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6. 소꿉친구 조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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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발...”
박서윤의 집에서 나와 차에 탔지만, 도저히 시동을 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부재중 전화 14통]
[읽지 않은 메시지 15통]
[언제 와?]
[운전 중인가 보네. 도착하면 전화 좀 해줘]
[오고 있어?]
[좀 걸리네...]
[전화 왜 안 받아?]
[빨리 온다며...]
[저녁 뭐 먹을까? 미리 시켜놓을게]
[벌써 9시네. 배고프다.]
[음식점 다 닫아서 이제 시킬 거 없다...내가 만들어 놓을까?]
[장 보려고 나갔다 왔는데, 마트가 문을 닫았네... 미안. 너 오면 뭐 먹어야하지? 라면?]
[나 졸려...]
[보고 싶어]
[깜빡 잠들었네. 벌써 2시야...]
[오늘은 밤이 좀 춥다. 어디서 잘 거야? 호텔? 아니면... 혹시 오고 있어?]
[개새끼]
“하아아아...”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혼자 남겨진 강아지마냥 풀 죽어 있을 녀석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들어가면, 한바탕 혼 좀 나겠는데.
“...”
들어가지 말까?
“...무슨 철없는 소리야.”
허리를 펴고, 시동을 걸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야 한다.
혼나는 건 둘째 치고, 많이 기다렸을 테니까.
엑셀을 가능한 가장 세게 밟았다.
출퇴근 시간도 아닌 데다가, 이 차를 타고 도로로 나가면 다른 차들이전부 비켜줘서 빠르게 갈 수 있었다.
띡띡띡띡띡. 띠리링-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나, 나왔어.”
집안이 어둡다.
매트 위에는 조민지가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에 있는 걸까?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던 찰나.
새근... 새근...
‘응?’
아래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시선을 내려보니, 조민지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쪼그려 자고 있었다.
현관문 바로 앞에서.
“...야.”
“으웅...?”
녀석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깨웠다.
“왜 이런 데서 그러고 있어...”
“어어... 왔어어...”
눈을 부스스하게 뜬 조민지가 꼼지락거리며 내 품으로 들어온다.
눈이 퉁퉁 부어있다... 라면이라도 먹고 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울어서 부은 거라면...
“따뜻하다...”
작은 몸을 끌어안아줬다.
몸이 깨나 차갑다.
“담요라도 덮고 있지 그랬어.”
“금방 올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잠들어서... 킁킁.”
녀석이 내 품에 대고 코를 킁킁댄다.
혹여나, 박서윤의 냄새가 날까 봐 움찔했다.
조민지의 꼼지락거림이 멈췄다.
녀석이 내 옷을 꼭 쥐어잡는다.
뭐지...? 들켰나?
“...된장국 먹고 왔어? 맛있겠다아...”
다행히 광란의 밤을 보내고 샤워를 해서, 박서윤 냄새는 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제 뭐 안 먹었어?”
“너 오면 먹으려 했지...”
마음이... 조금 아려온다.
나 오면 자겠다고 현관문 앞에서 졸고, 나 오면 같이 먹겠다고 쫄쫄 굶은 애를 상대로.
여자 냄새가 날까 봐 쫄았다니.
“...된장국 먹고싶어? 지금 같이 나갈까? 된장국 먹으러 가자.”
“됐어... 나 졸려. 그것보다... 나 잘 동안 안아주면 안 돼? 같이 자자...”
“그래, 같이 자자. 눈 감아.”
조민지를 품에안아 들어, 매트로 향했다.
작은 동물같은 몸을 조심스레 이불 안에 넣어주고, 나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조민지를 마주본 채품에 껴안았다.
녀석의 머리 위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으응...”
조민지가 기분 좋은지 비음을 흘리며 몸을 꼼지락거린다.
하지만 곧, 녀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표정이다.
“킁킁...”
내 가슴팍을 더듬던 조민지의 작은 손이 내 옷을 꽉잡아쥐었다.
‘...된장국 냄새가 그렇게 싫은가?’
옷을 잡은 힘은 점점 강해진다.
종래에는. 작은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얘질 정도가 됐다.
녀석의 손이 부들부들떨린다.
“...옷 벗어.”
“응?”
“빨리... 이거, 벗어버려.”
조금... 느낌이 이상하다.
나는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려, 얼른 옷을 벗어 밖으로 던져버렸다.
“...너도 벗겨줄까?”
“...”
녀석이 알몸으로 부비는 것을 좋아하기에 물어봤는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조심스레 손을 내려, 조민지의 옷을 벗겨냈다.
피부끼리 비벼지자, 녀석이 꼼지락거리며 품으로 들어온다.
몸을 조금 웅크리고, 손을 제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은, 태아같은 자세.
