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0화 (10/128)

# 10

10.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3)

“……도현재 씨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제일 처음으로 나선 건 뭔가 의외였다. 신입이 이런 자리에서 용감하게 먼저 손을 들다니. 물론 어련히 그가 알아서 자원한 거겠지만, 뭣 모르고 얘기했다가는 까딱 잘못하면 큰 망신이 될 수도 있었다.

기특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한 마음에 은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기왕 손 든 것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요. 말해 봐요. 어떤 거예요?”

회의실의 모든 눈길이 한꺼번에 현재에게로 향했다.

밀려오는 부담감에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임산부를 위한 제품을 기획해 보는 건 어떨까요?”

“……임산부요?”

임산부라.

지금까지 다소 포괄적으로 타깃을 잡았던 데 비하면 좀 뜬금없는 대상이기는 했다.

그를 증명하듯 팀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은수의 눈썹도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럼에도 현재는 꿋꿋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임산부들은 식품 업계에서 늘 뒷전으로 고려하는 대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임산부를 위한 제품은 아기를 위한 제품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죠. 좋은 건 뭐든 다 해 주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용해 유기농이며, 온갖 좋은 재료들을 다 쓴 유아 전용 식품들이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지만, 정작 그런 아기를 열 달 동안이나 품어야 하는 임산부들을 전문적으로 공략한 제품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어찌 보면 제일 중요한 대상인데 말입니다.”

“…….”

“그렇잖아도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는 추세이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경제적 문제 같은 복합적인 이유들이 분명 있겠지만…… 제가 봤을 때 가장 큰 원인은, 나라에서 출산율에 집착한 나머지 임신을 장려하거나 지원해 주기는커녕 임산부들을 압박하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진지한 눈빛이 좌중을 아울렀다.

“임신 여부를 떠나, 여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또한 임산부가 건강하고 즐거운 식생활을 영위해야만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모토로, 입덧 완화에 도움이 되는 등의 임산부에게 초점을 맞춘 식품을 개발한다면, 저는 이 프로젝트가 장기적으로 우리 회사에게 큰 이윤을 가져다주게 될 것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인식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

“이상입니다.”

현재의 말을 집중해서 들은 팀원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즉석에서 말한 것 치고는 너무나 디테일하고 성의 있는 의견에 놀란 탓이었다.

새파란 신입 주제에 벌써 저렇게까지 생각을 해 놓았단 말인가?

은수는 속으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는,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확실히.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린 뒤 긍정적인 소감을 내놓았다.

“잘 들었습니다. 굉장히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다들 제 의견에 동의합니까?”

“예,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전체 회의와 간부 회의를 주에 한두 번씩 진행해 보았어도, 이처럼 흡족한 결과물을 낸 적은 많지 않았다.

오늘도 공치고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의외의 소득이 하나 생겼네.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씩 웃었다.

“좋아요. 그럼, 현재 씨 의견은 앞으로 적극적으로 논의해 보도록 하죠. 또 다른 의견은 없나요?”

* * *

“야, 현재 씨, 오늘 멋있었어. 언제 그런 생각을 다 했데?”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그가 의견을 낸 덕분인지 회의는 짧게 끝났다. 이 대리의 칭찬에 현재는 쑥스러운 듯 웃기만 했다.

“아무튼 진짜 다시 봤어. 현재 씨 한 건 한 기념으로 내가 오늘 저녁 쏠게.”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이 대리는 격려의 의미로 현재의 어깨를 툭 치고는 유유히 걸어갔다.

기분 좋게 웃은 그가 아무 일 없었던 듯 이 대리의 뒤를 따르려던, 그때였다.

그녀에게서 저를 찾는 부름이 들린 것은.

“……현재 씨!”

현재의 몸이 그 상태 그대로 굳었다.

저 사람이 내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마지막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이제야 나를 부르는구나. 시간이 그만큼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스르륵 뒤로 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예, 팀장님.”

회의실에서 막 나온 은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가 불러 놓고는 누구보다 당황한 모양새.

사실 맘 같아선 부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꼭 묻고 싶어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현재 씨가 말한 아이디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

“현재 씬 여자도 아니고, 나이도 어리고…… 딱히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접점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

나이. 그 문제가 이런 데까지 적용되는 모양이네.

은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던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겁니다. 주변에 임산부가 있지는 않았지만, 아기를 워낙 좋아했었거든요.”

“…….”

“그런데 시중에 아기를 위한 제품은 많지만, 임산부를 위한 제품은 거의 없다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식품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 꼭 이 문제를 다뤄 보고 싶었는데, 운 좋게 맞아떨어진 거죠.”

“…….”

“답변이 되었습니까?”

