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 비혼주의자의 설움 (1)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따금씩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시험 날에 까먹고 컴퓨터 사인펜을 챙겨 가지 않는다거나, 냉장고에 리모컨을 넣어 놓고 찾는다거나, 전날 밤 회식을 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꼭두새벽에 차를 몰고 가다 음주 단속에 걸린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 뭐, 이 정도쯤은 누가 보더라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실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내가 저질러 버린 실수는?
은수는 자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알차게 살아왔다고 자부한 32년 인생 중에 이렇게 난처한 상황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
“당장 일어나요. 네?”
“…….”
남자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은수는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꼴이 퍽 결연했다.
이러고 있는 사람의 속도 말이 아닐 테지. 그녀가 남자와의 대화를 오늘까지 미룬 데는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날 그 상태로는 이성적인 대화가 절대 불가능했을 테니까.
짧고도 길었던 지난 주말 동안, 그녀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부단히 애를 썼다. 아마 이 남자도 그랬을 것이었다. 각자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만큼,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방금 전 그를 옥상으로 불러 낼 때까지만 해도.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는 이야기는커녕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듯 보였다. 그저 용서를 구하듯,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뿐.
아니다. 무릎을 꿇기 전에 한마디를 하기는 했지.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지만 일방적인 용서를 구하기엔, 나 또한 잘한 게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지금 이곳에 사람이 없는 게 어찌나 다행인지. 이상한 목격담이라도 퍼질까 싶어 노파심에 괜히 주위를 살피던 은수는 지그시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건 누군가 용서를 구하거나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단지 사고일 뿐이었다. 빨리 보험사에 넘겨 버리고 털어야 하는.
“진짜 일어나요. 설마 이러고 밤샐 거예요?”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지식해 마지않아 보이는 이 남자는 말리지만 않는다면 정말로 그럴 기세다. 아, 정말.
은수는 하는 수 없이 팔짱을 풀어내며 남자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자.”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스르륵 들었다. 레몬 빛 햇살의 파편이 여자의 머리칼 사이로 부서져 남자에게로 쏟아졌다.
눈이 부셔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어서일까. 남자의 커다란 눈이 잦게 깜빡거렸다. 그런 그를 외면하며, 은수는 제 손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안 잡아요?”
“…….”
“나 팔 아픈데요.”
은수의 손으로 시선을 옮긴 현재의 눈동자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도르륵 굴렀다. 그러더니 마침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또 우스운 게, 일어나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손을 놓는다. 마치 그녀의 손을 잠시라도 잡았던 것이 황송하다는 것처럼.
이보다 더한 짓도 다 해 버린 사이에 새삼스럽긴…….
자조적인 웃음이 은수의 입가에 걸렸다. 멋쩍은 듯 무릎을 탈탈 털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는 그녀의 속이 착잡했다.
낮은 헛기침을 뱉고 나서야, 그가 어색한 몸짓으로 은수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현재의 검은 눈동자에 은수의 모습이 거울마냥 빼곡히 들어찼다.
이제야 겨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티 없이 맑은 눈. 은수는 그 눈에서 욕망의 불길이 이글거리던 그날 밤의 그를 떠올렸다.
“…….”
희한했다. 그렇게 취했었는데도 기억만은 이리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은수는 스스로 저 눈빛에 홀렸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 리가 없으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아무런 이유 없이 재수가 없는 날이 오기도 하는데, 은수에게는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지난 주 금요일.
* * *
“참, 팀장님. 오늘 신입 사원 환영회 있는 거 잊지 않으셨죠?”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금요일이잖아요. 월요일 회의 때 그러자고 하셔 놓고.”
유려한 필체로 결재 사인을 하던 은수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이승환 대리는 그 이름에 걸맞게 어마무시한 동안의 소유자였다. 동안은 뇌까지 젊은 걸까. 쓸데없이 기억력까지 좋아요. 팀장으로서 그의 능력을 높이 사는 은수였지만, 반대로 그게 참 반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성능 좋은 두뇌가 그 정도 일을 기억 못 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 신입 사원 환영회는 무슨.
다년간의 사회생활로 인해 눈치 또한 두뇌 회전 속도만큼 빠른 이 대리는 은수의 낌새를 재빠르게 간파하고는 넌지시 물었다.
“설마…… 팀장님 빠지시게요?”
팀장인 자신이 그런 자리를 불참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로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정 빠지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실은 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러세요? 어쩌나. 그래도 오늘은 강민희 씨랑 윤유라 씨 첫 환영회라 팀장님이 빠지시면 좀 그럴 텐데.”
팀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은 그녀에게 늘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럴 때만큼은 제가 쓴 감투가 너무나도 싫었다. 이놈의 명색, 진짜.
‘그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에라…… 할 수 없지.’
잠시간의 고민 끝에 그녀에게서 체념의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그러면…… 1차만 갈게요. 미안하지만 2차는 이 대리가 좀 신경 써 줄 수 있겠어요?”
그래도 하나 안심인 것은, 마무리를 커버 쳐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내에서 공공연히 ‘예스맨’이라 불리는 그답게, 이 대리는 흔쾌히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팀장님.”
