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9화 (9/128)

# 9

9.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2)

“이모, 여기 청국장 일곱 개요!”

“일곱 개요?”

사람은 다섯 명뿐인데. 의아한 눈으로 묻는 은수에게 이 대리가 얼른 대답했다.

“아, 현재 씨랑 민희 씨도 방금 미팅 끝나서 이쪽으로 온답니다. 금방 올 테니까 미리 시켜 놓으라고 하더라고요.”

“아아…….”

그 사람도 여기로 오는구나. 아, 불편한데.

은수는 잠시 뒤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자 아찔해졌다. 보나마나 청국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먹기만 할 것이다.

괜히 점심 같이 먹는다고 따라와서. 내 무덤을 내가 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은수는 굳은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렸다.

회사들이 몰려 있는 이곳 근처 점심시간답게 청국장 집은 직장인들로 붐볐다. 새로 생긴 데라더니 생각보다 인기가 좋은 모양이었다.

“근데 여긴 다들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제가 근처 회사에 다니는 친구한테서 들었어요. 걔가 먹어 봤는데, 청국장이 냄새도 별로 안 나고 깔끔하다더라고요. 그래서 특별히! 선배님들께 제가 추천했죠.”

현재, 태섭, 민희와 함께 이제 들어온 지 갓 두 달이 된 신입 사원 유라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우쭐하며 말했다. 저 나잇대 여자애들은 어찌나 발랄한지. 나도 저랬던 때가 있었나. 잠시 생각하던 은수는 씩 웃었다.

“그럼 맛없으면 유라 씨 탓해도 되는 거예요?”

“에이, 팀장님도. 사람마다 당연히 식성 차이가 조금씩 있는 거잖아요. 혹시나 맛없어도 제 탓 하시면 안 돼요!”

“뭐야, 유라 씨. 자신 없는 거야? 안 되겠다. 빨리 다른 데 가자.”

김 차장의 말에 모두들 하하하 웃고 있는데, 그때 특유의 종소리가 들리며 두 명의 인영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저희 왔습니다.”

참 독보적인 목소리다. 저 멀리서도 이렇게 누군지 딱 알겠는 걸 보면. 은수는 남 몰래 한숨을 쉬었다.

“어, 현재 씨. 왔어? 민희 씨는?”

“저도 왔죠~”

처음 입사할 때부터 현재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것 같던 민희가 얼른 뒤따라와 그에게 팔짱을 척 끼는 것이 보였다. 생긋 웃는 얼굴이 참 예쁜 편이긴 한데, 이상하게 맘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그런 민희와는 별개로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천천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팔짱을 푸는 현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참 배려 깊고 착한 사람이다. 저런 성정이니, 나에게도 배려를 하려다 피치 못할 사고를 맞았던 거겠지.

아무 생각 없이 현재 쪽을 바라보고 있던 은수의 눈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

“…….”

이제는 좀 자연스러워지면 좋으련만. 이렇게 눈빛이 교차할 때면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그 눈길을 얼른 먼저 피해 버렸다. 지금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늘 있는 일인데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를 애써 외면하며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는데, 잠시 뒤 밑반찬들과 함께 청국장 일곱 그릇이 테이블로 서빙 되었다.

“청국장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번잡한 생각은 잠시 뒤로 밀어 둔 채 아주머니를 향해 미소를 지은 은수가 공깃밥 뚜껑을 열고 청국장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려 했다. 그런데,

“우욱!”

청국장에 밴 옅은 냄새가 갑작스레 걷잡을 수 없는 토기를 몰고 왔다. 갑자기 청국장이 이 세상에서 제일 혐오스러운 음식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 역한 냄새는 뭐지?

“팀장님!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아…… 욱!!!”

겨우겨우 대답을 하며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 했으나 도저히 토기를 참을 수 없는 나머지 은수는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갔다. 당장 속을 비워 내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은수는 화장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칸막이 안으로 돌진해, 변기 앞에 몸을 엎드렸다.

뒤따라온 유라와 민희가 ‘팀장님! 여기 계세요?’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차마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말 시원하게 토를 하고 나면 나을 것 같은데, 막상 화장실에 오고 나니 나오는 건 없고.

그렇게 한참을 꺽꺽거리던 은수는 힘이 다 빠진 채로 칸막이 문을 열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유라는 걱정스러운 얼굴인 반면, 민희는 이게 대체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네. 하아, 괜찮아요. 나 잠시만 있다 갈 테니까, 먼저 가서 먹고 있을래요?”

“그래도 저희랑 같이 가시는 게…….”

“좀 걸릴 것 같아서 그래요. 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얼마 길지도 않은 점심시간을 허비하게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먼저 돌아간 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은 은수는 가슴께를 다독거리며 진정을 했다.

“갑자기 뭐지.”

