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91. 4차원 장난꾸러기 윤설
+++
윤설 커플과 술약속을 잡았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오랜만에 연락한지라, 어색해할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역시 윤설이었다. 수화기 너머까지 전해지는 녀석의 반가운 마음에, 나까지 기분 좋아졌다.
‘조민지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녀석은 많이 내향적인지라,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창 내게 집착할 때는 껌처럼 따라다니더니, 오늘은 같이 가재도 싫다더라.
‘아쉽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빛같은 태도 변화에 살짝 섭섭할 뻔했다.
내가 원했던 바람직한 변화였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이러한 섭섭함조차도 좋다.
내가 녀석과 연인이라는 증거니까.
이런 사소한 태도변화에서 섭섭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녀석과 내가 특별한 사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해준다.
참... 마음이 간질간질해지고, 이상하게 붕 떴다.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인다.
“아, 그러니까 무슨 이자카야야... 비싼데...”
“...오랜만에 준영이 만나는데, 그냥 기분 좋게 마시자아~ 응?”
“귀찮게... 그냥 너 혼자 나오라니까...”
“...헤헤. 미안. 기분 풀어라아~”
입구 쪽에서 익숙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속의 그것보다는 조금 침울한 듯 느껴졌지만, 큰 신경이 가지 않는 사소한 변화였다.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여기.”
“아! 준영이다!”
“...”
윤설이 고준혁의 손목을 잡고 발랄하게 뛰어온다.
고준혁은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터덜터덜 끌려왔다.
‘오...’
오랜만에 보는 윤설의 모습은 생각보다... 뭐랄까, 꼴릿했다.
이거... 진짜 맛깔나겠는데...?
“이여어~ 김준영이~!”
“킥킥. 뭐야~”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분위기가 띄워진다.
이러니 쟤 주변에 사람이 꼬이지.
“우와아...! 준영이 운동해? 어깨랑 팔 봐!”
윤설이 대뜸 다가와, 내 팔을 만지작거린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지 일 년은 지났는데, 이주일 만에 만난 마냥 자연스럽고, 편하다.
“완전 어깡! 뽕 찬 거 아니야? 아니네!?”
녀석이 제 팔을 양쪽으로 뻗어, 내 양어깨를 턱 잡았다.
나는 앉아있어, 높이 차이 때문에 눈앞에 봉긋한 가슴이 자리잡았다.
싱그러운 샴푸냄새와 섬유유연제 냄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아 씨, 간지러...! 킥킥, 넌 진짜 여전하구나.”
“흐히!”
뒤에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고준혁이 무어라 작게 투덜댄다.
“운동 별로 많이 하지도 않았구만... 피티 잡고 9개월 정직하게만 운동하면 나올 몸이네.”
“...흐히. 자리에 앉자...!”
윤설이 난처한 듯한 기색으로, 고준혁의 의자를 빼줬다.
어디 가서 한눈에 주목받을, 조민지나 성유아 수준의 미녀는 아니다.
하지만 윤설은 공지윤처럼, 남심을 설레게 하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늘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 초롱초롱하여 해맑은 눈. 그리고, 특유의 활기찬 성격.
활기차다 해서, 남자에게 허울 없이 어깨동무할, 그런 성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앉아 있을 때 살며시 뒤쪽 측면으로 다가와, 귓가를 간질거리는 맑은 목소리로 “뭐해?” 할 듯한. 그런 활기다.
듣기 좋은 하이톤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높이 때문에 얼굴보다는 새하얀 목덜미와 남다른 발육의 가슴에 먼저 시선이 가겠지.
저도 모르게 봉긋한 가슴과 싱그러운 샴푸냄새에 정신 팔릴 것이다.
그리고 아차 싶어 서둘러 시선을 올리면, 그저 해맑은 눈망울과 미소로 내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본인은 친구랍시고 남자들과 두루두루 어울리지만, 정작 그 남자애들은 흑심과 설렘으로 그녀 주위를 맴도는.
그런, 학창시절 누구에게나 있어봤을 법한, 인기 있는 ‘여사친’의 전형이다.
‘몸뚱이는 예전에도 상당했는데, 지금은... 이야... 완전 녹진하게 숙성됐네.’
백옥처럼 뽀얀 피부. 그리고, 평소엔 의식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돌연 얘 얼굴이 예뻐보일 때 함께 ‘어? 얘 몸이... 원래 이랬나?’ 할 법한, 알게 모르게 육덕진 몸.
