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 비혼주의자의 설움 (2)
그는 잠시 은수의 얼굴을 확인하고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윽고 문이 닫혔고, 단둘만이 탄 엘리베이터 안의 찢어질 듯 팽팽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억지로 커피를 꿀꺽 삼켜 낸 은수는 그를 한번 곁눈질하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출근하세요?”
“네.”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네, 덕분에.”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회사에서는 늘 존댓말을 써 온 둘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분위기부터가 평소와는 달랐다. 두 사람의 말끝에 미세한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지훈의 무덤덤한 태도에 은수는 약이 올랐지만,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물기가 흘러내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세게 쥐었다.
“우리, 아직 할 얘기가 좀 남은 것 같은데요, 서 팀장님.”
“……무슨 얘기 말입니까?”
“몰라서 물으십니까?”
겨울바람처럼 매서운 은수의 말투에 그제야 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마주한 둘은 말없이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얄궂은 역사, 그 본격적인 시작은 3년 전이었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 그는 그녀에게 그저 대하기 힘든 선배였다. 당시 그는 잘생기고 유능한 직원으로 사내에서 유명했었고, 은수는 이제 막 사회 초년생 티를 벗은 햇병아리에 불과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일 잘하고 똑똑한 데다 어리기까지 한 은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끌어 주었고, 은수 또한 적극적으로 적응을 도와주는 선배가 고마웠던 나머지 그를 잘 따랐다.
물론 가진 능력이 워낙 특출했다 보니 고작 몇 개월 만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지만, 은수는 그 후로도 입사 초기 그에게서 받았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성을 꺼려하는 그녀가 그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게 된 건 모두 그 때문이었다.
간혹 그가 은수에게 흑심이 있는 것 아니냐며 수군대는 것을 듣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럴 때마다 황급히 손사래 치며 정정하곤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의 따뜻한 마음을 그런 쪽으로 매도하기도 싫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그런 폭탄이 떨어질 줄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은.
‘선배, 우리 이제 그만 만나야 될 것 같아요.’
‘왜?’
‘다들 오해하잖아요. 선배가 나한테 흑심 있다고.’
‘오해 아닌데.’
‘……네?’
‘나 너한테 흑심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이제 그만 사적인 만남을 자제하자고 말하려 했던 그날, 태연하게 흑심이 있다고 말하던 남자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어째, 지금 생각해 보니 참 구닥다리 멘트네. 그때도 실은 좀 구리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래도 그때 그녀에게는 그 말이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저 그런 남자였다면 몰라도, 그는 성별을 떠나 인간적으로 꽤 괜찮다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불도저 같은 남자를 막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그날을 시작으로 정말 끈질기게 구애를 해 댔고, 그에 못 이긴 그녀는 결국 삼년 전에야 겨우 그를 허락했다. 비록 연애 경험에 있어선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그들이었지만, 힘들게 시작한 만큼 남들처럼 맞춰 가기도 하고 투덕거리기도 하면서 나름 순탄한 연애를 이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발목을 잡은 건 따로 있었다.
‘은수야, 우리가 만약에 결혼을 하면 말이야.’
‘……갑자기 웬 결혼?’
‘왜, 결혼하기 싫어?’
‘응. 난 결혼 같은 거 안 해.’
‘……뭐야. 왜 안 해, 결혼을.’
‘예전부터 생각해 온 거야.’
그녀는 가끔 가다 결혼 얘기를 꺼내는 그에게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난 결혼 같은 미친 짓 안 할 거야. 평생 연애만 하다 골드미스로 늙어 죽어야지.
그러나 지훈은 그때마다 은수를 보며 코웃음 칠 뿐이었다.
‘너, 그러다가 나한테 결혼해 달라고 매달리지나 마.’
물론 그도 처음엔 심각하게 반응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내 은수의 말을 젊은 날의 객기쯤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으레 여자들이 이십대 때엔 결혼 생각 없다느니, 한국 남자와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느니 하다가도, 막상 삼십대를 넘기고 나면 자연스레 선도 보고 연애도 하는 것처럼. 그는 은수도 그런 여자들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은수는, 그 말을 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조금 갑작스럽겠지만…… 이제는 확실히 때가 된 것 같아.”
“…….”
“은수야, 나랑…… 결혼해 줘.”
어젯밤. 그는 그답지 않다 싶을 정도로 수줍게, 꽃다발과 반지를 쌍으로 그녀에게 디밀었다. 은수는 그것을 보고,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너무 놀라우면서도 뜻밖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청혼이라니.
그렇게 잠시 후, 왠지 모를 예감 탓일까. 기분 좋은 긴장감에 호를 그린 채 굳어 있던 지훈의 입꼬리가 슬며시 반대로 뒤집혔다.
“……대답 안 해 줘?”
이를 어떡하지. 잠시 머뭇거리던 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미안해, 지훈 씨. 난 결혼 못 해.”
“……어?”
“상대가 지훈 씨라고 해도…… 내 대답은 같아. 난 결혼 못 해. 아니, 안 할 거야.”
은수의 대답을 들은 지훈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 대신, 특유의 차가운 표정이 곧바로 떠올랐다.
“너, 그럼…… 설마 그 말이 다 진심이었어?”
“……응.”
난 때마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얘기했었는데…….
비교적 많은 연애를 했던 지훈과 달리, 은수는 이십대를 통틀어 짧은 연애 몇 번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가 물어보지 않았기에 답해 준 적도 없었지만, 그녀가 연애를 많이 하지 않았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시한 남자가 없어서? 사귈 시간이 없어서? 다 당치 않은 이유였다. 맘만 먹었으면 남자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고, 여유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했다.
왜냐.
‘난 절대 우리 엄마처럼은 안 살 거야.’
