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7- 타락을 조르는 성녀와 예언자 이야기 (上)
성녀와 예언자가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이 들키면 곤란했기에, 나와 소피아는 진한 검은색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한 채로 있었다.
어두워진 시야 사이로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올려 모습을 확인했다.
선이 굵은 느낌의, 건장한 몸짓의 남자. 몸은 커다랬지만 둔해 보이지는 않았고, 차려입은 남색 슈트가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쪽입니다! 미스터 리!" 소피아가 폴짝폴짝 뛰면서 다가오는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Sophia라는 팻말을 들고는, 두리번거리다가 방방 뛰는 소피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각성자 이지혁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손을 모르는 척 하면서, 나는 가볍게 목례하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유리아나입니다. 기적의 예언자라는, 과분한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보는 남자와의 접촉은 조금 껄끄러웠기에, 나는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그와 닿는 것을 피했다.
그런 내가 무안하지 않게, 소피아가 허공에 있는 남자의 손을 붙잡아 방방 위아래로 흔들었다.
"덴마크의 자랑! 덴마크 최고 미녀! 덴마크의 희망! 소피아 메그놀리아입니다! 누나분과 함께 던전을 돈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야기 들었습니다!"
소피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반갑다는 듯,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면서 이지혁과 격하게 악수했다.
민망하게 거절당한 손을, 자연스럽게 가로채서 인사를 받은 것이다. 그녀는 내가 남자를 조금 껄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해소해 준 것이다. 그녀의 배려에 또다시 감사를 느끼면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하고 싶습니다. 혹시 괜찮은 장소가 있을까요? 미스터 리?" 나는 그에게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하며 말했다.
"아, 네. 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말하겠습니다"
그가 시원시원한 웃음을 지으면서, 우리를 차로 안내했다. 선팅이 짙게 칠해진, 리무진이었다.
"엄청 긴 차량입니다! 미스터 리는 리무진을 타고 다닙니까?" 소피아가 고급진 쿠션으로 마감이 된 문 안을 손으로 만져보며 말했다.
"하하, 협회에서 빌린 겁니다. 귀한 손님이시니까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미스터 리" 나는 리무진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그에게 말했다.
좌석이 마치 고급스런 침대라도 되는 듯, 몸이 조금 파묻히면서도 굳게 고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기분 좋게 서늘한 차 안의 공기에는
카페와 비슷한 편안한 느낌의 은은한 커피 향이 났다.
"이거 보세요! 소피아! 차 안에 냉장고가 있습니다!"
방긋방긋 웃으며 호들갑을 떠는 소피아를 보면서, 나는 안전벨트나 매라고 그녀에게 가벼운 핀잔을 주었다.
"정말, 유리아나는 너무 엄격합니다! 소피아 부모 아닙니다! 그리고 S급 각성자랑 부딫히면 트럭이 부셔질 겁니다!" 그녀가 혀를 베, 내밀면서 내게 대답했다.
"정말, 부끄러워요 소피아"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하하, 두 분 역시 사이가 정말 좋은 것 같네요. 아카데미에서 자세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조금 걸릴테니, 한숨 자 두셔도 괜찮습니다. 뒷 좌석. 끝까지 젖혀지거든요"
괜찮다면서 창 밖에 풍경을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 고민하려 했지만, 장 시간 비행에 몸은 피로를 느꼈는지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져만 갔다.
자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무진 뒷좌석은 너무나 편했고, 차 안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조금만 자 둘까.
이미 내 무릎에 누워 입을 헤 벌리며 콜콜 자고 있는 소피아의 체온을 느끼며, 나는 수마에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아카데미에 도착할 때 까지만이니까. 나는 노곤했던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
..
...
..
.
상태창을 띄워, 초월자의 의뢰 특성을 읽으며, 나는 조심스레 맨 아래에 있는 [숲의 음욕] 이 전한 보상부터 수령했다.
마음 속으로 수령하겠다고 생각하니, 마력이 스스로의 상태창을 변화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상태창과 맞닿아 있는 마력에 집중한다.
지금 자신은, 외부의 마력을 통해 상태창이 변화하고 있다.
타인의 상태창을 수도 없이 조작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지혁은 자신에 상태창에 특성을 불어넣고 있는 근원에 집중했다.
상태창에 변화할 힘을 넣고 있는, [무언가]를 매개로 하는 초월자의 연결. 연결된 마력에 집중한다.
순식간의, 찰나의 시간이지만, 이지혁의 마력은 상태창을 조작하는 감각에 집중했다.
'분명, [매개체]가 존재한다'
들어오는 마력 줄기 사이에 바늘과 같은 이지혁의 마력이 쏘아올려진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 마리의 연어와 같이, 내려오는 외부의 마력을 꿰뚫고는, 그 근원에 닿는다.
