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 주가 지났다. 그동안 수현은 온갖 핑계를 대며 미팅을 보류하고 기우와 메일로 작업물을 주고받았다. 그는 꾸준히 만나서 이야기하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곤란할 만큼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대체 박 작가님은 무슨 조사를 받은 걸까. 새벽 두 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바라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난번에 순경에게 들었던 실종 사건과 관련된 조사인 건가. 설마 박 작가님이 범죄자라서 조사받는다든가….
“에이….”
쓸데없는 생각은 이쯤 해야겠다. 이게 다 이 원고 때문이다. 수현은 그동안 열 번도 넘게 읽은 기우의 원고를 뒤적이며 끙, 앓는 소리를 뱉었다.
지금까지 출간했던 것들은 신작에 비하면 약한 축에 속했다. 전작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끔찍한 묘사들은 마치 소설 속 내용이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실감이 나서, 아직도 원고를 읽으면 소름이 돋았다.
처음 읽을 때는 겁에 질려 부모님 사이에서 겨우 완독할 수 있었다. 준석이 곁에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바쁜지 연락이 통 없었다.
그렇게 여러 번 읽다 보니 이제는 늦은 시간에 방안에서 혼자 읽을 수는 있는 정도는 되었다. 아직도 무섭긴 하지만.
기우가 요청한 삽화를 체크하던 수현은 문득 스치는 의문에 다시 한번 원고를 훑었다.
『피그말리온』의 주인공 원우는 자신이 꿈꾸는 완벽한 이상형의 여자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다.
내가 만들까? 내가 원하는 손, 내가 원하는 다리, 내가 원하는 얼굴을 모아서 만들면 그게 곧 내 이상형일 텐데.
그때부터 원하는 부위를 찾기 위한 원우의 엽기적인 살인이 시작되고, 도시는 특정 부위만 도려가는 엽기적인 살인마의 등장으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받은 원고는 전체의 삼 분의 이쯤 되고, 앞으로 살인은 한번 남았으며, 그 이후 스토리는 고민 중이라고 이 주 전 미팅 때 들었다.
원고에 등장한 살인 행위는 여섯 번. 주인공 원우는 손, 발, 다리, 팔, 몸통, 그리고 머리까지 원하는 부위를 얻었다. 뭔가 이상한데? 잠깐 생각하던 수현이 연습장에 토막 난 부위들을 대충 그려 넣었다.
“나머지 하나는 뭐지?”
여섯 번의 살인으로 얻어낸 시체 토막을 이어 붙이면 이미 사람 하나가 완성된다. 아직 한 번의 살인이 더 남았는데, 그건 어느 부위를 위한 거지?
Rrrrr- Rrrrr-
그때, 늦은 시간이라 일부러 진동 모드로 바꿔둔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현은 흠칫 놀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준석일까 하는 기대를 잠깐 했지만, 아쉽게도 기우였다.
“네, 작가님.”
둘 다 새벽까지 작업하는 스타일이라 늦은 시간에도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어색함 없이 전화를 받았다.
- 저… 강 작가님. 저 좀 도와주세요….
“네?”
기우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벽이라 그렇다기엔 평소와 달라, 무슨 일이 있느냐며 걱정하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글이 안 써져요…. 완전히 막혔어요. 일주일 넘게 진도가 나가질 않아요.
기우가 이렇게 한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만나지 못해 미안해하는 수현에게 늘 다정하던 그가 오늘따라 초조해 보여, 수현은 조금 당황했다.
“괜찮으세요, 작가님?”
- 이제 한 명만, 한 명만 죽이면 되는데….
누가 들으면 진짜 살인자인 줄 알겠다. 낮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뱉어대는 게 좀 음침하게 들렸지만, 작업이 안될 때 얼마나 힘든지 아는 수현은 그를 충분히 이해했다.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달래듯 하는 말에, 기우가 중얼거리던 걸 멈추고 작은 탄식을 뱉었다.
