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 내가, 임신을 했다구요? (1)
살다 보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던 일들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몰아칠 때도 있다는 걸, 은수는 나이를 서른둘이나 먹고서야 몸소 알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뼈저리게.
“방금…… 이, 임신이라고…… 하셨어요?”
“네, 임신이요. 초기 아니십니까?”
“…….”
“왜 그러세요?”
왜? 왜냐고? 지금 나한테 그걸 묻는 게 말이나 돼?
의사 가운을 입은 그의 어조는 너무도 분명해서 마치, ‘바보야, 이게 임신이 아니면 뭐겠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한순간에 멘탈 붕괴가 와 버렸다. 죄도 없는 의사를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은수의 낌새를 살피던 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전혀 모르셨나요?”
“……예.”
그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기가 나 여기 생겼어요, 하고 알려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임신? 임신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민은수가? 그게 말이 돼?
엄청난 충격에 혼란스러워진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앞의 여자가 임신 사실을 전혀 몰랐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의사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다.
“그러기엔 티가 많이 났을 텐데. 초기인 것 같으니까 얼른 산부인과에 가 보세요. 보통은 이렇게 모르고 오시는 일이 잘 없거든요.”
……잘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뒤 의사에게 무슨 말을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또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해서 회사까지 왔는지, 은수는 정말이지 생각이 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건 오직 ‘임신’이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이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왜 요새 감기 기운이 있었는지, 속이 더부룩하고 헛구역질이 심했는지, 머리가 아팠는지.
생각해 보니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확연한 증상들이었다. 하지만 요사이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던 터라 ‘임신’이란 단어는 떠올리지도 않았었다. 차라리 지훈과 사귈 때였으면 의심이라도 해 봤을 텐데.
아직 시집도 안 간 꽃다운 처녀 신세에 ‘임신’이란 단어를 맞닥뜨리게 되다니.
누군가 뒤통수를 도끼로 쾅 찍은 듯 멍멍했다. 아니, 차라리 진짜 누가 그래 줬으면 좋겠다 싶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이란 말인가?
복잡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녀가 병원에 다녀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박 과장이 은수를 반겼다.
“팀장님, 오셨네요? 병원에선 뭐래요?”
“어…… 스트레스성 위궤양이래요.”
거기다 옵션으로 임신까지 했다네요. 뒤따라 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우겨넣었다.
제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현재가 위궤양이라는 말에 살짝 놀라 은수를 쳐다보았다.
고작 위궤양에도 저런 표정인데 임신했다는 소리까지 들으면 아주 기함을 하려나.
“어머, 요즘 큰 건이 많아서 팀장님이 무리하셨나 봐요.”
“……그런가 봐요. 자극적인 음식 피하고 그러면 금방 괜찮아질 거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휴, 그럼 다행이다.”
“네. 저 잠깐 쉴 테니까, 잠시만 직원들 들여보내지 말아 줄래요?”
“그래요. 얼른 쉬세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팀원들을 뒤로한 은수는 팀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어차피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괜히 문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음들이 마치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문에 기대어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은수는 지지대를 빼 버린 인형처럼 이내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 나 어떡하지?
이제 진짜 어떡해?
은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간해선 멘탈이 흔들리는 법이 잘 없었다. 오히려 큰일이 닥칠수록 특유의 침착성을 발휘해 늘 올바른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 가곤 했었다. 그런 능력 덕에 이런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었고.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그럴듯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일단 제일 먼저, 누군가에게 알리기는 해야겠지. 누구든지 이럴 때는 보통 가족을 제일 먼저 찾는 법이었다. 하지만.
“…….”
나한테 가족이라고는 엄마밖에 없는 게 문제지. 엄마의 얼굴을 떠올린 은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나밖에 없는 딸, 더 나이 들기 전에 시집보내야 한다며 한창 선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데, 결혼은커녕 임신부터 먼저 해 버렸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제껏 엄마에겐 남자 친구 얘기조차 한 적이 없다. 워낙 극성이니까.
그렇다고 친구들을 찾자니, 평소 바쁘단 핑계로 연락도 잘 하지 않았던 게 찔려서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연락을 해도 문제다. 대뜸 ‘나 임신했다’고 하면 퍽이나 반기겠네.
이래서 형제자매가 필요하다는 건가.
은수는 그제야, 혈혈단신 외동딸이 서럽다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여튼 아빠란 인간은 이럴 때마저도 도움이 안 돼.
“하아…….”
숨을 토해 내 봐도 답답함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실 명확했다.
이 아일 지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낳을 것인가.
아기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아무리 예쁘다 한들 그게 자신의 아기라면 얘기가 달랐다.
임신이란 건 당연히 제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을 단어였다. 아이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결혼을 해야만 아기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옳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내가…… 아기를 키울 수 있을까?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직 제대로 형태도 잡히지 않았을, 죄 없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어서 은수는 공연히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건 그렇고,
“하아.”
네 아빠는 대체 누구니.
임신을 했단 소리만으로도 너무 큰 충격이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 그건 아이의 아빠가 대체 누구냐는 거였다.
사실 임신 얘기를 듣자마자 맨 처음 떠올렸던 얼굴은 다름 아닌 지훈이었다. 비록 빈도는 낮았지만, 요 몇 년간 은수의 잠자리 상대는 오로지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날, 현재와의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 생각에 이른 은수는 벌떡 일어나 창문에 쳐진 블라인드를 살짝 거두어 밖을 내다보았다. 무언가를 읽고 있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일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 알면 남자는 대체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은수는 팀장씩이나 하게 해 준 명석한 머리를 이용해 지난 일들을 찬찬히 곱씹었다.
