 좀 더 하셔야 될 거예요. 무엇보다도 남편분의 관심과 애정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남편 분의 관심과 애정?
운전대를 잡은 은수는 방금 전 진료실에서 들었던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떠올리곤 씁쓸하게 픽 웃었다. 홀로 간 산부인과에서 의사는 그런 말을 잘도 했다.
산부인과는 고등학교 시절 생리 불순 때문에 가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낯선 곳에서 은수는 자신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생각보다 더욱 커 보였던 그것은 어느새 나름대로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벌써 ‘배아’라기보다는 ‘태아’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저 혼자 어찌 그렇게 쑥쑥 컸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색한 초음파 진단을 받고 아기와 처음으로 인사한 순간, 그때서야 은수는 비로소 결심했다.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되든지, 이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겠다고.
사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은수는 며칠 동안 정말 수백 번도 모자랄 만큼 고민했다. 그러나 아기를 지워야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보이지도 않는 아기가 제 발목을 있는 힘껏 부여잡는 느낌이었다.
제발,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자길 버리지 말아 달라고, 엄마를 제 눈에 담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물론 무지막지하게 힘들 거란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차가 대기 신호에 걸리자 은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현재의 이름을 찾았다.
이제 애 아빠가 누구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은 은수 자신의 아기였다. 자신이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소중하게 키워 내야 할.
그래서 은수는 결심했다.
그에게 모두 말하기로.
그리고 떳떳해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