“고마워요. 나가 보세요.”
팀장실을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은수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까맣던 액정이 곧장 환해졌지만, 불과 몇 분 전 확인했을 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새 메시지라도 오진 않았을까 했는데. 신경질적으로 폰을 내려놓은 은수가 참담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오랜 기간을 사귀어도 헤어지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자그마치 삼년이었다. 삼년. 그 세월이면 서당 개도 풍월을 읊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 긴 시간을 함께 보내 놓고도, 어쩜 이리 단칼에 끝을 맺을 수 있단 말인가?
어젯밤, 그가 지었던 차가운 표정이 은수의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 아직까지도 맴맴 돌았다.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
지잉.
그때였다. 별안간 그녀의 폰이 책상 위에서 진동하며 부르르 떨렸다.
무의식중에 퍼뜩 놀란 그녀는 얼른 휴대폰을 들어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마미♥]
아, 뭐야. 엄마잖아. 그녀의 눈에 대번 실망감이 어렸다.
기다린 연락은 따로 있었지만, 엄마의 전화도 중요하긴 매한가지다. 한껏 들었던 기대감을 지워 낸 은수는 무심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은수야. 너 내일 집에 올 거지?]
그런데 받자마자 이게 무슨. 문득 이상함을 감지한 은수의 목소리가 싸해졌다.
“……왜.”
[왜긴 왜야. 내일 아빠 제삿날이잖아! 또 까먹었어?]
“……벌써 그날이야?”
머릿속으로 날짜를 셈해 보던 은수는 인상을 팍 썼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였던 것 같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려던 딱 그 무렵이었던 것 같으니.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날이면서 돌아오기는 드럽게 빨리 돌아오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만.’
하여간 엄마의 제사 참석 요구는 언제나 지긋지긋했다. 어차피 안 갈 것을 뻔히 알 텐데.
옛날에야 엄마 등쌀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채웠었다지만, 지금은 그럴 맘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 따위 날을 울며 겨자 먹기로 챙기는 건 몇 년 전까지 한 것으로 족했다.
[올 거지? 이번엔 좀 와. 응? 토요일이잖아.]
“내가 왜! 싫어. 챙길 거면 엄마 혼자 챙기라니까.”
[어휴. 넌 애가 왜 그렇게 매정해?]
“내가? 엄마가 지나치게 보살인 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래도 어떻게 몇 년 동안 한 번을 안 와. 그 한 번이 그렇게 싫어? 엄마가 맛있는 것도 많이 해 놓는다니까.]
“내가 제사를 안 갔지, 집을 안 갔어? 맛있는 거라고 해 봤자 죄다 그 인간 좋아하는 걸로만 만들 거면서, 무슨.”
[아니야! 이번엔 너 좋아하는 닭찜 할 거야. 해물탕도 하고.]
……이젠 하다하다 밥으로 꼬시네. 이런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엄마의 빤한 수를 짚은 은수의 얼굴이 새초롬해졌다.
“해 줄 거면 다른 때 해 줘. 내일은 절대 안 가.”
[……내일 아니면 안 해 줘.]
“그럼 말고. 나 어차피 바빠서 못 가.”
[내일 토요일이잖아. 휴일인데 뭐가 바빠?]
“직장인한테 휴일이 어딨어! 하여튼 못 가. 혼자 있다고 부실하게 먹지 말고, 엄마나 실컷 드셔. 응. 또 전화할게.”
통화를 끊으며 액정을 힐끗 확인한 은수가 폰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바빠서 못 간단 건 당연히 거짓말. 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 야근은 좀 시켜도 웬만하면 주5일 근무를 철저하게 지키는 회사니까.
그래도 둘러 대려면 할 수 없다. 혼자 있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내일만 날인 것도 아닌데. 다른 때 갔음 갔지, 내가 제사를 왜 가. 뭐 좋은 꼴 본다고.
뜻밖의 소식을 듣고 나니 그렇잖아도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더욱 밑바닥으로 처박혔다. 생각해 보면 실상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가치관 형성에 팔 할, 아니 구 할을 담당했던.
그 인간만, 그 나쁜 놈만 없었더라면! 내가 이런 식으로 비참할 일은 없었을 텐데.
나직한 한숨을 내쉰 은수의 눈길이 다시 고이 잠든 휴대폰으로 향했다.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었다.
* * *
계속해서 그 생각에 얽매여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바람도 쐴 겸 임시방편으로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얼른 올라 탄 은수가 커피 한 모금을 쭉 빨아 당기는데, 닫히는 문틈 사이로 익숙한 손 하나가 쑥 들어오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
“…….”
눈빛이 마주치고, 커피를 넘기려던 입술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향수 냄새가 끼쳐 오자 은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한편, 재수 없게 잘 빠진 상대의 얼굴에도 또한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서지훈. 마케팅 2팀 팀장이자, 어젯밤까지만 해도 은수의 연인이었던 남자. 그녀가 오전 내내 연락을 기다렸던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