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4. 아기만들기 프로젝트 성유아
[일]
아주 진하고 커다란 글씨로, 딱 한 글자만이 새겨진 구체였다.
‘이 정도면... 아파트 한 채 정도는 되겠는데?’
구체의 크기는 곧 비중이다.
그만큼, 성유아라는 사람에게 있어 ‘일’이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이다.
뻗어 나온 선의 수도 어마어마하다.
원래대로라면 어디서부터 살펴봐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부 한눈에 보인다.’
아니, 보인다기보다는 느껴진다.
[일] 구체에서 파생되는 문장들의 대체적인 정보가 머릿속에 저절로 흘러들어온다.
마치 잘 정돈된 엑셀 파일이 머릿속에 작성되는 느낌이다.
덕분에 수많은 구체들 사이에서 헤매는 일 따위는 없었다.
‘어디보자...’
[일]에서 파생된 구체 중, [프로젝트] 구체로 다가갔다.
이름은 ‘수정 어플’이지만.
어플의 힘은 문장을 수정함에만 국한되어있지 않다.
삭제, 추가, 강화, 축소 등등...
더 다채로운 활동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수정보다는 편집에 더 가깝다.’
[중규모 이상의 프로젝트는 내 가치를 입증할 기회다]
성유아의 수많은 관념 중 하나.
지름 5m 정도 크기의, 상당히 강력한 관념이다.
‘이걸 강화한다.’
손을 대고 의지를 일으켰다.
슈우우-
구체가 빠른 속도로 몸을 불린다.
대략, 지름이 2배 정도는 길어진 것 같다.
다른 구체에도 작업한다.
[기타 잡무에 다소 소홀해질지라도, 프로젝트의 완수가 먼저다]
‘강화. 그리고...’
[최선을 다해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것도 강화.’
각각의 구체들이 커졌다.
지름 10m 정도의 크기.
동시에, 구체에 쓰인 문장이 조금 바뀐다.
[기타 잡무를 미뤄서라도 프로젝트를 완수해야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쯤이면 됐겠지.’
이제 성유아는 중규모 이상의 프로젝트라면 광적으로 매달릴 것이다.
원래 워커홀릭이었던 그녀의 기질이 강해진 것이다.
‘다음은...’
이번에는 구체를 생성했다.
그리고 [김준영] 구체와 [프로젝트] 구체에 선을 뻗어 연결시킨다.
‘적당히 크게.’
성유아의 내면을 마구 개조할 수는 없다.
내면을 바꾸는 일은 대상의 정신에 부담을 준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바꾸면,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일단은 이 정도만.’
아주 크지는 않지만.
[김준영]에서 파생된 구체 중에서는 가장 큰 크기다.
지름 1m급.
새겨 넣은 문장을 확인했다.
[김준영은 회사에서 거금을 들여 추진 중인 비밀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다]
‘여기서 또 파생.’
새로운 구체들을 만든다.
그리고 방금 만든 구체에 연결한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 보조자로서 참여해 김준영을 최대한 보조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는 비밀 프로젝트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기밀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는 매우 중대한프로젝트이기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야한 일과는 눈곱만큼도 관계없는 내용들이지만.
이것들이 향후 내 그림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대미를 장식해야지.’
구체를 생성했다.
다른 구체에서 아꼈던 만큼.
여유분을 쏟아부어 크기를 키웠다.
3m 정도의.
[김준영] 구체보다도 큰 관념이 만들어졌다.
문장을 확인했다.
[프로젝트명은 ‘아기 만들기 프로젝트’다.
‘좋아.’
수정모드를 끝내고, 현실로 되돌아왔다.
+++
투두두둑!
쏟아지던 물이 싱크대와 충돌한다.
내가 수정 모드에 들어가 있던 동안, 현실의 시간은 멈춰있던 것이다.
손을 쥐어 종이컵을 구겼다.
‘이제 돌아갈까.’
그때.
“짠!”
내 옆구리에서 공지윤의 머리가 휙 튀어나왔다.
“헤헤.”
그러고는 이유 없이 그저 헤실헤실 웃는다.
“어, 음... 그냥 한 번 따라와 봤어요!”
어색한 행동과 말에서 딱 견적이 나온다.
‘성유아한테 까인 게 걱정돼서 와봤구나.’
이 기특한 작은 동물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어? 음? 음... 헤헤.”
“왜, 혼자 엉엉 울고 있을까 봐 와봤냐?”
“아님 다행이구요!”
공지윤의 재킷 앞섬을 열었다.
