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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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설이는 연애를 시작한 지 이제 막 100일이 넘은, 아주 파릇파릇한 커플이다.

그런데... 요즘 설이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 달라졌다.

“준혁아, 이거 먹어봐! 튀김옷이 바삭해서, 너가 좋아할 것 같은 맛이야!”

“...응.”

설이가 내 접시에 음식을 올려줬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다. 활발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나를 잘 챙겨주는, 귀여운 여자친구다.

그런데... 김준영을 대하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본래 설이는 김준영에게 굉장히 편하게, 그리고 서슴없이 굴었다. 남자친구인 나보다도, 김준영과 훨씬 가까운 사이로 보일 정도였다.

나와 설이는 20년이 넘도록 알고 지낸 소꿉친구 사이다.

설이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설이는 늘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설이도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를 가장 신뢰하고, 나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겨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벽은 존재했다. 당연하다. 어찌 됐건 우리는 결국 남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가족끼리도 벽이 존재하는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벽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이를테면... 나와 설이의 사이가 아무리 가깝더라도, 내가 매일 밤 설이를 대상으로 야한 상상을 하며 자위한다는 사실은 절대 밝히지 않는다.

그러한 벽은 공교롭게도, 연인이 되고 나서 조금 더 두꺼워졌다.

하지만 오히려 이건 기분 좋았다. 나를 그저 소꿉친구가 아니라, 남자로 생각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벽은 우리에게 ‘연애 감정’이라는, 간질간질한 긴장감을 선사해줬다.

‘하지만... 김준영은 아니었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김준영과 설이 사이에는 애초에 벽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둘은 마치 어린 남매가 서로의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듯, 정말 허울 없이 지냈다. 비정상적일 정도였다.

김준영이 설이의 가슴이 꼴린다며 주물럭거리면, 설이는 헤실거리며, 김준영의 가슴근육이 더 꼴린다며 놈의 유두를 간지럽혔다.

김준영이 브라를 달라고 하면, 투덜거리면서도 브라를 벗어줬다. 그리고 김준영은 브라에 코를 킁킁대고, 설이는 화내는 척을 하며 김준영의 팔을 찰싹 때렸다.

장난으로 자지를 잡아당기고, 장난으로 보지를 쓰다듬는다.

설이는 내게 아니라며 발뺌하지만... 설이의 처녀도, 항문도. 모두 김준영이 가져가버렸다. 장난으로.

“...”

...또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그만 생각하자.

아무튼, 그토록 가까웠던 둘인데, 최근 설이가 김준영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

설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붉히며 김준영의 접시에 수줍게 음식을 올려줬다. 내게 올려준 것과 같은 요리다.

“응? 아, 고마워.”

“으, 응...”

김준영이 고맙다고 하자, 설이가 눈을 내리깔고 배시시 웃는다. 설이 답지는 않지만 평소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너무 예쁜 미소다.

그래서 좆같다. 친구인 내게는 보여준 적 없는, 정말로 여성스러운 미소다.

‘왜... 저러는 거지?’

주먹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손에 쥐고 있던 쇠젓가락이 뼈를 눌러온다.

설이에게 있어, 나는 언제나 ‘친구’였다.

연인이 되고 벽이 약간 두꺼워져, 조금은 나를 남자로 보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생기긴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구에 훨씬 가까웠다. 20년의 소꿉친구 세월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설이가 김준영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완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소녀의 그것이었다.

‘좆같아...’

좆같다.

따져야 하나? 소리 질러야 하나?

따지면, 뭐라고 따지지? 얼굴 붉혔다고? 말도 안 된다. 그 지랄했다가, 설이에게 정색이나 안 당하면 다행 아닐까?

접시에 음식 올려줬다고? 이미 물고빨고 다 하는 거 지켜봐 온 마당에, 갑자기?

어떻게 해도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결국, 또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씨발...’

속이 울렁거린다.

대체 왜 저런 태도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같은 ‘장난’이 아니다. 설이의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저래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준혁아?”

“...어?”

설이가 나를 불렀다.

그 예쁜 얼굴에는 귀여운 장난기와 엷은 미소가 배시시 걸려있었다.

‘아...’

...진짜 예쁘다. 귀엽다.

방금까지 먹구름 낀 듯 먹먹했던 마음이 바로 풀려버릴 정도로 사랑스럽다.

