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 음주 운전은 위험해 (1)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란 은수의 어깨가 자그맣게 들썩였다. 특유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고했어요, 민 팀장.”
“…….”
“적당히 마시고 가요.”
생각지 못하게 다가온 불시의 속삭임 탓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만큼 반발심이 올라왔다.
참나. 남이사, 내가 술을 마시건 말건 지가 무슨 상관?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지훈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당분간은 저 남자를 정말 보고 싶지 않은데.
은수는 신경질적으로 물 한 잔을 들이켠 뒤 고기를 입 안에 쑤셔 넣고 자근자근 씹었다. 그게 마치 지훈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은수를 전혀 모르는 것 같은 그는 이제 2팀 테이블 상석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여 사원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있었다.
솔직히 화가 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하루아침에 아무렇지 않게 될 수가 있지? 정작 청혼을 한 건 자기면서. 왜, 어째서 나만 이렇게 우스운 꼴이 된 거냐고.
그리고! 방금 전 그건 뭐야?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지가 적당히 마시라고 하면 내가 곧이곧대로 듣기라도 할까 봐? 진짜 사람 멕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지.
지훈을 노려보는 은수의 눈빛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팀장님,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님 나 보라고 일부러 저러나. 보란 듯이? 나 같은 거 없어도 자긴 아무렇지 않다, 뭐 이런 거?
“팀장님?”
“네, 주세요.”
“……예?”
“달라구요. 한 번 더 건배해요.”
소주잔을 힘껏 움켜쥔 은수의 눈에서 형체 없는 불꽃이 튀었다.
그래, 좋다 이거야. 너도 어디 한번 봐라. 안 그래도 기분 거지같은 날인데 잘됐네.
“…….”
갑자기 이게 웬.
당연히 거절하리라 생각하고 예의상 물어본 것인데, 오히려 건배를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하는 팀장이 낯설어 이 대리는 눈을 끔뻑거렸다.
다소 얼떨떨하기는 했지만, 먼저 따라 달라고 잔을 드는 적극성까지 보이는 탓에 그는 조심조심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됐어요. 이제 짠 해요, 짠.”
짠 하자고 해 놓고는 짠을 외칠 새도 없이 잔을 부딪치더니, 곧장 입 안으로 털어 넣는 폼이 어째 예사롭지 않았다.
“캬아.”
티 나게 소리까지 내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지훈이 슬쩍 저에게 시선을 두는 것이 느껴졌다. 은수는 보란 듯 텅 빈 소주잔을 테이블 위로 탕 내려놓았다. 차갑고도 뜨거운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기분 전환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어차피 하루 종일 최악의 기분이었던 터라, 그보다 더 밑바닥으로 꺼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평소랑 다르게 잘 마셔서 좋기는 하다만, 왜 불안할까.
옆에 앉은 박 과장도 의외라는 눈으로 은수를 살폈다. 오랜 시간 함께 일했지만 팀장의 이런 모습을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저, 팀장님.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오늘 몸도 안 좋다고 그러셨으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캬, 오늘따라 술맛이 다네요. 이게 왜 달다고 하는 건지 이제 알겠네. 더 줘요.”
“예?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이참에 그놈의 술맛이란 게 뭔지 나도 좀 알자구요. 빨리 줘요, 빨리.”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 일이 날 것 같은데.
부어라 마셔라 하는 팀원들을 뒤로하고, 이 대리와 박 과장 사이에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하는 눈빛이 오갔다.
* * *
“현재 씨, 저랑도 한잔해요!”
민희가 애교스러운 말투로 술잔을 내밀었다. 먼저 내미는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현재도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자신의 잔을 들었다.
“아, 예.”
그러나 건배 뒤, 미소를 지으며 입술만 살짝 축인 그는 곧바로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앞쪽을 살폈다. 아무래도 지금은 술을 마실 타이밍이 아니었다. 술 핑계로 현재와 대화를 좀 나눠 보려던 민희는 아쉬운 듯 입술을 다문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그것을 의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팔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첫 술자리는 아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입 사원들을 맞이하는 첫 환영회였다. 생각보다 더욱 화기애애한 팀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대학생 시절부터 들어오고 싶었던 선망의 기업. 이곳에서 처음으로 일을 배우게 된 것이 자랑스러웠고, 선배들 또한 존경스러웠다. 그중에서도 제일 존경스러웠던 선배는,
“팀장님. 팀장님! 정신이 좀 드세요?”
“…….”
바로 저 민은수 팀장이었다. 비록 지금은 어찌나 술을 퍼마셨는지, 벽에 기대 앉아 정신을 못 차린 채 해롱거리고 있지만. 현재에게서 걱정 담긴 신음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스물셋에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바로 이곳에 입사해, 불과 일 년 전 서른하나의 나이로 최연소 팀장이 된 재원이라고 했다. 사실 현재는 입사 전, 마케팅 1팀 팀장이 승진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미리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 직급을 단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이가 좀 있는 남자 선배이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본인을 팀장이라 소개하는 그녀를 보고 현재는 깜짝 놀랐다.
기껏해야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저 여자가 팀장이라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실제로 사무실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는, 함께 입사한 동기가 아닌가 하고 긴가민가해 했을 정도니까.
그러나 그녀가 최연소 팀장을 괜히 단 게 아니라는 걸, 며칠만 함께 일해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다소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제 일은 소홀히 하지 않고, 팀원들을 조용히 잘 챙기며 독려했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말투에는 왠지 모를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저를 향해 웃어 줄 때면 마치 날개를 잃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녀 같아 보였다.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마치 아이돌 가수를 영접한 팬과 같은 마음으로, 현재는 남몰래 민은수 팀장의 ‘덕질’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평생 동안 직장에 다니며 공부하셨던 어머니의 영향인지, 현재는 자기 일을 열심히, 잘하는 여자를 보면 저도 모르게 끌리곤 했다. 물론 그건 이성적인 끌림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굳이 표현할 단어를 찾자면, ‘동경’이었다.