매우 간결하고 확실한 대답. 은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어…… 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둘러 말을 마무리한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불편해할 그녀를 다분히 의식한 행동이었다.

분명 저를 위해 그러는 것일 텐데도, 은수는 그의 쌩한 태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애초에 쉽게 잘라지지 않을 일을 억지로 자르려 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잔해가 아직까지도 그 자리에 덕지덕지 남아 그와 그녀를 동시에 괴롭히고 있었다.

“……휴.”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몸이든, 정신이든. 정말 여러모로 힘든 요즘이었다.

* * *

하여간에 병원이란 곳은 언제 와도 달갑지가 않다.

자동문을 통과하고서 잠시 머뭇거린 은수는 천천히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오셨죠?”

“어, 저기. 지난번에 받은 정밀 검진 결과 확인하러 왔는데요.”

“아,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민은수요.”

“네. 저기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며칠 만에 다시 찾은 병원은 나름 조용한 편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완전히 시장 바닥이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끝까지 버티던 은수는 결국 정밀 검사를 받았다. 어째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거의 모든 음식만 보면 구역질이 올라왔다. 주변 동료들조차 얼른 병원에 가 보라고 채근할 정도로.

팀원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이 그래도 회사 근방에서는 제일 괜찮은 곳이라고 했다. 건물 자체의 연식은 오래되어 보였지만 실내는 나름 쾌적하게 꾸며 놓은 게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병원을 고를 때 제일 중요한 건 의사의 실력이니까.

은수는 대기석에 앉아 실내를 두리번거리다 심심풀이로 옆에 꽂혀 있는 잡지를 펼쳤다. 잡지를 읽으면서도 코를 찌르는 병원 특유의 냄새에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병원에 오기 싫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냄새였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없었던 편이어서 병원에 간 적도 몇 번 없었다. 아빠가 남겨 준 몇 안 되는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 면역력이 높아서 감기도 잘 안 걸리고, 만약에 걸렸다 해도 잠 좀 푹 자고 일어나면 낫는 그런 강철 체력이었는데.

그랬던 은수도 이번엔 왠지 증상들이 심상치가 않아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겪지 않았던 질병들을 한꺼번에 다 겪는 느낌이었다.

설마 나이 때문일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닌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도통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람들 말 들어 보면 제 몸은 보통 제가 제일 잘 안다고 하더라마는.

“민은수 님, 들어오세요.”

“네.”

공포의 시간이었다. 잡지를 다시 옆에 꽂아 둔 은수는 떨리는 맘을 숨긴 채 진료실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정밀 검사를 할 때 봤던 중년 의사가 오늘도 있었다. 약간 주름이 진, 아무런 표정이 없는 그의 얼굴은 의중을 읽기가 정말 힘들었다.

은수는 혹시 심각한 결과가 나오진 않을까 잔뜩 긴장했던 몸을 살짝 풀고 의사 앞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는 은수가 진료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서류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검진 결과일 것이었다.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언뜻 은수의 얼굴을 확인한 의사가 코에 걸친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지난번에 몸이 좀 전체적으로 안 좋은 것 같다고 하셨죠?”

“네. 어디 문제가 있나요?”

“최근에 스트레스 많이 받은 적 있어요? 뭐, 일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기타의 이유 등으로.”

“어…….”

진짜 스트레스 때문인가? 그랬던 것 같긴 하다. 요즘 내 인생이 좀 시끄러웠어야지.

지난 일을 곰곰이 떠올리던 은수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의사가 또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환자분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예요. 일단은 스트레스성 위궤양이 좀 있네요. 심리적인 영향이 큰 병이니까 스트레스 요인을 좀 줄이시고, 일도 적당히 하시고, 심신 안정 취하시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 네. 혹시, 다른 이상은 없나요?”

은수의 말에 서류를 집어 다시 들여다보던 의사는 결과서 아래쪽을 훑으면서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뭐, 다른 곳은 딱히 이상이 없는데.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건 사실이에요. 건강 관리에 특별히 유념하세요.”

“아, 네.”

“무엇보다 민은수 씨는 직장인이시니까, 특히 일을 좀 줄이도록 하세요.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제일 크거든요. 홀몸도 아니신 분이 더더욱 조심하셔야죠.”

홀몸?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 있던 은수가 생경한 단어에 멈칫했다.

“네? 홀몸……이 아니라뇨? 그게, 무슨 소리신지……?”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두뇌였지만, 생뚱맞게 튀어나온 ‘홀몸’이란 단어는 단박에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수에게, 의사는 확인 사살을 하듯 또박또박 선고를 내렸다. 홀쭉한 그녀의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슨 소리긴요. 민은수 씨, 임신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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