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92. 4차원 장난꾸러기 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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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영은 나와 가장 마음이 잘 맞고, 가장 친한 친구다.]
[김준영은 참 착하고, 내게 흑심따위 없는 진짜 친구다.]
[김준영은 내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스킨십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준영과 장난치는 게 정말 재미있다.]
[김준영과 장난치고 싶다.]
[수정모드를 종료합니다.]
시야가 되돌아왔다.
“흐히히! 뭐야아, 새삼스럽게. 그럼, 나랑 연락 안 하려 했어?”
윤설이 실없게 웃는다.
이미 각별히 친한 사이인 내가 새삼스레 연락하고 지내자 하니, 농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니, 이제 품절녀라고 비싸게 구는 거 아닌가 했지.”
“너나 내 연락 씹지 말아라! 심지어 넌 일부다처제잖아!”
“그게 왜?”
“난 품절녀지만, 넌 품품품절남이지!”
“어우, 아지매요...”
“흐히힝!”
저도 말해놓고 어이가 없는지, 너털스레 웃는다.
그 후로 일부러,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내가 통로 벽에 기댄 채 얘기하니, 윤설도 자연스레 반대쪽 벽에 기대, 나와 마주보며 이야기했다.
우리 사이로 지나가는 남자들이 그녀를, 그리고 여자들은 나를 힐끗거린다.
다른 내 여자들과 다닐 때는 이런 시선에 개의치 않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의 여자를, 그것도 내 동갑의 녀석을 이렇게 데리고 다니니, 그녀를 바라보는 남정네들의 시선이 썩 괜찮았다.
‘저걸 살짝만 벗겨 놓으면 더 괜찮을 텐데.’
그, 윤설이 여름에 줄곧 입던 흰색 원피스 말이다.
대학 때 우리가 그랬듯이, 남정네들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질 것이다.
일부러 이야기를 질질 끌어, 그녀를 잡아두었다.
곧, 기다리다 지친 고준혁이 이쪽으로 휘청이며 다가왔다.
“...안 오고 뭐 해?”
눈초리가 묘하다.
저 눈치 없는 새끼도, 꺼림직한 낌새를 살짝 맡은 모양이다.
“아, 미안미안! 흐히.”
나도 너털스레 씨익 웃어주며, 놈의 어깨를 턱턱 두드려줬다.
놈이 움찔했다.
“미안, 네 여친인데 너무 오래 잡아뒀네.”
살짝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대어 닦았다.
어우 씨발, 육수도 아니고...
다시 테이블에 앉아, 음식과 술잔을 기울였다.
이후의 술판은 나와 윤설의 일방적인 대화와 말장난으로 이루어졌다.
윤설이 수정으로 인해 나를 매우 편하게 대한 것도 있지만.
고준혁이 정신을 차리느라 술에 끼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이건 깨나 의외였다.
이 눈치 없는 새끼가 방금의 상황에서 무언가를 읽고, 취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꼴이.
제 여자를 지키려 노력하는 꼴이.
‘음... 새끼, 그래도 나이를 뒷구멍으로 처먹지는 않았구나.’
마음에 안 드는 새끼지만.
이제야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나 싶어, 은근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음식과 술이 다 떨어졌다.
하지만 나도 윤설도, 아직 헤어지기는 아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안주를 더 시킬까 했으나, 고준혁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 뭘 또 시켜. 나 돈 없어.”
어쩔 수 없이, 나는 마지막 술이 든 잔을 으쓱 치켜들며 윤설에게 물었다.
“2차?”
“고!”
쨍!
윤설이 잔을 부딪쳐왔다.
서로 동시에 술을 털어넣었다.
윤설은 잔을 꺾고, 물을 꼴깔꼴깍 마셨다.
목덜미 참 뽀얗다...
대학교 동기를 두고 이러고 있으니, 이상하게 참 간질간질하다.
최상등의 여자를 수없이 먹었는데도, 그저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젊었을 적 감성의 별미로 다가왔다.
여사친이라는 단어의 울림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계산서 쪽을 봤다.
고준혁은 또 주둥이를 쭉 내빼고, 계산서 위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계산서 이리 줘.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내가 낼게.”
“어? 안 돼! 우리도 낼 거야!”
“...”
고준혁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 돈 많다.”
“그 많은 돈, 민지랑 애기한테 쓰셔야죠~ 애기한테 사랑만큼 돈도 많이 들어간다는데. 내가 결제할 테니까, 1/3 계좌이체 해!”
볼이 벌겋게 익은 윤설이 카드를 꺼내며 히히 웃었다.
말도 참 이쁘게 하네. 임신시키고 싶게.
“습. 내가 낸다고 했다. 나 진짜 돈 많아.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그러니까 우리 애기 걱정 말아라.”
“으응? 준영이 부자야?”
내가 자꾸만 강조하니, 윤설도 이제야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 뒤로도 몇 번 실랑이를 하고나서야, 겨우 카드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고준혁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
“응? 왜.”
녀석이 잠시 쭈뼛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 굴 튀김도 먹고 싶은데.”
“...”
“...”
“구, 굴 맛있어. 그리고... 요즘 굴이 철이래!”
나도, 윤설도.
어이가 없어 말을 잃었다.
윤설은 제 애인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터질 듯이 붉히며 내 눈치를 살폈다.
“...흐, 흐히! 에, 에이, 뭘 또 시켜... 여기 너무 오래 있어서 질린다! 얼른 나가자! 2차 가야지!”
“구, 굴튀김 얼마 안 걸리는데...”