일하다가도 그녀의 모습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성별을 떠나 닮고 싶은 사람. 매사에 야무지고 철두철미한 사람. 선망의 대상이자 롤 모델.
현재에게 인식된 민은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팀장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괜찮으세요?”
“……응, 응. 신경, 쓰지 말고 가여…….”
“아유, 그러게 누가 그렇게 덮어 놓고 드시래요? 안 그러시던 분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누가 좀 모셔다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술을 잘 못한다던 그녀는 오늘 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셔 댔다. 워낙 절제를 잘해서 술은 못해도 끝까지 술자리에 남아 팀원들을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했던 그녀였는데.
급기야는 오래 함께 일한 팀원들도 처음 본다는 주사를 시전하기까지 했다.
“승연 언니~ 아, 왜 자꾸 피해여. 빨리 일루 와여어!”
술은 취해도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은 남아 있는 건지, 혀가 꼬여 가면서도 존댓말로 사람을 유인하더니,
쪽!
또 한 번 쪽!
“흐흐흐……. 내가아, 좋아하는 거 알져, 언니이?”
“어우, 팀장님 왜 이래 진짜! 정신 차려요!”
부하 직원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나이가 더 있기 때문에 깍듯하게 대하던 박 과장에게 뽀뽀를 마구 날려 대는 것이 아닌가. 혀 짧은 소리로 언니, 언니 하면서.
그래도 남직원은 제외하고, 그나마 적절한 상대를 골라서 뽀뽀를 하는 게 다행이었다.
“팀장님 술버릇이 뽀뽀하는 걸 줄 누가 알았겠어.”
“놀랠 노자다, 정말.”
다행히 이제 은수는 더 이상 뽀뽀를 하지는 않았지만, 힘없이 축 처진 채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현재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은수 쪽을 쳐다보았다. 흐리멍덩한 눈을 내리깐 채 벽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여자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왜 저렇게 마신 걸까.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그러는 사이 나머지 팀원들은 2차를 가기 전, 누가 은수를 데리고 갈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팀장님이랑 집 같은 방향인 사람 누구 있었지? 성동구.”
“어…… 성현 씨랑. 참, 민희 씨도 그 근방이었던 것 같은데.”
“성현 씨는 벌써 2차 잡는다고 나갔고. 민희 씨는 오늘 주인공인데 어쩌나.”
“그러게요. 어떡하지?”
“제가 가겠습니다.”
현재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잠시의 주저도 없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사람이 데리고 가면 2차에 가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또, 무슨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누굴 믿고 맡겨. 그럴 바에는 약간 수고스러워도 제가 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가 손을 들자,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민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현재 씨가요?”
“아, 맞다. 팀장님이 저번에 현재 씨 카풀도 해 주시고 그랬지?”
“에이, 근데 현재 씨도 오늘 주인공이잖아. 섭섭해서 어떡해.”
“다음엔 저도 꼭 2차 가겠습니다. 오늘은 상황이 이래서 할 수 없네요.”
“음. 그래, 그럼. 수고스럽더라도 현재 씨가 고생 좀 해 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 그럼…… 저도 같이 갈까요?”
“민희 씨는 또 무슨 소리야. 주인공들이 자꾸 빠지려고. 그러면 현재 씨, 우리는 먼저 갈게.”
“네. 제가 안전히 모시고 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 2차 가실 분들 얼른 가세요.”
그 와중에도 은수는 팀장으로서 계산 챙길 생각을 하는 건지, 주섬주섬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이 대리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참 직업의식 투철한 분이시네. 그녀를 어떻게 데려가야 할까 막막하면서도,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나둘, 팀원들이 2차를 가기 위해 자리를 뜨자 가게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심기일전한 현재는 여전히 벽에 기대어 있는 은수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제는 정말로 그녀를 데려가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팀장님.”
“……네에?”
“이제 가셔야죠.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네에.”
지금 그녀가 치명적으로 귀엽다는 것.
서른둘 먹은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 있지.
알코올 때문인지 반응 속도가 평소보다 매우 느리다. 평상시의 그녀와 대비가 되는 모습이어서 그런지 그 반향이 더욱 심했다. 이렇게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의외였다. 하지만 덕분에 평소 팀장이라는 직급 탓에 어렵게만 느껴지던 그녀가 부쩍 친근하게 다가왔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번 되풀이해 묻자, 은수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수의 팔을 제 목에 감은 현재는 천천히 그녀를 일으켰다. 그때였다.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서지훈 팀장의 손이 은수와 현재 사이로 불현듯 들어왔다. 갑작스런 전개에 당황한 현재가 은수의 몸을 꽉 붙잡았다.
“서 팀장님?”
“내가 데려갈게요. 은수야, 정신 좀 차려 봐. 응?”
은수야?
누군가 그녀를 저렇게 친근하게 호칭하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현재는 왠지 모를 위화감에 은수를 꼭 잡은 채로 멀뚱멀뚱 지훈을 쳐다보았다.
꼼짝 않는 은수와 현재의 반응에 답답해진 지훈은 의식 없는 은수의 팔을 현재에게서 떼어내려 성마르게 손을 뻗었다.
“으으응!”
그런데 그 순간 축 처져 있던 은수가 무슨 힘이 났는지, 판독 불가능한 소리와 함께 지훈의 손을 뿌리쳤다. 두 남자는 은수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