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8화 (8/128)

# 8

8.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1)

“왜 불렀어.”

“…….”

“오늘 나 바빠. 할 얘기 있으면 간단히 얘기해.”

“…….”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연락이 닿은 지훈의 말투는 더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회사에선 통 얼굴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우리가 끝이 나기는 했구나. 은수가 입가에 쓴 미소를 머금었다.

“지난주엔, 잘 들어갔어?”

“……어. 너는? 그, 너네 팀 신입이라는 남자가 데리고 가던데.”

“……지훈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그리고 네가 내 손을 그렇게 뿌리치던 것도.

다시 돌이켜보니 또 어이가 없어서, 지훈은 괜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정작 본인은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은데.

“기억 안 나나 보네.”

“……응. 그날 좀 많이 마셨었거든.”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니까.”

“……그러게. 그럴걸.”

알량한 반발심에 그런 몹쓸 오기 같은 건 부리지 말걸. 그랬다면 모든 게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텐데.

은수가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잘못된 선택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그가 알면 까무러칠 것이다. 결혼하기 싫어서 청혼을 파토 낸 다음 날,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게 되다니.

그녀는 솔직히 그날 저녁까지만 해도, 그와의 이별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라도 이제는, 이 관계를 더 이상 이어 나갈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내가 먼저 이런 식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할 말을 고르는 은수의 입가에 작은 주름이 졌다.

“미안해.”

그 말에 커피 잔을 집어 들던 지훈의 동작이 잠시 멈추었다. 지훈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뭐?”

“미안해, 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

“…….”

지금껏 은수를 만나 오면서, 이렇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건 좀, 뜻밖이었다. 평소 은수의 성격상 여전히 내가 뭘 잘못했냐며, 오히려 바락바락 대들 줄 알았는데.

지훈이 놀란 눈치를 보이는데도 은수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처음엔 솔직히 억울하더라.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나 좋다고 한 사람 받아 준 것밖엔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거든.”

“…….”

“근데 계속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억울할 게 없는 거더라. 내가 잘못한 거였어. 3년 전 지훈 씨를 처음 만나기로 결심했을 때,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 말이야.”

“…….”

“근데 조금 변명하자면 그때는, 지훈 씨와 이렇게 오래 사귈 줄도 몰랐고…… 사귄 지도 얼마 안 된 사람한테 초장부터 그런 얘길 하는 건 너무 성급하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랬어.”

“…….”

“그 대신 지훈 씨가 가끔씩 결혼 얘기를 꺼낼 때, 나는 결혼 생각 없다고 내내 말했었으니까, 그거면 충분한 줄 알았어. 우리한테 결혼은…… 그저 먼 얘기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근데.”

뜻밖의 고해성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지훈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느낀 은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치만 나중에 언젠가, 우리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면…… 그때는 내 맘도 바뀌지 않을까 싶었어. 지훈 씨와 함께라면 결혼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해서…… 나도 모르게 지훈 씨를 무작정 붙잡고 싶었나 봐. 진짜 이기적이지.”

“…….”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나, 지난 3년을 이렇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

은수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훈의 눈이 은수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 네 말대로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너는.”

“……미안해.”

“……그래서, 정말 이렇게 헤어지자고?”

……무슨 말이지? 우린 지난주에 진작 헤어진 게 아니었던가?

지훈의 말에 깜짝 놀란 은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헤어지자던 말,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진심이었어, 그때 그 순간만큼은.”

사실이었다. 지훈도 그땐 화가 정말 머리끝까지 났었다. 기껏 준비한 청혼을 단칼에 거절하는 여자가 너무나 기가 막혔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내고 갔던 거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3년을 사랑한 여자였다. 홧김에 이별 선고를 질러 버리긴 했지만, 그게 온전한 진심은 아니었다.

자신을 의식하는 그녀가 너무나 신경 쓰였다. 후회하게 만들고 싶어서 괜히 더 틱틱거리고, 그녀를 차갑게 대했다.

그래도 그 일이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적당한 때에 자신의 말을 사과하고 다시금 화해를 청해 볼 생각이었는데.

결혼 문제야 시간을 두고 그녀를 설득해 보면 될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날은 자신도 너무 충동적으로 그녀를 몰아붙이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지금, 아예 먼저 이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아쉽지도 않은 것처럼.

오늘 연락이 왔을 때 그녀가 먼저 굽혀 주려는 줄 알고 내심 반가워했던 자신이, 지훈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난 너랑 못 헤어져.”

“…….”

……오늘은 정말로 맘을 굳게 먹고 나온 거였는데, 이 남자마저 이렇게 나올 줄이야.

그의 말에 은수의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아니, 지훈 씨. 이젠 안 돼. 그럴 수 없어.”

“왜, 왜 안 되는데?”

“…….”

……내가 더 이상 당신에게 떳떳할 수 없으니까.

고작 원 나잇 따위가 뭐라고 사랑하는 남자를 저버리느냐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두고 다른 남자와 밤을 보냈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녀가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계속 지훈을 만난다면…… 그건 그토록 증오하던 ‘아빠’라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였다.

그건…… 도저히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그렇다고 그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라도 한다면, 매일 마주쳐야 하는 현재 때문에라도 그 관계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리 만무했다.

눈치 없이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은수는 말을 이었다.

“난 이제 지훈 씨를 당당하게 만날 수 없어. 만날 아닌 척, 몰래몰래……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어.”

“비밀로 만난 것 때문에 그래? 그건 나도 동의했던 거잖아.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어때서?”

“아냐, 그런 이유가 아니야.”