그건 어쩌면 좌우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엄마는 평생을 아빠밖에 모르고 산 사람이었다. 근방에서 최고로 인기가 많았던 아빠와 결혼하게 되어 꿈만 같았다던 엄마. 바보 같은 엄마는 평생 밖으로만 나도는 아빠를 알고도 모른 척 묵인하고 살았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포용되던 그 모든 것들.
어렸던 은수는 그런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한 사람만 보겠다는 믿음을 저버렸는데, 그놈의 사랑 따위가 대수인가 싶기도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나이가 찰 대로 찬 지금의 은수는 그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측은한 마음에 그때 엄마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건 불가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지 않으면 아빠는 엄마를 버렸을 테니까. 그럼 이 세상엔 엄마와 어렸던 자신, 단둘만이 외딴 섬처럼 남겨졌을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은수는 그런 엄마가 고까워도, 아무 말 없이 엄마의 곁에서 아빠가 앗아 간 행복을 채워 주었다.
물론 엄마가 바보짓을 그만두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엄마 같은 사람은 어차피 처음부터 갱생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아빠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하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감히 변할 수 있었을 리가.
그런데 은수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리도 속을 썩이던 아빠는 돌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조수석에서는…… 이름 모를 미모의 여자가 함께 발견되었다. 아빠와 손을 꼭 맞잡은 채로. 넌지시 그렇지 않을까 상상하는 것과, 제 눈으로 직접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걸 은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속이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님 도대체 뭣 때문인지, 그런 남편을 보내고도 엄마는 펑펑 울었다. 하지만 딸인 은수는 울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혹자는 못된 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최 슬프지가 않았던 걸 어떡하란 말인가.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면 시원했지. 그리고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못되기로 치면 질타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으니까.
‘아빠’라고 부르기도 싫은 남자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은수는 독하게 다짐했다.
‘엄마 같은 삶을 살 바에야 차라리 혼자 살다 늙어 죽자. 돈이나 왕창 벌어서 여행도 다니고, 인연이 닿으면 잘생긴 남자들 만나 가벼운 연애도 맘껏 하고, 보통 사람이라면 못 해 볼 것들도 몽땅 다 해 보고…… 그렇게 흥청망청 즐기며 잘 살자. 보란 듯이.’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한 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내로라하는 명문대에 입학했고, 조기 졸업에 수석까지 했다. 비록 흥청망청 즐기고 남자도 맘껏 만나며 살기로 다짐하기는 했지만, 그토록 바쁜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 연애란 사치와도 같았다. 결혼은 자연히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금기였고.
대학을 졸업하고 그 당시 촉망받는 중소기업이었던 이 회사에 들어온 지 올해로 9년. 은수는 마침내 작년, 서른하나의 나이로 마케팅 1팀 최연소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회사는 나날이 승승장구했다─은수는 분명 자신의 덕이라고 주장했다─.
애초 그녀가 세웠던 목표대로 누가 봐도 앞길이 창창한, 잘나고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골치 아플 일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 그럼, 진짜 혼자 살다 늙어 죽을 생각인 거야?”
“……응. 내가 늘 말했었잖아.”
“그럼, 그럼 난? 나랑은 왜 만난 건데?”
“그건…….”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무어라 말하려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거절의 이유를 묻는 그에게 차마 진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다들 그녀에게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를 향해 ‘그냥 연애만 할 생각이었어.’ 하고 말할 정도로 차가운 성격은 못 되었으니까. 실상 그리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다.
대답을 포기한 은수는 그저 쇠심줄 같은 스테이크를 꾹꾹 씹어 넘겼다.
그렇게 불편한 적막이 이어졌고, 내밀었던 꽃다발과 반지를 다시 거두어 간 뒤 홀로 감정을 삭이는 듯 보이던 지훈은 은수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정말, 나랑 결혼할 생각이 1퍼센트도 없어?”
“……응.”
“생각을 바꿀 마음도 전혀 없는 거고?”
“……아직까지는.”
“하.”
짧은 탄식을 뱉으며 지훈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마치 예정되었던 수순인 것처럼 바로 꽃다발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잔뜩 커다래진 눈으로, 은수는 지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지훈 씨……?”
“네 마음대로 해라. 우린 이제 끝이니까.”
마지막 말을 남긴 그는 그렇게 자리를 떠 버렸다.
원래 좀 다혈질적인 성미가 있기는 했지만, 결혼할 생각 없단 한마디에 이런 식으로 화를 내고 가 버릴 줄은…….
은수는 잠시 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기계처럼 고기를 질겅거렸다. 어느샌가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지훈이 자신을 보기 좋게 차 버려서도, 혼자 남은 자신이 비참해서도 아니었다. 반 이상이 넘게 남아 버린, 두 사람 몫의 음식 값을 계산하고 나오면서 은수는 계속해서 울었고, 속으로 되뇌었다. 난 그저 거의 손도 못 댄 음식들이 아까워서, 또 이리저리 흩어져 버린 꽃다발 뭉치가 불쌍해서 우는 거라고. 터무니없는 합리화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부터 회사에 출근하면서까지, 은수는 부은 눈으로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밤새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그리도 힘들었는데, 이 남자는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태연해질 수 있는 걸까.
비록 결혼할 생각까지는 없었어도 지훈을 향한 마음은 늘 진심이었다. 남들처럼 불같은 사랑을 한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물 흐르듯 잔잔했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인 감정은 쉬이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조용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제 마음도 변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졌었는데.
물론, 그가 그것을 기다려 줄 의무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와의 관계에 있어 굳이 잘못한 쪽을 따지자면 자신인데, 어쩐지 버림받은 것도 자신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마치, 엉망진창이 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바람에 직원을 성가시게 만들었던 그 꽃다발처럼.
평정심을 잃어버린 은수가 다시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그때,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