- 죄송해요. 강 작가님도 바쁘실 텐데…. 당황스러우시죠. 죄송해요.
“괜찮아요. 도울 수 있으면 서로 돕는 게 좋죠.”
- 마감 기한은 다 되어 가는데 진도가 안 나가니 답답해서….
“이해해요. 저도 마감 때면 힘든걸요.”
기우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심호흡하듯 두어 번 숨을 내쉬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 작가님 잠깐 시간 되세요?
“… 네?”
- 괜찮으시면 간단하게 맥주 한잔 어떠세요. 제가 댁으로 갈게요.
“지금요?”
놀란 수현이 시계를 살폈다. 새벽 두 시 사십오 분. 누구를 만나기엔 지나치게 늦은 시간이다. 더군다나 이 주 동안 그를 만나지 말라던 준석의 당부가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너무 늦었는데….”
- 아무래도 그러시겠죠. 죄송해요. 제가 무리한 요구를 드렸어요.
수현은 괜히 그에게 미안해져 볼을 긁적였다. 마침 그녀도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던 터라 잠깐 망설이며 연습장을 내려다보았다.
사실상 준석이 말했던 이 주는 지나지 않았나. 아직 연락이 없어서 찜찜하지만, 준석이라면 바빠서 잊어버렸을 확률이 높다. 여태 잘 지내냐는 연락 한 통 없는 걸 보면 뻔하지. 수현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 그럼 이만 끊겠,
“작가님.”
- 네?
“마침 저도 여쭤볼 게 있었어요. 잠깐이면 될 거 같아요.”
조용하던 기우가 이내 부드럽게 대답했다.
- 어디로 가면 될까요?
* * *
새벽 세 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시간이다.
준석은 마약 밀매 현장에서 확보한 사진을 나열해놓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것들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사진은 총 열아홉 장. 이 중 열둘은 실종 신고가 들어와 있었고, 나머지 일곱은 도저히 신원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을 납치했으리라.
실종 신고가 접수된 열두 명 중 행적을 파악한 건 고작 한 명에 불과했다. 그게 박기우의 레스토랑이었다. 두 달 전,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모습이 지나가던 차량 블랙박스에 찍혀있는 걸 어렵게 확보했다.
레스토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현과 박기우를 마주친 건 상당히 좆같았으나, 어쨌든 준석은 조사 과정에서 레스토랑 지하실을 발견했고, 거기서 묘한 흔적을 찾아냈다.
마치 손톱으로 긁은 것 같은 미세한 자국이 나무로 된 지하실 문에 나 있었다. 얼핏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감히 수현에게 고백을 했다는 기우 때문에 한껏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
레스토랑 직원들이 오가다 긁혔을 확률이 높았지만, 어쨌든 한번 눈에 들어오면 거슬리기 마련이라 그는 지하실을 쥐 잡듯이 뒤졌다.
곧 지하실에서 머리카락 한 가닥을 발견했는데, 하필 그 머리카락이 실종자와 같은 금발이었기에 곧장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이 역시, 레스토랑 직원 중 금발이 있을 확률이 높았으나, 어쨌든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아직도 결과 안 나왔어?”
심지어 그 거슬리는 새끼가 레스토랑 소유주라고 하니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우 형사, 십 분에 한 번씩 묻고 있는 거 알아? 과수대도 바쁜가 보지.”
“오늘로 딱 이 주째야. 야, 나 과수대 다녀올게.”
하필 수현과 일로 얽혀 있는 놈이다. 준희의 카페도 갔다고 한다. 수현과 가족들이 연관되어 있으니, 레스토랑 지하에서 발견된 머리카락과 실종자들 간에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두 발 뻗고 잘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벌떡 일어나는 준석을 동료 형사가 붙잡아 도로 앉혔다.
“우 형사 며칠째 밤새워서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 잠깐 눈이라도 붙여. 결과 나오면 깨워줄게.”
이 주 동안 대현과 번갈아 가면서 기우의 집 앞에서 잠복하는 중이었다. 교대하고 막 서로 복귀하자마자 다시 나가려는 준석을 팀장도 말렸다.
