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7. 초보 운전자의 실수 (2)
‘우리, 잤어요?’
제 말을 곱씹던 은수는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일어나 보니 나도 알몸, 저 남자도 알몸이었는데,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이상하지. 아무 이유 없이 쌍으로 발가벗진 않았을 것 아니야? 무슨 변태들도 아니고.’
은수는 속속 떠오르려고 하는 지난밤의 기억을 애써 억누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쳤지, 미친 거야.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다섯 살이나 어린 부하 직원이랑…….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현재 씨랑! 돌았어. 이 칠칠이, 팔푼이!
현재는 지난밤의 자신을 열심히 저주하고 있는 듯한 여자의 모습에 곤혹스러웠다.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모두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괜히 모셔가겠다 자원했던 것이며, 하고 많은 쉴 곳 중에 하필이면 모텔을 택했던 것, 중요한 순간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남자로서의 본능에…… 너무나도 충실했던 것 등등.
명색이 상관인지라 티도 제대로 못 내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여자가 안쓰러웠다.
그나마 정신이 든 상태였던 나도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데, 술에 취했던 사람은 오죽할까.
“저, 팀장님.”
“…….”
“……어젯밤 일, 기억……나세요?”
……나요. 너무 잘 나요. 그래서 쪽팔려 죽겠어요!
차라리 아무 기억도 없었으면 좋았으련만. 빌어먹을 머릿속에는 지난 밤 그가 아로새긴 잔상들이 선연했다.
대답 대신 표정을 통해 아우성을 내지르는 은수를 보며 현재는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은수가 한숨 섞인 탄식을 뱉었다. 이 난국을 어찌 헤쳐 가야 하나.
“……속은 괜찮으세요? 나가서 해장국이라도…….”
“…….”
해장국? 지금 이 상황에, 당신은 그게 넘어가겠어요?
이 와중에 저런 실없는 소리라니. 저 남자는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잠시 현재를 쳐다본 은수는 입을 다물었다. 한편으로는 괜히 자신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남자가 안쓰러워지는 중이었으니까.
이러한 결과는 분명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닐 것이었다. 적어도 평소 그녀가 봐왔던 도현재는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도저히 해장국 먹을 기분은 아니네요.”
“…….”
“일단 나는 좀 정리가 필요할 것 같거든요. 현재 씨도 그렇지 않아요?”
“……예.”
“오늘은 일단 이렇게 헤어지기로 하고, 주말 동안 잘 생각해 봐요.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
“그럼, 나 먼저 가 볼게요.”
혹시 현재가 다른 말이라도 덧붙일세라, 재빠르게 자기 할 말을 마친 은수는 핸드백을 챙기면서 혹시 놔둔 물건이 없는지 수선을 떨었다. 샤워도 하지 못한 몸이 찝찝했지만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채비를 마친 뒤 슥, 슥 슬리퍼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차게 걸어 나가던 은수는, 자신이 가고 나면 혼자 남을 현재가 맘에 걸려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현재 씨.”
“……네?”
“나…… 거의 다 기억나요. 그러니까 혼자 잘못한 것처럼 그렇게 주눅 들어 있진 마요.”
“…….”
그럼 내가 더 미안해지니까.
웃을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최대한 남자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인 은수는 그 길로 방을 나가 버렸다.
현재는 은수가 사라진 출구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은수가 완전히 자리를 떴음을 인지한 현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덜렁 침대에 누워 버렸다. 힘없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 끝에 미처 전해 주지 못한 숙취 해소제가 닿았다. 그것은 볼품없이 봉지 밖으로 덜렁 나와 있었다.
저거라도 드릴 걸 그랬나. 속 많이 쓰릴 텐데.
현재의 손이 은수가 누워 있었던 자리를 쓰다듬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얄궂게도 시트엔 아직도 온기가 살짝 남아 있었다.
다 식어 가는 온기마저 이렇게 애틋하게 느껴지면 어쩌지.
“……이제 어떡하냐.”
정말.
* * *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3일 남짓 되는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가 지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흠씬 두들겨 팼고, 애증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 따뜻한 눈빛으로 속삭이는 것이다. 당신은 멋진 여자라고.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무턱대고 입을 맞춘 건.
솔직히 그 입맞춤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냥, 그 순간에는 그러고 싶었다. 순전히 마음을 따라서 한 일이었으니까. 그 일에 관해선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 그와 눈을 제대로 맞추고 말할 자신은 없어서, 은수는 몸을 돌려 옥상 난간에 팔을 기대며 입을 떼었다.
“말했잖아요, 혼자 잘못한 것처럼 그러지 말라고. 팀장씩이나 돼서 술 먹고 제 몸도 못 추스른 건 난데…….”
“…….”
“내 잘못이에요. 내가 술만 안 취했으면 애당초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아닙니다. 어쨌든 제 잘못도 없지 않으니까요.”
남자는 제 말에 송구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린 은수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나저나 이걸 물어야 돼, 말아야 돼?
“근데…… 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그날 까먹고 못 물어봐서.”
“네, 그럼요.”