셔츠를 자세히 보면 희미하게, 꼭지가 슬쩍 튀어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젖꼭지를 지그시 누르며 돌려줬다.
“으, 핫?”
갑작스러운 애무에 놀라는 공지윤.
“하, 하지 말아요오...”
“멍청한 후배님이니까 틈틈이 교육받으셔야지.”
“꼬, 꼭지 서면... 사무실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겁난다고요...”
수정된 공지윤의 관념에 의하면, 회사에서 노팬티, 노브라로 있는 것도 다 신입사원 교육의 일환이다.
신입사원이 교육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지금은 또 들킬까 겁난단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는 거지. 회사에서 노브라로 있는 게 음란한 짓이라는 걸.’
엄밀히 말하면 암시가 완전히 먹히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런 자잘한 부조화가 참 좋은 꼴림을 만들어낸다.
공지윤의 셔츠 위로 꼭지가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재킷을 다시 여며줬다.
“하, 으... 재킷에 스쳐요...”
“점심시간에 비품실로 와. 교육받자.”
“네에~”
공지윤의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함께 사무실로 돌아갔다.
‘팬티가 없어 손맛이 좋네.’
+++
사무실에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바쁜 타자 소리만이 실내를 채운다.
방금 막 사원 한 명이 또 성유아에게 깨졌다 한다.
‘아주 그냥 춥다, 추워.’
사무실 내의 공기가 무섭도록 차갑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얼음 초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정작 성유아 본인은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표정에 아무 미동도 없다.
하지만 팀원 모두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
“...”
“...”
타닥, 타닥, 탁 타다닥-
‘...더럽게 조용하네.’
그때.
텁-
성유아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쪽으로 걸어온다.
또각. 또각. 또각.
무거운 정적 속에 하이힐 소리가 선명하게 울린다.
그것이 오히려 정적에 무게를 더해준다.
“김준영 씨.”
“네.”
아주 잠깐이지만.
사무실 내의 사람들이 곁눈질로 이쪽을 힐끗거렸다.
“바쁘신가요?”
“...아니요, 시간 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아무래도 입질이 온 모양이다.
“잠깐 얘기 좀 하시겠어요?”
“네, 그러죠.”
성유아를 따라 복도로 나간다.
문이 닫히기 직전, 사무실 내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와 궁금증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곧이어, 나와 성유아는 비품실에 도착했다.
끼윽-
비품실 문이 소리 내어 닫혔다.
“얘기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아무도 없고, 누군가가 찾아오리라 생각하기 힘든. 낡고 방치된 장소.
그럼에도 성유아는 목소리를 줄여 말한다.
혹여라도 누군가 들을까 신경 쓰는 것이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될 비밀 프로젝트니까.
“축하드립니다. 김준영 씨가 그렇게 유능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하하, 유능하긴요. 그냥 보잘것없던 재주 하나가 얻어걸린 거죠.”
칭찬을 하는 와중에도 성유아는 무표정 일관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점이 내 안쪽의 흑심을 더욱 자극한다.
“그런데... 저는 보조자임에도 전달받은 사항이 많지 않습니다. 설명해주시겠어요?”
“저도 아직 자세히 하달받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저제가 누구보다 맞는 사람일 거라고 하더군요. 프로젝트의 이름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김준영 씨도 들은 게 없단 말인가요?”
“네. 보안이 생명인 프로젝트라고만 하더군요.”
“음...”
성유아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한다.
“아기 만들기 프로젝트...”
그녀가 프로젝트의 이름을 진지하게 중얼거린다.
벌써부터 배덕감이 차오르려 한다.
“필요할 때, 회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죠. 제가 ‘영업 상담 건’이라고 하면 프로젝트를 말하는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욕심부릴 필요 없다. 천천히 하면 된다.
나와 성유아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
그 후로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성유아를 불러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정신을 수정된 내용에 적응시키기 위한 작업이다.
한 번에 많이 수정하면 대상의 정신에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약간의 수정 후, 대상의 정신을 수정 내용에 적응시키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수정된 내용,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성유아에게 물었다.
“프로젝트 내용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아기만들기’ 라는 프로젝트명에 대해, 성유아는 어떻게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규모가 규모다 보니, 국가와 제휴하는 출산율 장려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네요. 아동용품 사업 진출의 교두보를 놓는 역할일 지도 모르겠고요.”
“출산율 장려 프로젝트라...”
재밌는 생각이다.
머릿속에 박힌 새로운 관념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신선한 접근.
그녀의 정신이 고생깨나 했을 것 같다.