“작작 해, 작작. 듣자 하니 우 형사 여자 친구가 박기우랑 친하다면서? 그래서 괜히 질투하는 거야?”
“박대현, 이 새끼가….”
“잘 나가는 작가던데, 그런 양반이 뭐하러 사람을 납치해.”
“근데 박기우 책 보면 좀 찜찜하기도 해요.”
동료 하나가 제 동생이 좋아해서 집에 몇 권 있는 걸 읽어 봤다며 으스댔다.
“스릴러 작가잖아요. 묘사가 아주… 이 새끼 진짜 사람 죽여본 거 아닌가 싶다니까요.”
“그래?”
준석은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기우를 소환해 참고인 조사도 했고 매일 잠복 중이나, 솔직히 수상한 부분은 없었다.
지금껏 보기에 그는 평범한 작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글 쓰는 데만 할애하는지, 가끔 편의점을 갈 때를 제외하곤 집 밖에 잘 나오지도 않았다. 기우와 공동명의로 올라가 있는 다른 한 명은 시골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였다. 역시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도 왜 갈수록 불안한지 모르겠다.
Rrrrr- Rrrrr-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준석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재빨리 꺼내 보니 대현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왜.”
- 우 형사, 박기우 어디 가는데?
“이 시간에? 편의점이라도 가는 모양이지.”
-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본인 차에 탔어.
준석이 눈썹을 꿈틀대는 찰나, 옆자리 동료 형사가 전화를 받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준석의 시선이 기민하게 들렸다.
“팀장님, 과수대 결과 나왔습니다. 팩스 보낸대요.”
조금 전까지 농담 따먹기를 하던 동료가 얼굴을 굳히고 팩스 쪽으로 향했다. 급히 몸을 일으킨 준석이 동료를 앞질러 팩스 종이가 제대로 나오기도 전에 뜯어냈다.
- 뭐야, 결과 나왔대? 뭐래?
“씨발….”
“레스토랑 관계자들 전부 소환해.”
준석이 들고 있는 결과지를 확인한 팀장이 팀원들에게 말했다. 준석이 그대로 굳은 채 종이만 내려다보는데, 대현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 나 지금 박기우 쫓아가는 중인데, 이 방향이면 우 형사 본가 동네야.
“박 형사.”
[유전자 일치 99.96%]
준석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박기우 그 씨발 새끼 당장 붙잡아.”
- 뭐? 설마.
“그 새끼 유력 용의자야. 놓치지 마. 나도 지금 출발해.”
“현재로선 박기우가 제일 유력하지만, 이두파 놈들까지 잡아들여야 해. 박기우는 중간다리일 확률이 높아. 그러니까 우 형사, 진정하고….”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 나간 준석은 곧장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씨발, 씨발. 입에서 욕이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진심으로 박기우가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기를 바랐다. 차라리 질투심을 자극하는 게 낫지, 수현이 위험한 일에 얽혀 있어서는 안 됐다.
게다가 왜 이 늦은 시간에 그 동네에….
“박 형사. 박기우 어디쯤이야.”
- 우 형사 동네 사거리 앞이야. 여기서 직진 신호 받으면 십 분 내로 도착… 어?
“뭐야, 무슨 일인데.”
준석이 불안한 얼굴로 신호를 무시하고 핸들을 돌렸다.
- 좌회전하는데? 우 형사 동네 가는 게 아닌가 봐. 저 새끼 어디 가는 거지?
“뭐?”
- 일단 계속 따라갈게.
갑자기 방향을 돌렸다는 건 이상하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일단은 그를 잡아들이는 게 급선무라 준석도 액셀을 밟았다.
대현과 통화를 유지하며 기우를 검거할 위치를 가늠했다. 대현은 뒤에서 쫓았고, 준석은 앞으로 기우의 차를 막아서기 위해 핸들을 꺾어 골목으로 진입했다.
- 우 형사, 지금이야.