보드라운 감촉에 자지가 딱딱해진다.
“좋다...”
“...”
“...”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침묵이 불편하다.
돌연, 아까 보았던 퉁퉁 부은 눈이 신경쓰인다.
물어볼까...?
“......나 오기 전에, 울었어?”
“...”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녀석이 웅크렸던 몸을 움직여, 내게 밀착한다.
팔로 나를 껴안고, 배를 맞붙인다.
“...너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났어.”
“...!”
이, 이상한 냄새라면...
‘...그래, 안나는 게 이상하지.’
내 옷은 박서윤의 방에서 24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정액냄새와 땀냄새로 꽉 차다 못해 절여진 방에서.
양아라 냄새 때와는 다르다.
몸의 냄새는 샤워로 씻어냈다고 하나.
옷은 특별히 빨거나 하지 않았으니...
“...”
된장국 얘기로넘어갔다고 안심한 게 멍청했다.
녀석이 나를 불렀다.
“야...”
“...응.”
“난...”
조민지의 목소리에 물기가 차올랐다.
녀석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안 돼...?”
“...”
“왜... 자꾸 다른 여자한테 가는 거야...”
내 몸을 끌어안는 힘이 강해진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지금까지는 내 옆에만 있어줬잖아... 왜...”
옥죄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 가는팔로 조여봤자 얼마나 조이겠는가.
다만, 이 팔에서. 맞닿은 피부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난... 너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나를 향한 조민지의, 애절함의 무게가.
“나랑 있어줘...”
“...”
“평생, 지금까지처럼... 나랑 있어줘... 제발...”
다분히 의미심장한 언어.
수정어플로 인한 비일상을 제외하고서라도, 우리 사이의 기류는 이미 친구사이의 그것을 넘어섰다.
‘이제는...’
확인은 충분하다. 아니, 한참 전부터 확신했다.
그냥...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 첫사랑이,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줄 알았던 여자가.
10년이 넘도록 바라만 봐왔던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
기적적인 힘을 지닌 수정어플 따위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인, 믿기 힘든.
진짜 기적이었다.
[수정모드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대상: 조민지]
‘예.’
[대상 ‘조민지’의 내면을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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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의 공간.
조민지의 내면.
녀석의 내면을 수정하려 들어온 것이 아니다.
“키워드검색. 김준영.”
몸이 자동으로 흘러,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준영]
내 손바닥 위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하지만 [김준영] 구체의 파생 영역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손을 뻗어, 허공에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관념 생성.’
수정모드에서 구체를 생성할 때, 대상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관념을 생성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실험해본 적이 있다.
[김준영의 아이를 임신하고 싶다.]
나타나지 않았다.
‘...’
중복된 구체를 생성하려하면, 구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고개를 들어, 눈앞의 거대한 구체를 바라봤다.
[김준영]
조민지 내면의 그 어떤 구체보다도 거대한 구체.
지금껏 여러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봤지만, 이토록 거대한 구체는 본 적이 없다.
수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된 민채슬에게도.
일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성유아에게도.
정신병을 앓고 있던 박서윤에게도.
이토록 거대한 구체는 없었다.
이 거대한 [김준영]구체에서는 수없이 많은 선이 빠져나와, 또 수없이 많은 구체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구체에서 파생된 관념들로 이루어진 영역은 너무나도 넓어, 다 탐지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난 이 영역에 대해 모두 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
검색창을 띄웠다.
“키워드 검색.”
잠시... 망설였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키워드를 입력해주세요.]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시스템이 나를 재촉했다.
“...사랑.”
검색 기능이 실행되고, 내 몸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김준영] 세 글자가 떡하니 보였던 정면에서, 조금씩 구체의 옆으로.
‘김’ 글자가 조금씩 안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씩, 가려져 있던 뒤쪽의 영역이 시야에 나타난다.
‘구체의 위치는 관념 간의 유사성을 의미한다.’
내가 머물렀던 구체 앞쪽영역에는 ‘친구’ 키워드 위주의, 우정과 관련된 내용들뿐이었다.
하지만 옆으로 돌아 구체 뒤쪽으로 향할수록, 조금씩 문장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김준영의 손으로 쓰다듬어지면 기분이 좋다.]
[김준영은 굉장히 남자답고, 늠름하다.]
[김준영의 품은 따뜻하다.]
[김준영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김준영과 함께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김준영] 구체의 ‘김’ 글자가 완전히 보이지않게 됐다.
점차, ‘준’ 글자도 사라지기시작한다.
그리고 한참을 흘러,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김준영] 구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뒤쪽의 영역.
그곳에는.
“...”
[김준영을 사랑한다.]
[김준영] 구체만큼이나, 거대한 구체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