뭣 모르고 얼굴만 보는 중고등학교 때보다는, 스물 초중반에 인기의 정점을 달릴 법한, 그런 몸이다.
게다가 대학교 때에는 탱글한 활어회 같았다면, 지금은 녹진 쫄깃한 숙성회가 다 되어, 보기에도 아주 맛깔나다.
“이야기는... 음식이랑 술 고르고 할까?”
“응! 뭐 먹지?”
팔짱을 끼고 턱을 당긴 채 가만있던 고준혁이... 쟤는 엄청 쪘네. 피부도 씹창났고.
아무튼, 고준혁이 목을 쭈욱 빼, 윤설의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윤설이 고준혁을 힐끔 보고는, 싱긋 웃으며 그의 쪽으로 메뉴판을 기울여줬다.
“치킨 먹을까, 치킨? 이자카야니까 가라아게! 술자리 치킨 국룰!”
“무슨 닭이야... 이자카야까지 와서...”
“그, 그치? 흐히. 그럼... 우리 준혁이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치킨난반.”
“응! 치킨난반 하나! 준영이는? 뭐 먹고 싶어?”
“음... 국물 하나는 있는 게 좋지. 나베?”
“오! 나베!”
리액션도 참 좋다.
그런데, 고준혁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다른 데를 보며 작게 투덜댄다.
“무슨 나베야, 비싸게...”
“...흐, 흐히! 수, 술은 뭐 먹을까!”
잘 들리진 않았지만, 윤설이 난처해하는 걸로 보아 좋은 말은 아닌...
‘어우, 씹... 목 좀 씻고 다니지...’
입맛 버렸네.
적당히 술을 고르고, 직원을 불러 주문했다.
아직 술이 없음에도, 대화는 술술 이어졌다.
윤설 특유의 친화력 덕분이겠지.
“영민이는 잘 지내? 민지는? 민지 보고싶다아! 민지가 진짜 껴안기 좋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지 참.”
대학교 때, 윤설은 조민지를 만날 때마다 달려와 꼬옥 껴안아주곤 했다.
조민지는 아담한데 윤설은 여자치고 살짝 큰 편이어서, 둘의 키차이가 딱 언니동생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윤설이 조민지를 참 좋아했다.
정작 조민지는 그런 윤설의 에너지가 부담스러웠는지, 그녀와 늘 거리를 뒀지만.
“민지는 회사 잘 다녀? 민지는 성격상 회사에 적응하기 힘들어할 것 같은데...”
“민지는 휴직계 내고, 우리 집에서 쉬고 있어.”
휴직이 아니라 퇴사고, 나랑 박영민 또한 퇴사했지만.
풀어 설명하기 귀찮으니, 적당히 말했다.
“어? 너희집? 왜?”
“임신했거든.”
“어어어어!?”
“...”
윤설과 고준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 너네 둘이...”
“결혼할 거야.”
“세... 상에에...!”
윤설은 무에 그리 감격스러운지, 양손으로 제 코와 입을 덮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너네, 둘이...! 그렇게 말 많았던, 민지준영 커플링...! 미, 미쳤다아...! 너무, 너무 예쁘다아...! 너무... 우와아...!”
“킥킥.”
눈앞에서 저렇게 기뻐해주니까 참... 간질간질하네.
윤설은 꼭 제 일인 것마냥, 벌써 눈망울을 몽글거렸다.
참, 유난스러우면서도 소녀스러운,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뿌듯하게 해주는, 그런 반응이다.
괜히 뒷목을 쓸어내리며, 물을 들이켰다.
고준혁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하게 다시 팔짱을 꼈다.
삐죽 나온 주둥이가 뭐라 중얼댄다.
“근데 임신은 좀... 아니지 않나? 이제 신입사원인데, 계획도 없이 인생...”
“추, 축하해! 우, 우와아! 흐히히...!”
윤설이 급하게 과장된 리액션으로 덮으려 했지만, 이미 들어버렸다.
저 병신새끼는... 나이를 처먹고도 저 지랄이네.
“...”
“...”
“...흐, 헤흠...! 으, 음식이 언제 나올까아...”
분위기가 얼어붙고, 윤설이 안절부절못하며 어색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고준혁 저 새끼도 분위기를 보고 뭔가 아니다 싶었는지, 뒤늦게 딴청을 피운다.
