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3. 비혼주의자의 설움 (3)
“어,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익숙한 호칭에, 각자의 부서에서 ‘팀장’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서 팀장님도 안녕하십니까.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마케팅 1팀의 남자 신입, 도현재였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이 사람을 만날 게 뭐람. 팀 직속 후배의 등장에 은수는 얼른 표정을 고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잠깐 바람 좀 쐰다구요……. 현재 씨는요?”
“저는 잠깐 아래층에요.”
“아아……. 사무실 가는 길이죠? 얼른 타요, 같이 들어가게.”
“예, 팀장님.”
은수가 살짝 옆으로 비켜서자, 현재가 은수와 지훈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다시 문이 스르르 닫히고, 어색한 침묵이 그들을 타고 흘렀다.
작게 헛기침을 내뱉은 현재는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는 채로 슬쩍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평소 사이가 좋아 보이던 두 팀장의 분위기가 이상하리만큼 냉랭해 보인다. 왠지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되어 버린 느낌.
현재가 괜히 허공을 올려다보는 사이, 오른쪽에 선 은수에게서 각 잡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던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기로 하죠.”
“이미 다 끝난 얘기인 걸로 아는데요.”
“그건 서 팀장님의 일방적인 생각 아닌가요?”
때마침, 목적지에 도달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은수의 은근한 일갈에도 지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먼저 나섰다.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좇던 은수는 어이없다는 듯 허, 하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뭔가 이상한데.
그녀의 기색을 슬쩍 살핀 현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내리십니까?”
“……내려야죠.”
이를 악문 은수가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 남자는 둘째 치고, 이 사람이 무슨 죄겠어.
은수는 ‘열림’ 버튼을 꾹 누르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현재도 재빠르게 그녀를 뒤따랐다.
“저, 팀장님.”
“네?”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맑고 큰 눈이 그를 무심코 쳐다보았다.
맘 같아선 두 분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묻고 싶었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그렇게 물을 수가 없었다.
“……아, 아닙니다.”
대신, 아쉬운 대로 그는 아까 전 그녀를 만나면 꼭 해 보려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오늘 회식, 가실 거죠?”
“그럼요. 오늘 신입 사원 환영회잖아요. 현재 씨 환영해 줘야죠.”
신입 사원인 그가 팀에 합류한 지도 벌써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스물일곱. 팀 내의 젊은 피인 그는 그녀가 최근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사원이었다.
사실 처음엔 그의 업무 능력보다는 외모에 먼저 눈길이 갔다. 워낙 훤칠하고 잘생겨서. 그래서 내심 걱정스럽기도 했다. 보통 업무 능력은 외모와 반비례하는 걸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러나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시킨 일을 무던히 잘 처리하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 은근히 마음이 기울었다. 일 잘하는 후배는 남녀를 불문하고 예뻐해 주고 싶었다. 그래야 사기가 진작되고 일도 더 잘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선배님들이 팀장님 술 잘 못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보기보다 이렇게 싹싹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의외였다. 업무상 대화 외엔 내게 말도 통 못 붙이더니. 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 대리가 그러죠? 나 술 잘 못한다고 만날 구박하거든요.”
“……정 못 드시겠으면 제게 주십시오. 흑기사 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좀 나랑 친해지기로 작정을 한 건가. 이런 말까지 하네.
술자리는 늘 비슷하지만 엄연히 오늘은 신입 사원 환영회였다. 나보다는 본인을 더 걱정해야 할 텐데. 한 치 앞을 모르는 것 같은 신입이 귀여워서 은수는 싱긋 웃었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얼른 들어가요.”
현재를 먼저 사무실로 들여보내고, 무의식적으로 커피 컵에서 흘러내린 물방울들을 손가락으로 뭉개던 은수가 홀로 중얼거렸다.
‘그래,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이렇게 있다 보면 자꾸만 지훈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벗어나야 한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중요한 시기인데 고작 이런 걸로 일에 영향을 받을 순 없었다.
