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 음주 운전은 위험해 (2)
“…….”
“…….”
세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인 은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현재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현재는 이상한 승리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고작 이런 게 뭐라고, 금세 어깨에 힘이 들어간 자신이 우스웠다.
잠깐 큼큼거린 현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모셔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서 팀장님도 걱정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안전하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현재의 말에도, 지훈의 눈빛은 여전히 은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차가운 그의 표정은 당장 의중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럼.”
대답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의 승낙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아까 전부터 이미 제가 책임지기로 했던 일이니까.
대충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고갯짓으로 인사를 마친 현재는 은수를 부축해 조심조심 가게를 나섰다.
“……허.”
은수가 뿌리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지훈은 잠시 동안 그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서 있었다.
가다 말고 그를 힐끗 돌아본 현재는 그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지기 전까지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뭐지?’
왠지 모르지만 신경 쓰이네.
둘이 대체 무슨 사이이기에 저런 식으로 이름까지 부르는 걸까. 예전부터 친해 보인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저 연차 비슷한 사내 동료라 그렇겠거니 했는데. 오늘 오전 일도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고…….
현재는 두 사람의 사이가 일반적인 관계는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지.
“팀장님, 댁이 정확히 어디세요?”
“…….”
“팀장님?”
택시라도 잡을 요량에 가까운 길가로 나온 현재는 은수를 살짝살짝 흔들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새 술에 취해 잠들었는지, 아니면 정신이 없어서인지 현재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걸 어쩐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그가 잠시 서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때 불편한 자세를 바꾸려는 듯 움직이던 은수의 다리가 힘이 빠지며 비틀거렸다.
“팀장님!”
바로 옆이 찻길이라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반사 작용에 의해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 주려 했던 그 순간, 현재는 그녀를 얼떨결에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아 버리고 말았다.
‘헉!’
술 냄새가 진득하게 풍기는 여자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고, 그 자리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순간 그녀만큼이나 놀란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게 도대체…….’
어느샌가 그의 팔은 은수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그녀의 가느다란 두 팔은 교차된 채 그의 목에 감겨 있었다. 바짝 다가와 있는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샴푸 향기가 훅 끼쳐 왔다. 마치 의도한 상황처럼 되어 버렸다.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찔했다.
입 안에 잔뜩 고인 침을 삼켜 내자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마치 지금 그의 멘탈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팀장이, 민은수가 제 품에 폭 안겨 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올 수가…….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그 상태 그대로 고개를 뒤로 쭉 빼어 그를 쳐다본 것은.
상황 파악이 덜 된 나머지 멍청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현재를 향해, 은수는 잔뜩 풀린 눈을 하고 헤실거렸다.
“고마워여…….”
뭐야, 이분. 지금 내가 누군지는 알고 고맙다고 하는 건가.
그 미소에 긴장하던 것도 잠시 잊었다. 어이도 없고 귀엽기도 해서 픽 웃는데, 순간 현재는 그녀의 입가에 걸린 천진한 미소에서 돌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거 왠지 좀, 아까랑 상태가 비슷한 것 같은ㄷ…….
쪽!
생경하면서도 민망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입술이 그의 볼에 붉은 흔적을 남기고 떨어진 순간,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던 그의 사고 회로가 일순 정지했다.
온몸이 감전당한 듯 굳어 버린 것이었다.
마치 그녀가 그의 맘에 있는 스위치를 탁, 하고 켜기라도 한 것처럼.
* * *
“으음……”
속눈썹이 몇 번 움찔하고, 눈꺼풀이 말려 올라가며 얇은 쌍꺼풀이 지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스르륵 감겼다.
은수는 눈을 감은 채 습관처럼 왼쪽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시계 대신에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원체 프로 직장인이다 보니, 따로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보통은 출근 시간에 맞춰 체내 알람이 발동하곤 하는 은수였다. 그런데 오늘은…… 의식을 차리자마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뻑적지근하게 올라왔다.
게다가 아무리 옆을 더듬거려 봐도 평소처럼 손에 집히는 게 없었다. 휴대폰이든, 안경집이든 뭐라도 잡혀야 하는 게 맞는데.
아씨, 뭐야.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스로 눈을 뜬 은수는 희끄무레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우리 집 천장이 원래 저렇게 생겼던가? 저렇게 큰 등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뭐가 이렇게 어두워? 분명 아침일 텐데.’
늘 무심코 보아 넘겼던 집 천장의 디테일을 떠올리던 은수는 불쑥,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간밤의 흐릿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도미노 넘어가듯 쏟아졌다. 순식간에 온몸의 감각이 불타올랐고, 그러고 나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현재 알몸 상태라는 것을. 그리고 맨 살갗에 닿아 오는 이불의 느낌은…… 제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푹신하고 묵직하다는 것도.