대현의 신호에 준석이 가차 없이 속도를 높였다. 좁은 골목을 뚫고 대로를 가로지르자, 달려오던 기우의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섰다. 고무 바퀴가 시멘트 바닥을 긁는 요란한 소리가 새벽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내려!”
거칠게 차에서 내린 준석과 대현이 운전석에서 기우를 끌어 내렸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기우가 두 사람을 돌아봤다.
“갑자기 뭡니까?”
“잠깐 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조사는 이미 받았,”
“입 닥치고 따라와!”
“우 형사.”
대현이 기우를 걷어차려는 준석을 만류하고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했다. 유력 용의자라는 말에 기우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준석이 또 발끈하며 달려들려고 해 대현이 간신히 말려야 했다.
“일단 팀장님께 보고드려.”
“저 새끼 심문은 내가 해.”
준석이 씩씩대며 아직 대현과 연결되어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통화를 종료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싸한 기운에 순간 준석의 표정이 굳었다. 이 새끼가 이 시간에 왜.
“뭐야, 무슨 일이야.”
- 우 형사님! 왜 이제 받으세요! 제가 전화를 몇 번이나 드렸는데요…!
핸드폰 너머로 이 순경이 다급하게 외쳤다. 혹시나 해서 그동안 수현의 집 앞에 잠복을 시켜두었다.
비틀, 불안을 감지한 준석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겨우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서 기우와 눈이 마주쳤다. 어렴풋이 기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우 형사님, 여자 친구분 납치됐어요…!
* * *
몸이 욱신거렸다.
“으….”
수현은 어디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부위에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린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둠이 내려앉은 지저분한 시멘트 바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난 지금…. 군데군데 파편이 떨어져 나간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현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흐읍…!”
수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창고 같은 곳에 있었다. 천 같은 게 둘려 입을 막고 있었으며, 팔다리가 결박된 채 쇠 다리가 달린 의자에 묶여 있었다.
당황한 수현이 발버둥을 치자 높이가 맞지 않는 의자가 흔들거리며 시멘트 바닥을 긁었다. 끽끽 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으으…!”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내부는 어두웠지만, 맞은편에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창문에서 달빛이 새어 들어와 약간의 식별이 가능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나무판자 따위가 전부였다.
“으읍… 읍!”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어떻게 된 거야. 패닉에 빠져 몸부림을 쳤지만, 단단히 결박되어 있어 소용없었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기억을 더듬었다.
늦게까지 작업을 하다가 의문점이 생겼고, 마침 연락이 온 기우와 만나기로 했다. 그가 온다는 시간에 맞춰 집 밖으로 나갔다.
새벽이라 동네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대문 앞에 서서 맞은편에 있는 준석의 집을 바라보았다. 잠깐 연락을 해볼까 말까 망설이며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러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고, 통화 중이라는 안내 맨트에 아쉬워하며 종료를 하는 순간 입이 틀어 막혔다. 기억은 거기에서 끊겼다.
“흐윽….”
납치. 납치를 당한 거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왈칵 울음이 터졌다. 왜? 누가? 뭐 때문에? 몸부림을 치자, 끈으로 묶여 있는 손목과 발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무서워… 무서워, 살려주세요.
“으으읍, 흑….”
준석아….
습관처럼 준석이 떠올랐다.
쿵-
그때, 쇠가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철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였다. 굉음에 놀란 수현은 울음마저 멈추고 굳어버렸다.
“여태 자기가 하더니, 이번엔 왜 우릴 시켜.”
“이번이 마지막이랬으니까 끝내고, 그 새끼 작업 칠까?”
“아서라. 돈줄 끊긴다고 형님한테 뒈질 일 있냐?”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에 수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덜덜 떨리는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서 덩치가 큰 남자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키가 더 큰 남자와 수현의 눈이 마주쳤다. 놀라서 몸이 크게 떨리자 의자가 끼익 댔다.
“깼네.”