얼른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해. 그런 차원이라면 신입 사원 환영회도 썩 나쁜 대안은 아니겠지.
기왕 가기로 한 것, 정말 제대로 놀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깟 생각들은 차차 잊어 보자고, 은수는 맘을 굳게 다잡았다.
그러나 그 다짐이 또 하나의 화근을 불러올 줄,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 * *
“자, 모두들 잔 채우시고. 첫 잔은 무조건 원 샷인 거 알죠?”
“아니에요. 못 마시겠으면 조금만 마셔요.”
“에이, 팀장님! 맥 빠지게 왜 이러십니까. 첫 잔은 당연히 원 샷이죠!”
혹시나 무리하다 몸 상할까, 팀원들을 생각해 친 은수의 쉴드를 이 대리는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그건 자고로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래나 뭐라나.
분위기 메이커이자 소문난 주당답게 이 대리는 오늘도 신입들 중 자신의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할 것이 분명했다. 또 어떤 어린 양이 잘못 걸려서 된통 고생을 하려는지.
은수는 벌써부터 누군지 모를 그 상대가 불쌍해졌다.
“아, 알았어요. 그럼 알아서 적당히들 마셔요.”
팀원들이 저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잔을 채웠고, 픽 웃은 은수도 분위기에 동조해 술잔을 손에 들었다.
“자자, 다 손에 들었죠? 건배하기 전에, 팀장님 한 말씀 하세요.”
팀장직을 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이런 시간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박 과장의 성화에 은수는 잠시 쭈뼛거리다 입을 떼었다.
“어, 음. 뭐, 거창하게 말할 건 없고……. 뻔한 말이지만,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탔어요. 저는 잘하는 사람도 좋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늘 열정적으로 임하시길 바라요. 앞으로도 우리 잘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 신입 사원들, 민희 씨, 유라 씨, 그리고 현재 씨, 태섭 씨. 우리 회사, 그중에서 특히 우리 팀에 온 걸 정말로 환영합니다. 됐죠?”
“예예. 자, 식상하지만 마음에는 꼭 새겨야 하는 멘트! 잘 들었습니다.”
반면 이 대리의 농담에는 이제 익숙해져서, 은수가 장난스럽게 그를 흘겼다.
“……여기서 뭘 더 참신하게 하라구요. 현재 씨랑 태섭 씨 이름은 쏙 빼놓고, ‘민희 씨랑 유라 씨 환영회’만 있다고 못 박으시던 분이 뭐가 그렇게 당당하세요?”
“아니, 제,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팀장님!”
“정말입니까? 야, 이거 실망인데요, 대리님.”
“아니야, 태섭 씨! 오해하지 마. 장난이야, 장난. 유라 씨, 장난이야.”
“참고로 팀장인 저는 여러분 모두를 똑같이 사랑합니다.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죠.”
“예? ……아, 아니야. 저 진짜 그런 사람 아닙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 사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습니다. 진짜예요.”
한껏 당황한 척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 대리 덕에 테이블이 웃음소리로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그녀도 잠시 복잡한 생각은 잊은 채 무리에 편승해 유쾌하게 웃었다. 일찍 갈 마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기를 잘한 것 같았다.
“태섭 씨, 현재 씨. 내가 딱 둘만 따로 밥 사 준 거 알잖아, 응? 하하하, 팀장님 거 오늘 장난이 좀 심하시네. 자, 이쯤 하고 건배부터 합시다. 모두 잔 높이 드시고, 라프레즈 마케팅 1팀을, 위하여!”
“위하여!”
우렁찬 구호 소리가 가게 안을 쩌렁하게 울렸다.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잔을 부딪치고, 소주 한 잔을 한 번에 겨우 삼킨 은수는 크으, 하며 인상을 썼다.
으유, 참. 그녀를 뻔히 알고 있는 박 과장이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은수에게 건넸다.
“팀장님, 오늘도 안주빨만 세우실 거면 고기 값 더 내고 가세요.”
“아, 진짜. 또 그 소리예요? 나는 대신 그만큼 술을 안 마시잖아요.”