‘일주일을 공들였으니, 이제 충분하겠지.’
슬슬 다시 진도를 나갈 때다.
“오늘, 프로젝트의 내용이 하달되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성유아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무감정한 얼굴이지만, 그녀가 열의에 차 있다는것이 느껴진다.
“네.”
“뭐죠? 프로젝트의 내용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리고핸드폰을 손에 들어.
수정 어플을 켰다.
“아기 만들기 프로젝트란, 저의 2세를 만드는 일입니다.”
[수정 모드를 시작합니다.]
시야가 뒤바뀐다.
+++
공허의 공간 속에 나와 거대한 마인드맵 조형물. 둘만이 남겨졌다.
“키워드 검색. [프로젝트], [김준영]”
조형물이 빠르게 회전하고, 내 몸이 자동으로 목적지로 향한다.
[프로젝트]
“보자...”
공지윤 때에도 그랬듯이, 주변이 변화했다.
일전에 추가했던 관념으로 다가갔다.
[나는 이프로젝트에 보조자로서 참여해 김준영을 최대한 보조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는 매우 중대한 프로젝트이기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저번보다 커졌어.’
내가 생성했던 것보다, 구체의 크기가 커졌다.
‘성유아의 정신이 충분히 적응했어. 순조롭다.’
뇌에서 정보 전달및 저장의주체인 시냅스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성된다.
이마인드맵은 성유아의 내면을 구현한 것.
그녀의 뇌가 그렇듯이, 이곳 또한 계속해서 유기적으로 변화한다.
‘내가 일주일 동안 프로젝트에 대해 계속해서 상기시킨것. 그리고 성유아가 원래 가지고 있던 워커홀릭 기질에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내 입맛대로 바꾸고, 그로 인한 변화를 지켜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었다.
‘오늘은... 잠재관념을 생성한다.’
흰색에 가까운 구체일수록 표면적인 관념.
검은색에 가까운 구체일수록 내면적인 관념이다.
검은 관념, 즉, 잠재관념은 대상의 내면 심상에 깊게 관여한다.
‘표면 관념은 일종의 지식의 형태야.’
[내일 비가 올 것이다]
이것은 새하얀 표면 관념이다.
성유아라는 사람은 원래 외출 때 우산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이게 그녀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이성이 간섭하여 이 관념을 떠올려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 손에 우산을 든다.
‘잠재관념은 본능, 가치관, 성격. 그 사람 그 자체지.’
[나는 여자다]
이것은 새까만 잠재관념이다.
그녀가 평소 이 관념을 문장의형태로 떠올리지는 않는다.
치마를 입을 때 ‘아, 나는 여자니까. 치마를 입어야지.’ 라고 사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무의식적 행동은 이 관념의 영향을 받는다.
치마를 입는다.
브라를 찬다.
입을 가리고웃는다.
남성을 사랑한다.
여성과 친하게 지낸다.
이 모든 일은 그녀에게 있어 당연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잠재관념은 그녀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성유아’ 그 자체를 구성한다.
구체를 생성했다.
‘짙은 회색. 이 정도면 충분해.’
[김준영이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프로젝트에 대한 것이라면 의심하지 않는다]
잠재관념에 손을 대는 것은 대상에게큰 부담을 주는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번에 표면 관념부터 손을 본 거지.’
다짜고짜 대상에게 [나는 자살하고 싶다] 라는 잠재관념을 심어서는 안 된다.
매우 생뚱맞고, 대상으로 하여금 커다란 거부감을 일으키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개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지나친 거부감을 유발하지 않는 내용이어야 한다.
‘대상의 정신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면,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해.’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미래가 너무 막막하다]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
이런 식으로 표면 관념에 최소한의 작업을 해둬야, 잠재관념을 [나는 자살하고 싶다]라는 잠재관념을 넣을 때 반발이 그나마 적다.
처음부터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김준영의 말은 당연한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라는 잠재관념을 삽입했다면 커다란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전에 표면 관념으로 작업을 해뒀다.
이제는 더욱 깊게 손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크기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상당히 작은 크기다.
잠재관념을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괜찮다.
저번에도 그랬듯이, 이 관념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다 보면 더욱 커질 것이다.
또한, 가만 놔둬도 다른 관념들과의 시너지 작용으로 스스로 그 크기를 불릴 것이다.
‘다음.’
이번에도 짙은 회색의 구체를 생성했다.
[아무리 음란한 행위라도, 프로젝트와 관련된 일이라면 야한 짓이 아니라 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