지훈과 했던 관계에서 은수는 늘 콘돔으로 피임을 했었다. 또, 현재에게서 들은 바로는 그와 밤을 보냈을 때에도 똑같이 콘돔을 썼다고 했다.
이론적으로는 둘 다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어야 했지만, 모든 피임법이 그렇듯 콘돔의 피임률은 100퍼센트가 아니었다. 분명 둘 중 누군가는 콘돔을 잘못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기도 따져 봐야 했다. 은수가 기억하기로, 지훈과의 마지막 관계는 꽤 오래전이었다. 한동안 각자의 일로 바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 못했고, 그날도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본 거였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지금으로서는 범인으로─지금 은수에겐 범인이나 다름없었다.─ 저 남자가 제일 유력했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이쯤 되니 그가 제대로 피임을 하긴 했던 건가 하는 의구심도 피어올랐다. 지훈과 관계를 할 때는 늘 은수 스스로 물 풍선까지 만들어 가며 새지 않는 걸 확인했었으니까.
현재도 남자였고, 남자들이 피임 문제에 있어 그렇게까지 철저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술에 취해 있었어도 그나마 남자는 제정신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쨌든 그도 그날 술을 마시긴 했었으니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팀 부하 직원의 아이를 가진 팀장이라. 누가 인터넷 게시판 같은 데 올리기라도 하면 당장 베스트일 텐데.
이제껏 열심히 헌신하며 쌓아 온 자신의 커리어를 생각하자 은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몰라. 최연소 팀장 단 지 대체 얼마나 됐다고…….
다시금 주저앉은 그녀가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은 온통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잠시 뒤,
“…….”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홱 고개를 들었다.
‘혹시 검사가 잘못됐던 건 아닐까? 종목이 산부인과도 아니었으니까. 혹시 오진이었을 수도 있잖아?’
그래,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갑작스레 은수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지금으로선 혹시 모를 그런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은수의 처절한 임신 부정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일단 은수는 회사를 마치고 제일 먼저 약국에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제약 회사별로 하나씩 샀다. 괜히 하나만 해 봤다가 두 줄이 뜨면 또 다른 멘탈 붕괴가 올까 두려워서였다.
“제발…… 제발…….”
집에 가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두 개를 사용하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결과는…….
“헐.”
두 개 다 두 줄이었다.
“이런 씨…….”
썅. 아, 난 망했어!
망연자실한 은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한순간에 정신도, 혼도 모든 게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일생일대의 코너에 몰렸다. 차라리 지구가 깨졌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아니면 이 건물이라도 무너지면 좋겠다. 어차피 혼자 살다 가는 인생, 이제는 더 이상 미련도 없는데.
“…….”
잠시 동안 천장을 보며 오만상을 짓던 그녀가 짜증 섞인 신음과 함께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야! 미련이 없긴 왜 없어. 남은 건 미련뿐이야. 이렇게 억울하게는 못 가지. 내가 지금껏 어떤 마음으로 아등바등 살았는데!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벌써부터 이래서는 안 됐다.
‘다른 것들도 해 봐야 확실한 거야. 아직 두 개밖에 안 했잖아? 그리고 지금은 아침이 아니라서 좀 부정확할 수도 있는 거고. 아침 첫 소변이 제일 정확하다니까 아침까지 일단 기다려 보자.’
마음을 단단히 먹은 은수는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얼굴에 다크 서클이 잔뜩 드리워진 은수를 반긴 것은,
“…….”
어제보다 더욱 선명한 듯 보이는 두 줄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깔끔하게 새빨갰다.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다. 참을 수 없는 억울함에 입술을 깨문 은수는 그것들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세게 던져 넣었다.
“어떻게 불량인 게 하나도 없냐, 이건?”
그렇게 임신 부정기는 고작 하루 만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출근은 해야 한다. 그게 직장인의 숙명이자 은수의 철칙이었다.
“하아.”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맹세코, 이렇게까지 출근이 하기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은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어찌 됐든 그녀는 팀장이었다. 부하 직원들을 통솔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직책.
임신이든 뭐든 사적인 일은 별개고, 일은 일이다. 내부의 감정을 외부에까지 표출시킬 순 없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출근한 사무실엔 박 과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팀장님 오셨어요? 굿모닝입니다.”
“……안녕하세요.”
난 상당히 안녕하지 못하지만. 은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은수의 얼굴을 살핀 박 과장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었다.
“어제 병원에 갔다 오시더니 어째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시네요. 안색도 안 좋고.”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요, 뭐. 차차 나아지겠죠.”
“아침은 드셨어요?”
“아뇨. 점심 먹으면 돼요.”
“요즘 뭘 제대로 드시는 게 있어야 말이죠. 오늘은 팀장님 좋아하시는 삼계탕 먹으러 갈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은수와 나이 차가 꽤 많이 나는 박 과장은 벌써 애가 둘인 유부녀였다.
은수가 비록 상사의 입장에 있기는 했지만, 너그러운 언니처럼 챙겨 주고 돌봐 주는 그녀는 은수에게 늘 고마운 사람이었다.
할 수 있다면 당장 그녀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절대 밝힐 수가 없다.
나에게도 언니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훨씬 덜 막막했을 텐데.
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생각을 하며 팀장실로 들어선 은수는 제 책상 위에 무언가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