반응을 보아하니... 시비를 건 게 아니라, 진짜 눈치가 없어서 한 말인 모양이다.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저거 눈치는 원래부터 유명했으니...
“여깄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윤설에게는 천만다행이게도, 술이 나와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었다.
“준영아! 잔! 따라줄게!”
“그래.”
혀를 쯧 차며, 윤설에게 잔을 내밀었다.
곧이어 음식도 나오고,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윤설은 일찍부터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볼이 이쁘게 달아올랐다.
‘...참하다.’
‘예쁘다’라는 말보다는... ‘참하다’는 단어가 참 어울렸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녀에게 눈길이 간다.
외모로 압도하는 타입이 아닌, 성격과 분위기로 매력을 뿜어대는 애들이 다 그렇다.
처음엔 별 주목받지 않다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 사람에게 빠져들게 된다.
“흐히힝! 그래서 있잖아! 나랑 얘가···”
윤설이 술기운에 신이나,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받치고, 상체를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깨나 육중한 가슴이 테이블에 눌려,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미 술에 해롱해롱한 고준혁은, 아예 대놓고 그녀의 가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쟤는 어째 하는 짓마다 꼴불견이냐...
윤설이 물잔을 홀짝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응... 나 화장실!”
그녀가 살짝 흔들리는 걸음으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고준혁은 이미 만취에 가까운 모양인데도, 연신 술잔을 훅훅 들이켰다.
이런 자리를 싫어한다던데, 왜 그런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잠시 후, 술잔을 털어넣고 일어섰다.
“나도 화장실 좀.”
남자화장실에서 손만 적당히 씻고 나와, 좁은 통로에 기대 윤설을 기다렸다.
잠시 후, 윤설이 젖은 손을 툴툴 털며 나왔다.
“으응? 준영이, 기다렸어~?”
말꼬리를 살짝 늘리며, 얕게 풀린 눈으로 내게 말했다.
“둘이 앉아 있기는 좀 그래서.”
...참 뽀얗다.
술기운에 볼이 벌게졌는데도, 이상하게 더욱 하얘보였다.
창백한 하얀색이 아니라, 찹쌀떡처럼 한 입 베어물고 싶은, 그런 뽀얀색이다.
‘서서 보니까 장난 아니네.’
얼굴도 좋지만, 몸이 진짜 쫄깃하게 생겼다.
남성이라면 길가다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모습.
대학교 때 같이 다니던 놈들 중에, 적당히 풍만한 여자만 보면 ‘저거 참젖일까, 의젖일까?’ 하는 놈이 있었다.
그럴 때면, 주변 놈들은 괜히 딴청을 피우곤 했다.
저도 함께 싸잡아 이상한 놈 취급 받을까봐.
그런데, 그놈이 지나가는 윤설을 말할 때만큼은 달랐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대답 없이 윤설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특히, 그녀가 좋아하는, 밑단 짧고 하늘하늘한 순백색 원피스를 입고 올 때면 더욱 그랬다.
‘...빨리 여름이 왔음 좋겠네.’
하늘거리는 치마 밑으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토실토실한 허벅지는... 정말이지 뽀얘서, 힐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여진 허리와 얇은 원단으로 더욱 부각되는 그녀의 가슴은, 참 유난히도 탱글했다.
다른 여자들 가슴에 비해 신기할 정도로 출렁였다.
옷 위로 드러나는 물방울 모양이, 신기할 정도로 예뻤다.
‘참젖? 의젖?’을 입에 달고 다니던 그놈도, 윤설을 볼 때면 항상 ‘저건 씨발, 참젖이야.’라고 단언했다.
‘참젖. 그래.’
참젖은 자연산 가슴, 의젖은 수술 가슴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그 뜻을 제하고서라도, ‘참젖’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진짜 기가막히도록 잘 어울리는 가슴이었다.
“응? 왜? 할 말 있어? 응?”
동글동글,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한 음란한 몸뚱이와는 달리, 얼굴은 참 순수했다.
그제 진짜 꼴렸다.
“아니, 그냥.”
[수정모드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대상: 윤설]
내가 대학생이었다면, 수정어플의 첫 대상으로 주저 없이 그녀를 골랐을 것이다.
“연락이나 하고 지내자고.”
[대상 ‘윤설’의 내면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