일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여 버린 걸까. 당신의 청혼을 거절한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을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이 모든 건, 이기적이었던 내가 안고 가야 하는 대가일지도…….

은수가 독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정말 미안해, 지훈 씨.”

“…….”

“……우리, 이쯤에서 그만두자.”

괴로워도, 슬퍼도.

나쁜 건 오로지 그녀 자신뿐이어야만 했다.

* * *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아니, 사실 완전한 제자리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따랐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상 궤도를 찾았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누구 하나 문제 삼는 부분이 없으니까.

시간은 정말이지 쏜살과도 같아서, 벌써 그때로부터 두 달 남짓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리고 은수는 여전히, 유능하고 똑똑한 ‘민 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다.

“참, 이번 신제품 출시 관련 보도 자료 어떻게 됐어요?”

“오늘부로 마감해서 언론사에 넘길 예정입니다.”

“그래요. 좀 있음 상부에서 압박 들어올 것 같으니까 최대한 빨리 부탁해요.”

“네, 팀장님.”

안경을 낀 채 서류를 휙휙 넘기던 은수는 문득, 제자리에서 내다보면 늘 눈에 들어왔던 익숙한 모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현재 씨는…… 어디, 갔나요?”

“예. 오전에 민희 씨랑 외근 나갔습니다. 오늘 한국일보 기자들이랑 미팅 있다던데요.”

“아, 그래요…….”

“뭐, 혹시 달리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현재 씨 들어오면 말씀드릴까요?”

“아니에요. 그만 나가서 일 보세요.”

서류를 받아 든 이 대리는 간결하게 “네, 팀장님.” 하고 대답한 뒤 팀장실을 나갔다.

그제야 안경을 옆에 벗어 놓은 은수는 피로한 눈썹 뼈와 미간, 콧대를 꾹꾹 눌렀다. 회사에선 일의 능률을 위해 주로 안경을 쓰는 편이었지만 본래 안경을 전혀 쓰지 않았던 그녀로서는 확실히 고역이었다.

책상 서랍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알에 묻은 얼룩을 천천히 닦아 내며, 은수는 현재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지훈을 마주하는 게 가장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사내 연애의 가장 큰 폐해가 그런 거니까. 그러나 엄연히 그는 다른 팀의 팀장이었고, 만나려고 작정하지 않는다면 마주칠 일이 극히 드물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있는 간부 회의만 참아 낸다면 괜찮았다.

지훈 또한 의식적으로 그를 피하려 드는 은수를 구태여 종용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은수의 결단이 바뀌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또한 철저히 비밀로 부쳐져 있던 그들의 관계에 꽤 지쳤었기 때문일 거라고 은수는 짐작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흘러가나 했는데.

도현재가 복병이었다.

모른 척하고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말은 했지만, 사실 은수는 내심 스스로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더군다나 현재가 제 말에 그리 단호하게 반기를 들 줄은 몰랐으니까. 이대로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를 더욱 더 사무적으로 대했다.

되도록이면 그를 독대하는 일은 없게 했고, 하다못해 보고서를 제출할 때에도 다른 사람을 통하도록 했다.

갖은 핑계를 대 가며 다른 사원을 통했기 때문에 그다지 큰 의심을 사지는 않았지만, 요 근래에는 팀 내에서도 암암리에 민은수 팀장과 도현재 사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도는 중인 듯했다.

부하 직원들에게 공적으로는 철저해도 사적으로는 다정한 은수가, 오직 현재에게만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 같은 게 영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건 심증일 뿐, 물증은 없었기 때문에 이 상태만 유지된다면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 같단 생각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회사 생활로 다져진 그녀의 감(感)으로 판단하자면.

물론 힘들었다. 유망한 인재란 생각에 눈여겨봐 왔던 사원이기에, 그리 대하는 은수의 마음이라고 편할 리 없었다.

처음엔 느끼지 못했는데, 은수는 요즘 들어 부쩍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비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종종 마주치는 눈빛에선 왠지 모를 생채기가 있는 듯도 했다. 꼭, 뭐랄까. 어미 잃은 강아지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눈? 뭔가 저가 그에게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뭐, 실제로 저질렀는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또 막상 일 문제로 짧은 대화를 나눌 때면 특유의 어른스럽고 진중한 목소리 때문인지 그저 덤덤한 것 같아서, 저가 잘못 생각했나 싶기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더 이상 실연의 아픔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힘들어하지 않는다기보다 ‘힘들어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껏 연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은 있었어도 원 나잇 같은 경험은 한 번도 없었던 은수에게 그 하룻밤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혼란이었다.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은─그게 결혼 때문에 헤어져 버린 전 연인에 대한 생각일지라도─ 더 이상 불가능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재에 대한 불편함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새롭게 떠오른 문제였다.

그의 얼굴을 볼 때면 자연스레 그날 밤의 열에 들뜬 그 얼굴이 연상되곤 했으니까. 얼마 나지 않는 기억 속에는 서로에게 뜨거운 숨을 내뱉는 그와 자신이 있었다.

그때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고 또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기도 했으니 이제 좀 뇌리에서 잊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기만 하는 기억은 짧고도 긴 그 시간 동안 신명나게 은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또 그 생각이네.

똑똑.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은수가 별안간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팀장님, 점심 드시러 안 가세요?”

“아, 네……. 어디로 가려구요?”

“요 앞에 청국장 집 새로 생겼대요. 다들 거기로 간다는데, 팀장님도 같이 가실래요?”

“청국장이요.”

흐음. 조금 뜬금없는 메뉴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네, 같이 가요.”

어떻게 해서든 이 지긋지긋한 생각의 뿌리를 잘라 내야 했다. 하루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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