가까이 다가온 남자들은 험악한 인상이었다. 키가 큰 남자가 느긋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겁에 질려 몸부림을 치자 키가 작은 남자가 쯧쯧 혀를 차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혔다.
“으읍!”
“너도 참 불쌍하다. 하필 그런 놈 눈에 띄었냐.”
“띌 만하네.”
웃음을 흘리며 하는 말에 저열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현은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의미 없는 반항이 우스운지 남자들이 낄낄댔다.
“일단 할 거 먼저 끝내자.”
“윽…!”
키가 작은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통째로 움켜쥐고 뭔가를 가늠하는 듯이 위로 당겨 올렸다. 수현의 목이 그의 움직임에 마구 휘둘렸다.
“야, 칼 줘봐.”
“읍!”
칼이라는 말에 동공이 커진 수현이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싫어. 무서워…. 살려줘. 준석아, 나 너무 무서워….
“가만히 있어, 씨발.”
“야야, 살살 다뤄. 그 또라이 새끼 요구대로 안 하면 돈 안 준다.”
“언젠간 내가 그 새끼 장기 털고 만다.”
“비리비리한 작가 새끼 몸에서 가져갈 게 뭐 있겠냐.”
“가뜩이나 짭새들 요새 눈에 불을 켜고 조직 감시 중인데, 이럴 때 씨발….”
“으읍!”
남자가 신경질 난다는 듯 머리채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건네받은 칼을 그녀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감촉이 뒷목에 닿았다.
“흐읍, 윽… 흡…!”
제발 살려주세요….
“아, 존나 반항하네. 약 남은 거 없냐? 재우는 게 편하겠는데?”
“없어, 새끼야. 그냥 하고 끝내.”
“으으…!”
“가만히 있어, 응? 아프게 안 할게.”
준석이 너무 보고 싶었다. 수현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살려 달라고, 오래전 달려드는 자동차로부터 그녀를 살려 주었듯, 이번에도 제발 살려 달라고.
미안해. 이기적이어서. 자꾸 목숨 빚지려고 해서. 그래도 준석아, 나 좀 살려줘. 죽기 싫어. 나는 평생, 네 옆에….
“이 정도면 되겠지?”
뭔가를 가늠하듯 목 뒤쪽에서 칼을 움직이던 남자가 말했다. 내내 지저분한 시선으로 수현을 내려다보던 키 큰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질끈, 두 눈이 감겼다. 그때였다.
“그럼 자른,”
멀찍이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순간 수현의 눈이 커졌다.
“씨발, 짭새 새끼들이 어떻게…!”
남자들이 당황한 듯 시선을 교환하는 찰나였다.
탕-! 총성이 울렸다.
“아악!”
동시에 수현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사삭- 귓가에서 뭔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날아간 칼이 시멘트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인 수현의 시야에 잘려 흩어진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씨발!”
키 큰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외쳤다. 괴성에 수현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그 순간, 당황한 수현의 눈이 창문에 멈췄다.
“으… 으읍… 흑….”
준석아….
정말로 그가 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의 준석이 그녀 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앞에 있는 키 큰 남자를.
탕-!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악! 씨발!”
키 큰 남자가 오른쪽 무릎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창고 문이 열리며 사이렌 소리와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졌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시야에 빛이 가득 차 눈이 질끈 감겼다.
“이 새끼들 당장 연행해!”
대현의 목소리가 들렸고, 여러 명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수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강수현!”
그리고 다급한 준석의 목소리를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여전히 캄캄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잠깐 멍하게 있던 수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흐윽… 주, 준석아….”
구하러 왔었다. 분명히 그녀를 구하러 온 걸 봤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렇게 캄캄한 곳에 있는 거야.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복도에서 조명 빛이 새어 들어왔다.
움찔, 크게 몸을 떨며 고개를 돌린 수현은 익숙한 인영에 안도의 울음을 뱉어냈다.
“준석아….”
저벅저벅-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 탓에 발소리에만 의지해 준석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아, 혹여 그가 구하러 와준 것이 꿈이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나… 나 무서워….”