“주, 준혁아, 그냥 나가자... 응?”
나는 불쌍한 윤설을 바라보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2차 가기에 좀 늦긴 했지. 그냥 여기 더 있자. 굴튀김 맛있겠네. 설아, 거기 벨 좀 눌러주라.”
“...으응.”
윤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지못해 벨을 눌렀다.
차마 내 눈을 볼 수가 없는 모양이다.
‘...병신.’
분에 넘치는 여자친구도 생겼겠다, 조금은 어른스러워지지 않았을까 기대했다.
그랬는데... 정말 한결같구나.
“주문하신 굴튀김입니다.”
“여, 여기. 가운데로 주세요.”
굴튀김이 나오자, 고준혁이 얼른 접시를 치워 공간을 만들었다.
놈의 손에는 벌써부터 젓가락이 들려 있었다.
굴튀김이 맛있긴 했다. 몇 개 안 나오긴 했어도, 알이 참 큼직했다.
3월이라, 굴 철이 이미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특히 고준혁은, 튀김을 호호 불어가며 참 복스럽게도 먹었다.
“웅굽, 맛있다. 설아, 그치?”
“...”
결국 윤설은 끝까지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술잔을 더 나누고, 이제 정말 헤어질 때가 됐다.
옆 의자에 팔을 걸치고, 고준혁을 불렀다.
“야, 고준혁.”
“어?”
녀석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던질까 하다가, 말았다.
이런 건 본인도 눈치 못 챌, 아슬아슬한 위화감이 생명이거든.
“계산 좀 하고 와라.”
“...응?”
“계산.”
놈이 무언가 쎄함을 느끼고, 나와 내 카드를 번갈아 봤다.
“왜 그래? 네 여친 카드 아니야, 내 거야. 내가 산다니까?”
“어, 어...”
태연하게 둘러대자, 놈은 무언가 꺼림직하다는 기색으로 카드를 받고, 마지못해 카운터로 향했다.
‘쯧, 병신.’
속도 좁지, 방금 살짝 긁어줬다고 미간 찌푸리는 거 봐라.
역시 저런 놈들한테는 이런 대우가 걸맞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윤설의 옆으로 가 외투를 주섬주섬 걸쳤다.
“웃차...”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윤설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혔다.
“응?”
“킥.”
“이익!”
윤설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또 앉혔다.
“이이익!”
이번에는 녀석이 다리에 힘을 줘, 땅을 박차며 일어났다.
그것을 누르지 않고 그냥 두니, 저 혼자 휘청했다.
“어, 어어!”
“어이쿠, 아줌마. 많이 취하셨어.”
휘청이는 윤설의 어깨를 잡아당겨, 내 품에 껴안았다.
오우, 이거... 안아보니까 진짜 쩌는데?
“집에 가실 수는 있나 몰라.”
“야아!”
“킥킥.”
녀석도 나를 올려다보며, 마주 웃었다.
뽀얀 피부와 먹음직스레 상기된 볼.
싱그러운 샴푸냄새 속, 은은한 알콜 냄새.
아랫도리가 간질거린다.
녀석이 내 가슴팍을 팍 때리며 나가려 했다.
벗어나려는 녀석의 몸을 껴안아 조였다.
“놔라아...!”
“너무 취하셔서, 놓으면 쓰러질까봐 못 놓겠네.”
“놔라악!”
웃음기 섞인 눈으로 버둥거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녀석을 더욱 세게 껴안으며, 딱 좋게 토실토실한 몸뚱이의 감촉을 느꼈다.
진짜 존나 말랑하네... 양아라랑 맞먹을 수준인데?
멀리서, 고준혁이 계산을 마치는 것이 보였다.
그때가 돼서야 윤설을 놔주었다.
“...응?”
한 발짝 늦게 도착한 고준혁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하다.
새끼, 눈치가 아예 없진 않아.
“...뭐했어?”
“장난 좀 쳤지.”
놈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어줬다.
약간의 껄렁대는 기색을 담아주니, 놈의 목덜미가 살짝 빨개진다.
말로 표현은 못해도, 좆같나보다.
“택시 나눠 탈래? 준영이 어디 살아?”
때마침, 윤설이 걸음을 옮기며 물어왔다.
고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드.”
“...조심해라.”
놈이 카드를 내 손에 퍽! 올려뒀다.
윤설만큼이나 작은 키로, 어깨를 한껏 치켜올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세상에.’
방금, 진짜 중1짜리 우리 조카가, 제 어머니에게 하는 꼴과 똑같았다.
“큽...!”
이번엔 조리돌림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겨서, 진짜 웃어버렸다.
조심해라? 얘는 아직도 고딩 감성으로 가오를 부리냐...
“이, 이...! 익...!”
내 반응에, 녀석도 진심으로 자존심이 긁힌 모양이다.
주먹을 꽉 쥐고, 아주 이를 빠득빠득 간다.
놈의 얼굴과 노호성이 펑 터지려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찰나.
“뭐해? 안 나오고?”
윤설이 입구 문을 연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대놓고 눕히면 재미가 없지.
윤설 앞에서, 나는 아주 착한 놈이어야만 한다.
적당히 고준혁의 어깨를 턱턱 두드려줬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에 손이 닿으니, 놈은 또 움찔움찔했다.
‘반응 진짜 A급이네...’
이쪽 성향에는 별 관심이 없어, 민채슬과 양아라의 남편을 딱히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성향에 눈을 뜰 것만 같다.
앞으로를 기대하며, 윤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