“우리, 그거는…… 썼죠?”
“……뭐 말씀이십니까?”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거라뇨?’ 하고 반문하는 그는 진정 모르는 눈치였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되지.
“그러니까. 하으, 참. 내가 진짜 이런 걸…….”
“…….”
미적미적 손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려다 만 은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말했다.
“우리…… 피임은 했냐구요. 콘돔.”
“아! 네, 그럼요! 당연히…….”
‘했죠…….’라는 말이 나오려다 현재의 입안으로 도로 먹혀들어갔다. 참담한 여자의 표정 때문에.
그래도 그 대답에 조금이나마 안심한 은수는 차들이 씽씽 지나가는 도로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주말 동안 내내 생각했던 말들을 늘어놓을 차례였다.
“간략하게 말할게요.”
“…….”
“이번 일은, 실수였어요. 사고였구요. 그러니까 현재 씨가 이렇게 무릎까지 꿇어 가면서 사과할 일인지 난 잘 모르겠어요. 결과적으로 따지면 우리 둘의 쌍방과실이고, 더 파고들면 내 책임이 훨씬 크니까.”
“…….”
“진심으로 미안해요. 하지만 앞으로는 사적으로 이렇게 아는 척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쿨하게 직장 동료, 팀장 대 사원의 관계로 돌아가요. 물론 예전과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자구요.”
말을 마친 은수가 고개를 돌려 현재를 바라보았다. 속으론 그도 이걸 바랐던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현재는 ‘노력하자’라는 대목에서,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를 통틀어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저도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요.”
“…….”
“죄송하지만 그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네?”
“이미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잖습니까. 모래성을 부숴 놓고 다시 세울 수도 없는 일이구요.”
생각보다 침착한 현재의 대답에 은수는 놀랐지만, 대답 않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훨씬 응대하기가 편했다.
사업 파트너를 대하듯, 은수는 사무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글쎄요. 난 우리가 물을 바닥에 엎질렀다고는 생각 안 해요. 굳이 표현하자면 다른 컵에 엎지른 것쯤 되지 않을까. 그건 제대로 된 컵에 다시 옮겨 담으면 되는 거고.”
“…….”
“그리고…… 애초부터 우리 사이가 성 같은 걸 세울 만큼 견고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
“아닌가요?”
물론 이미, 그냥 성도 아닌 만리장성을 쌓기는 했지만.
정확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어떤 미니 시리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녀 주인공이 원 나잇을 하는 장면에서 만리장성 얘기가 나오기에 그랬었다.
‘무슨 만리장성을 저렇게 하루 만에 쌓아. 이름만 만리장성이지, 완전 부실 공사 아냐?’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어쩜 이렇게 지금 내 상황과 딱 맞는지. 은수는 속으로 씁쓸하게 자조했다.
만리장성 따위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이 남자와 나 사이엔, 차라리 단단한 철옹성을 쌓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르지.
“…….”
냉정한 여자의 대답을 들은 현재는 역시나 팀장님답다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말이고, 가슴은 아프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와의 관계를 리셋시키고 싶은 거였다.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이었던 관계 속에서 이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 건, 탄탄대로를 걸어온 여자에게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게 분명했다.
은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다 기억나진 않아요. 그래도 내가 실수한 건 맞고, 어쨌든 부분부분 기억이 나는 걸 아니라고 거짓말하지는 않겠어요.”
“…….”
“현재 씨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때리기도 한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은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먼저, 그런 것도…… 진심으로 미안해요.”
‘먼저 그런 것’이란 아마도 입맞춤을 말하는 것이리라. 현재는 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가 다 미안하니까…… 우리, 이만 잊어요.”
“…….”
“그 일은 이쯤에서 묻어 두기로 하자구요. 난 현재 씨같이 능력 있는 사원, 잃고 싶지 않아요. 멀어지고 싶지도 않구요.”
“…….”
현재는 여전히 대답 없이 강렬한 눈빛만 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위축된 은수는 멈칫했다.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슬슬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만 동의한 걸로 알고 갈게요. 좀 이따 사무실에서 봐요.”
능력 있다는 소리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것도 아님 화를 내야 할지…….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옥상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서야 현재는 미처 그녀 앞에선 하지 못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는 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죠…….”
민은수 씨.
한편, 계단으로 빠져나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은 은수는 참았던 한숨을 토해 냈다.
“……휴.”
이 정도면 잘 말한 것일까?
일부러 제 마음보다 더 모질게 말한 것도 있었다. 사내에서, 그것도 같은 팀 내에서 동료와 엮인다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니까.
지훈과 사귀기 전, 그가 그녀를 끈질기게 쫓아다닐 때도 그랬다. 애초에 남자를 만날 생각도 없었지만 사내 연애라면 더더욱 끔찍했다. 그래서 온갖 핑계를 대 가며 그의 애정을 거부하던 그녀였다.
물론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더 이상 둘러댈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때는 간신히 그를 허락했지만.
상처받았을지도 모르는 현재가 마음에 걸려도, 지금 자신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아직 미처 청산하지 못한 제일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