순간 은수는 급강하하는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학창 시절 가끔 지각을 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다. 너무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는데, 뭔가 허전하면서 불안한 느낌. 왜지? 왜 이런 느낌이지?
하지만 은수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느낌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오른쪽에는 낯선 남자의 널찍한 등짝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엄마!!!”
이, 이게 누구야!
소스라치게 놀란 은수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그런데 곧 이상야릇한 느낌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어, 잠시만. 뭔가 썰렁한데?
……맞아. 나 지금 알몸이잖아!
“미쳤어, 미쳤어…….”
자신의 헐벗은 몸뚱이를 내려다본 은수는 다급히 몸을 가릴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댔다.
급한 대로 대충 팔을 뻗어 뒤에 있는 벽을 훑으니, 옷걸이에 걸린 가운이 손에 잡혔다. 은수는 가운을 잽싸게 걸쳐 얼른 몸을 동동 싸맸다.
반면 은수가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에도, 남자의 등짝은 여전히 잠에 취해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걸까.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왱왱 울렸다. 은수는 팽팽 돌아가고 있는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하려 애썼다.
‘대체 누구야, 저게?’
대관절 내가 누구랑 이러쿵저러쿵해서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거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치한일까 싶어 침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래도 32년을 한 치 부끄럼 없이 자랑스럽게 살아왔다. 아무리 궂은 일이 있었기로서니, 이렇게 한순간에 인생이 막장으로 치달을 리가 없었다.
대충 술에 취했던 기억은 난다. 하지만 저를 누가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오로지 박 과장의 얼굴뿐.
설마하면서도 선뜻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무서워서, 은수는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섰다. 숨 막히는 고요. 그 속에서 은수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또렷했다.
그렇게 잠시 뒤, 꿋꿋이 모로 누워 있던 남자가 마침내 잠결에 몸을 뒤척이더니 뒤로 돌았다.
남자답지 않게 뽀얀 얼굴,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 오뚝하게 잘 빠진 코. 비록 주변에 푸릇한 수염이 약간 돋아나기는 했지만, 여자의 것 못지않게 붉고 통통한 입술.
은수는 곧 그 남자가,
“……도현재 씨?”
자신이 아껴 마지않는 부하 직원 ‘도현재’라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야 말았다.
* * *
비명 소리에도 별 반응이 없던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도현재 씨?’ 하고 작게 묻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마치 제 이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두 개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고, 둘은 너 나 할 것 없이 옷부터 먼저 챙겨 입었다.
매무새를 정돈한 후에야 두 사람은 협상 테이블에 대치하듯 마주 앉았다. 은수는 탁자에 딸린 의자에, 현재는 침대에.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가 주워 온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은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맘을 가라앉혔다.
솔직히 상황 판단은 이미 다 되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진상을 밝혀야 할 때였다.
은수는 남자의 등을 처음 목격했을 때부터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
“우리…….”
“…….”
“……잤어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대답을 않던 남자가, 갑자기 죄 지은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는 것처럼 시선을 맥없이 떨어뜨렸다.
“……예.”
그를 본 은수의 표정이 샐쭉하게 변했다. 애매하네. 혹시, 내 질문을 잘못 이해한 건가?
은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늉까지 더해 가며 재차 물었다. 질문을 좀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냥 잠…… 이렇게 자는 거 말구요.”
“…….”
“내 말은…… 그거, 그거 했냐구요.”
사실 그것은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나이를 감안했을 때 순진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스물일곱의 대한 건아 도현재는 그런 시늉 없이도 ‘잔다’의 의미를 아주 잘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
민망함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현재는 별수 없이 예, 하고 대답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
“…….”
방 안엔 잠시 동안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까딱하다간 누구 하나는 당장이라도 숨을 못 쉬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들리는 건 밖에서 전해져 오는 소음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암막으로 가려진 창문 덕에 개미 소리처럼 들렸다. 저러니 방에 빛이 하나도 안 들었지. 은수의 낮은 한숨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잔뜩 풀이 죽은 현재의 눈이 저도 모르게 은수를 향했다. 술기운만 없을 뿐, 그녀의 모습은 어젯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때로부터 고작 몇 시간이나 흘렀다고, 열에 들뜬 공기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그새 이렇게 차갑게 식어 버렸단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현재도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헝클어진 머리로 제 앞에 앉아 있는 은수를 보자, 그 모습에 어젯밤 그녀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겹쳐졌다.
미처 지워지지 않은 강렬한 기억은 풍선처럼 현재의 머릿속을 잔뜩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