아까 그 냄새는 대체 뭐였을까. 평소 청국장을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지는 않는 편이어서 자주 먹곤 했었다. 더군다나 청국장은 냄새가 조금 있어 줘야 제 맛이라며 냄새 안 나는 청국장보단 냄새 나는 청국장을 선호하던 자신이었는데, 별다를 것 없어 보였던 청국장에서 그런 해괴한 냄새를 맡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요즘 은수에겐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생리 불규칙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넘긴다 치지만, 별로 먹은 게 없는데도 소화가 잘 안 되어 더부룩한 날이 부지기수였고, 감기 몸살기가 있는 것처럼 미열이 나거나 으슬으슬하기도 했지만 잠시 있어 보면 또 평소와 같이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또 일을 좀 무리하게 한 날엔 머리도 평소보다 더 아팠다. 요즘은 어지럼증도 자주 도져서 집에선 잠시 일을 놓고 일부러 쉬는 날이 많았다. 뭔가 몸에 이상이 온 것 같긴 한데, 정확한 원인이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그 일 때문에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아님 설마 큰 병에라도 걸린 걸까? 몸이 이상하니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다못해 체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괜히 지레 걱정하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을 마친 은수가 테이블로 돌아갔을 때는 어느새 다들 밥을 반 정도 비운 상태였다.

“팀장님, 정말 괜찮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데.”

“아…… 요즘 속이 좀 안 좋더니 체했나 봐요. 전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아이구, 어쩌다가요. 조심하시지.”

“근데, 이거 냄새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냄새요?”

제 몫의 청국장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리던 태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청국장 냄새가 원래 이렇지 않아요? 전 괜찮은 것 같은데. 오히려 다른 청국장들보다는 냄새가 덜한 편인 것 같아요.”

그런가…….

은수는 태섭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앞에 놓인 청국장을 멀리 치워 버렸다. 아예 보기도 싫은 탓이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 몫의 청국장에서 나는 냄새까지 감지했는지, 또다시 토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려 했다. 급기야 코까지 틀어막았지만 냄새 차단에는 별 소득이 없었다.

그때, 멀리서 딸랑,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밥도 안 먹고 갑자기 불붙은 망아지마냥 뛰어나가더니, 어디 갔다 왔어?”

뜀박질을 했던 건지, 거친 숨을 내쉬던 현재가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

“팀장님, 이거.”

저, 저요?

남자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를 손가락으로 찍어 보이던 은수는 얼떨떨해하며 봉투를 받아 들고 안을 살폈다.

“이거…….”

그건, 소화제였다.

그를 닮은 것 같은 하얀 종이봉투에, 소화제 음료와 알약 소화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와, 약국 갔다 온 거야?”

“……예.”

간결하게 대답을 마친 현재는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눈치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묵묵히 숟가락을 들 뿐이었다.

“이야, 팀장님 생각하는 건 현재 씨밖에 없네.”

현재 쪽을 힐끔 본 박 과장이 남은 밥을 한술 뜨며 웃었다. 민희는 제가 좋아하는 현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약을 사 왔다는 게 맘에 안 든다는 눈치였다.

은수의 눈길이 시선을 내리깐 현재에게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고마워요.”

그 말에, 방금 전까지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던 그가 고개를 들어 은수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시선은 금방 다시 아래로 향했다.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꼭 가 보세요.”

눈도 안 마주치면서 저런 말을.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어쩐지 그 안에는 걱정이 서려 있는 듯해서, 은수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녀가 아무리 매몰차게 대해도 현재는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지내자고 냉정하게 말했던 건 자신이었건만, 정작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상대를 대하고 있는 건 그뿐이었다.

“…….”

바로 지금처럼.

제가 꼭 쥐고 있는 것에 그의 고운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은수는 애꿎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 * *

선두에서 주재하는 입장인 은수에게도, 월요일 아침 회의는 언제나 지겨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팀장으로서 차마 그걸 티 낼 수는 없는 노릇. 팀원들로 하여금 으쌰으쌰를 하게 하려면 리더부터가 제일 먼저 텐션 업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은수는 원래 제 기분보다 더 오버해서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또 한 주가 밝았네요. 다들 주말은 잘 보내셨죠?”

“예에…….”

활기찬 월요일에, 대답은 거의 제삿날이네. 으휴, 힘 빠져.

“에이, 목소리들이 왜 그래요. 주촌데 다들 기운이 없어.”

말에 뼈가 있다는 걸 좀 눈치채 주면 좋으련만.

이럴 때는 아이템 회의가 제격이었다. 일부러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다른 팀원들의 눈치가 보이는 시간이기에.

“끝내고 빨리 일해야 하니까, 우리 본론부터 바로 시작하죠.”

“…….”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신제품 출시하려고 벼르는 거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최근에 기업 선호도 조사에서도 경쟁사에 밀렸기 때문에, 우리 마케팅팀 입장에서도 새로운 기획이 절실한 상황이죠.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제품이 되었으면 한다고, 위에서 기대가 크다고 말씀하시기도 했고요.”

“…….”

“그래서 말인데, 평소에 따로 생각해 놓은 아이템…… 혹시 있나요?”

은수의 말에, 좌중은 짠 것처럼 조용해졌다. 다들 슬금슬금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누구 하나가 물꼬를 트면 좀 나을 텐데, 항상 그 물꼬를 트게 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은수의 카리스마 있는 눈빛이 팀원들을 날카롭게 훑었다.

“없나요? 단 한 명도?”

“…….”

또다시 정적. 이럴 줄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아닌가.

은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과한 기대를 한 건가요?”

“…….”

“뭐, 할 수 없죠. 없으면 나올 때까지 생각하는 수밖엔.”

어디, 언제까지 조용히 있나 구경 한번 해 볼까.

은수가 여유롭게 시각을 확인하던 그때, 멀리서 손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저, 제게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

“말씀드려도…… 됩니까?”

두터운 음성.

그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도현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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