“차라리 술을 더 드세요, 그럼. 아무도 안 말리니까.”
“으, 싫어요. 이 쓰기만 한 걸 뭐 좋다고 그렇게들 마시는지 몰라.”
회식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은수의 푸념. 자칭 타칭 ‘애주가’인 이 대리는 늘 그렇듯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팀장님,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아직도 술맛을 모르신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 술이라는 게, 늘 쓰기만 한 건 아니라니까요. 당연히 쓰지만, 가끔은 요게 달아요, 달아.”
“이게요?”
소주잔을 들여다보며 은수가 코웃음 쳤다. 이제껏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가피하게 수없이 많은 술을 마셔 왔지만, 이 알코올성 액체가 달콤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산증인인데, 무슨.
그러나 멀리 앉아 있던 김 차장마저 이 대리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기분 좋을 때나, 아니면 정반대로 기분이 최악일 때, 그럴 때는 이 술만 한 게 없죠. 진짜 달지.”
“그래요?”
“그럼, 그럼. 아니면 담배 한 대 딱~ 피우거나.”
“차장님! 아직도 안 끊으셨어요? 금연하신다고 한 지가 언젠데!”
“……아, 끊었는데! 가끔은 좀 피울 수도 있잖아, 가끔.”
기분이 좋을 때나 기분이 최악일 때라. 은수가 삼겹살 한 점을 씹어 넘기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좀 최악이긴 하네.
“진짜 좀 끊으세요. 맨날 말로만……. 어? 근데 저기, 2팀 아니에요? 서 팀장님 같은데?”
……근데 이게 뭔 소리지?
열심히 배만 채우고 갈 요량으로 고기 한 점을 더 집고 있는데, 팀원들 간의 수다 사이로 그녀의 상념을 무참히 깨뜨리는 단어가 들려왔다.
“아, 맞다. 오늘 2팀도 회식한다는 거 같던데.”
“뭐야, 거기도 여기로 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 은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아니나 다를까, 지훈을 필두로 한 2팀 팀원들이 고기집 안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와는 어젯밤부터 내내 연락 두절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이런 자리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였다.
……아, 이제 좀 생각 안 나나 했더니 저 남자는 왜 또.
평온해져 있던 은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벌써 한잔하셨네요, 다들? 우리는 이제 시작인데.”
지훈은 어느새 1팀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와 서 있었다.
이거 대꾸를 해 줘야 돼, 말아야 돼. 짧은 시간 동안 갈등하던 은수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2팀도 오늘 회식인가 봐요?”
“네. 그렇게 됐네요.”
“아아, 그렇구나. 근데 왜 하필이면 여기로 오셨어요? 다른 곳도 많은데.”
“……우리는 오면 안 됩니까?”
그의 반문에 번뜩 날이 서 있었다.
그제야 은수는 팀장 간의 일상적인 대화치고는 말이 곱게 나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숨겨진 적의를 혹여 누가 알아채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잠시 당황해 갈 곳을 잃은 시선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현재의 시선과 정면으로 맞물렸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 그 찰나에 은수는 현재가 오늘 오전 둘의 상황을 목격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미처 그를 잊고 있었다. 지훈에게 골몰하느라. 그 순간 그녀는 멀리서 와 닿는 현재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신입은 이 상황을 특히 더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정신 차려. 지금 저 남자는 전 남친이 아니고, 그저 다른 팀 팀장일 뿐이야. 사무적으로 대해야 할 동료.’
은수는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고 대답했다.
“아뇨, 뭐. 우리가 전세 낸 것도 아닌데요. 그냥, 이런 우연도 다 있나 싶어서.”
그러나 그녀와 달리, 지훈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우리 팀 직원들이 여기가 싸고 맛있다고 해서요. 따라왔습니다.”
“……아, 그래요?”
“예. 많이 드시고 가세요.”
“……2팀도요.”
그렇게 대화가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런데, 말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것 같던 지훈의 눈길이 은수에게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그가 휘적휘적 다가와 커다란 손바닥으로 돌연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