바늘과 같은 마력이 근원과 부딫치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간다.
초음파로 위치를 인식하는 박쥐와 같이, 터져나간 이지혁의 마력이 흐르는 초월자의 마력에 편승해 몇가지 정보를 알려 온다.
그 순간, 내 상태창에 자연의 친구(A) 특성이 추가되면서 초월자와의 연결이 끊긴다.
'...아쉽군'
초월자와 각성자, 그리고 상태창을 연결하는 하나의 매개체. 그 근원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연결이 끊김과 동시에 날아가고 있었다.
'...뭐, 기회는 더 있으니까' 나는 [하늘의 번개]와 [금기시되는 관계의 주인]의 보상 수령에 손을 대며, 나는 생각했다.
몇 번 더 하면 알 것 같다고.
그리고 나에게는, 아직 두번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방금의 감각에 집중하며, 이지혁은 나머지 보상을 수령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
..
...
..
.
'거의 다 알았었는데 말이야'
결론을 말하자면 난, 알아내지 못했다.
두 번쯤 더 하면 알 수 있겠다는 확신은 생겼지만, 대략적인 형태만 알게 되었을 뿐. 매게채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나는 보상을 수령하자마자 내게 추가된 의뢰를 확인했다.
[계명성의 추락자]
인자하신 광명의 주를 증오하는 초월자이다. 모든 종류의 성직자와, [신]을 자칭하는 모든 초월자의 대적자.
그가 나에게 건내준 의뢰는, 다음과 같았다.
-의뢰: 순결한 빛의 주를 섬기는 성녀를 타락시키기 (0/1)
-보상: 무한한 마력의 샘(S)
음탕한 혼돈이 전해준 의뢰도 있었다.
-의뢰: 위기를 최대한 재미있게 극복하기 (0/1)
-보상: 최상급 마력 운용 (S)
나는 백미러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두 각성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로에게 기대면서, 파근파근 숨쉬며 곤히 자고 있는 그들의 모습.
'...지금이, 조작을 할 기회다'
나는 유리아나와 소피아에게 마력을 투사해 그들의 상태창을 조작하려고 했다.
벽
그랜드캐니언을 맨 손으로 밀어내서 협곡을 넓히려는 시도처럼 느껴졌다.
따로 대비를 해 온 듯, 그들의 정신 방벽은, 가벼운 침입마저도 저항하려 하고 있었다.
이걸 뚫어내려면, S급 각성자 10명 정도가 되는 마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규격 외의 정신방어였다. 규격 외의 헌터에게 어울리는.
그리고 내게는, 규격 외의 특성이 있었다.
'[룰 브레이커]'
마음 속으로 특성을 발동한 나는, 상태창 조작에서, 헌터의 등급에 비례해 마력이 소모한다는 것을, 뒤집었다.
특성이 잠시 뒤틀리듯 흔들리더니, 비례한다는 설명이 [반비례]로 바뀌었다.
'대단한데...'
어째서 룰 브레이커가 몇년간 미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인지가 바로 이해되었다.
특성을 제약하고 규제하는 근본적인 몇가지들을, 마음대로 변화 시킬 수 있으니.
잠시동안이나마, 상태창 조작은, S급 헌터를 F급 각성자를 조작하는 것처럼 쉽게 만들었다.
성녀와 예언자의 높은 등급은, 오히려 지금은 그녀들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몸에 두른 정신 방어 아티펙트들도 있었지만, 이지혁의 무식한 마력량과, 변화된 특성 앞에 무너져 내렸다.
단단하게 보호되던 그들의 정신이란 방벽은,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내 마력에 뚫리고 말았다.
마치 흰 비커에 빨간색 와인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 새햐얗던 그들의 정신이, 검붉고 추악한 욕망으로 점철된 상식으로 덮여지고 있었다.
평소의 그들이라면 치를 떨면서 거절할, 음란하고 비상식적인 새로운 상식들.
그들의 순결한 정신을 마구 범하며, 나는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눈 앞에 빨간 신호등 불빛에 잠시 멈춰선 나는, 소모한 마력 때문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서로에게 기댄 체, 아기 동물들처럼 귀엽게 자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얗고 밝은 표정의 순수한 성녀를 보니 머릿속에, 어릴 적에 다니던 교회에서 들은 성가 하나가 떠올랐다.
"고요한 밤...거룩한 밤...♫"
순백의 원피스가 성녀 소피아의 호흡에 맞춰서 위아래로 흔들린다.
"...아기 잘도잔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자는 두 여인들을 보면서, 이지혁은 콧노래를 불렀다.
"...아아기 잘도잔다..♫"
파근파근 차 안에 울리는 그녀들의 숨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며, 이지혁은 차를 아카데미 안으로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