‘...그래. 어찌 됐든 설이의 애인은 나야.’

몸은 놈에게 유린당했더라도, 그것은 설이에게 있어 오롯이 ‘장난’일 뿐이다.

그녀의 마음은 내게 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틀림없다.

“왜 불러?”

광대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히죽히죽 승천한다. 설이도 그런 나의 신난 모습을 보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마주 활짝 웃어줬다.

서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온다.

‘그래, 이게 사랑이지.’

불안에 떨리던 마음이 안정되고, 치유된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설이의 다리를 꼼지락대며 물었다.

“왜 불렀냐니까? 응?”

“흐히히, 간지러어!”

설이가 내 신발을 앙증맞게 툭툭 차며 앙탈을 부렸다.

잠깐 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꽁냥거리고 있자니, 설이가 테이블 밑에서 작고 기다란 상자를 꺼냈다.

“어?”

고급스러운 마감과 디자인의 보관함. 비싼 만년필이 오롯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케이스다.

당황했다. 그리고는 마음이 기분 좋게 달싹인다.

“이, 이거...”

“선물!”

아...

나와 설이는 경제적인 형편이 썩 좋지 못하다.

설이는 취직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고, 나는 알바를 다니는 백수다. 서로에게 비싼 선물을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척 봐도 가격깨나 나가 보이는 이런 선물이라니...

“오, 오늘 기념일도 아닌데...”

“응.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별 이유 없다는 듯, 그저 발랄한 대답. 설이답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는 어깨가 마구 올라갔다.

김준영을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병신 버러지 새끼. 봤냐? 이게 ‘마음’이라는 거다, 새끼야.

놈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덩달아 히죽거리고 있었지만... 알 바 아니다. 내게는 설이와의 지금 이 순간이 더 중요하다.

“흐히! 열어봐! 빨리!”

“으, 응...!”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상자로 가져갔다.

가볍다. 하지만 느껴지는 마음은 묵직하고 충만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흐히.”

임신테스트기가 들어 있었다.

두 줄이었다.

설이의 몸이 김준영에게 더럽혀져도, 나는 아직 설이의 애인이었다.

나는 설이의 손만 잡아본 게 고작이고, 김준영은 사실상 질내사정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다 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김준영이 설이의 남친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김준영과의 불장난은 설이에게 있어, 말 그대로 장난일 뿐이었다. 설이는 거기에 눈곱만큼의 성욕도, 진지함도 없다.

설이는 김준영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설이의 마음은 내게 있다. 몸은 놈에게 있지만, 설이는 아직도 내 애인이다.

사람이 장난으로 결혼하고, 장난으로 임신할 수는 없다. 그것은 훗날, 설이 마음의 소유자인 내가 할 일이다.

마지막에 설이의 옆에 서 있는 것은 나일 것이다. 그렇게 믿어왔다.

오로지 그 희망만을 품고 버텨왔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속이 울렁거린다.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을 하고 싶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흐히!”

설이가 내 표정을 보고 웃는다. 지금 난 무슨 표정이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설이는 내가 이 장난을 즐기고 있다고 믿는다. 언젠가부터 그래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들었다.

겉표면에 아직 물기가 맺혀있다. 사용 후, 오줌을 씻어낸 물기. 장난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 두 줄의 양성 표시만이 선명하다.

고개를 들어, 설이를 바라봤다. 설이의 옆에는 김준영이 있었다.

설이의 안에도... 김준영의 것이 있을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이야, 반응 죽이네.”

“흐히! 흐하항!”

김준영과 설이는 그런 나를 보고 낄낄댔다.

‘악몽이야...’

끔찍한 악몽이다. 아니, 악몽보다 끔찍하다. 악몽과는 달리, 이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나는 깨어날 수 없는 악몽에서 허우적대며,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어서, 설이의 입에서 전부 장난이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제발... 장난이라고 해줘.

“장난이야!”

“...어?”

뭐라고?

“흐히히! 흐하항!”

잘못... 들었나?

“장난... 이야? 지, 진짜로?”

“응! 당연히 장난이지!”

아...

악몽에서 깨어났다.

“흐, 흐으... 으흑...”

“어어, 쟤 운다.”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나는 설이와 김준영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한참이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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