울면서 겨우 뱉은 말에 발소리가 뚝 멎었다. 서서히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며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이 닿을 거리에서, 준석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준석아….”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수현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팔에 연결되어있는 링거줄을 발견했다. 병원이구나. 눈가를 닦아내며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때, 준석이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수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힘없이 떨구고 있는 반대쪽 손을 붙잡자, 잘게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수현은 준석의 이런 모습을 안다.
울고 있다.
“준석아….”
소리 없이 우는 준석의 모습에 수현의 얼굴도 덩달아 구겨졌다.
여태 준석이 그녀 앞에서 울었던 건 딱 두 번뿐이었다.
열다섯, 그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을 때와 스물일곱, 존경하는 선배이자 누나의 남편이며 지은이의 아버지였던 현태가 순직했을 때. 두 번 다 준석은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수현은 그의 옆에서 같이 울었다. 숨죽여 우는 준석의 손을 붙잡고 대신 엉엉 울며 그의 곁을 지켰다.
“흐윽….”
울음이 터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잡은 손을 좀 더 움켜쥐고 소리 내 울며 살아 있음에 안도했다.
“준석아… 나, 나 죽을까 봐… 너무 무서워서….”
“…….”
“너 다시는 못 볼까 봐….”
엉엉 울며 말하자, 준석이 희미한 숨소리를 뱉어냈다. 얼핏 울음이 섞여 있었다.
준석이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빼내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훔쳐냈다. 이제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기를 바랐지만, 준석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준석아…!”
다급히 부르자, 준석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아주머니, 아저씨 와 계셔.”
“어디가….”
“난 당분간 못 올 거 같다.”
그가 낮게 말했다. 수현은 갈 곳 잃은 손을 여전히 허공에 둔 채, 그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내가 다 족칠게.”
“가지 마….”
“너 이렇게 만든 새끼들 가만히 안 둬.”
“준석아,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준석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수현은 애타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같이 있어주라… 응?”
“… 금방 올게.”
그가 조용히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좋아해….”
뚝, 걸음을 멈춘 그의 등에 대고 수현은 오랜 시간 감춰 왔던 마음을 고백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를 붙잡고 싶었다.
“나… 나 너 좋아, 좋아… 흑, 좋아하는데….”
“…….”
“그러니까 그냥 같이 있어 주면… 나는, 범인, 흐윽… 잡는 것 보다, 같이….”
항상 고백하는 날을 상상했었다. 아주아주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설렘을 가득 담아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투박한 준석마저 마음이 사르르 녹을 만큼 달콤하게.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하지만 이건 멋없는 애원에 불과했다. 같이 있어 달라고. 나는 네가 좋아서, 너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고.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날 좀 지켜 달라고.
세상에 이렇게 이기적이고 한심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금방 올게. 미안해.”
그래서일까. 고백에 대한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이내 그가 병실을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수현은 눈물을 쏟아냈다.
* * *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과 준석의 어머니, 준희, 지은이까지 그녀의 병실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준석은 그날 밤 그렇게 간 이후로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건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서 대현이 집을 찾아온 뒤로는 준희가 나서서 제 동생을 원망했다.
“우준석 진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내?”
“언니, 지은이 깨겠다.”
어머니와 준석의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간 사이, 준희가 카페 문까지 닫고 곁에 있어 주었다.
수현은 한숨을 내뱉는 준희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무릎에서 잠들어 있는 지은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다 문득 짧아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자, 준희가 안쓰럽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수현아, 언니랑 붙임머리 하러 갈까?”
퇴원하자마자 납치 현장에서 엉망으로 잘린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귀 끝에서 살랑거리는 단발머리가 낯설면서 허탈했다. 이렇게 잘릴 줄 알았으면 단발을 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단발하고 싶었어. 괜찮아.”
“응. 우리 수현이는 뭘 해도 예뻐. 언니 눈엔 다 예뻐. 삭발해도 예쁠 거야.”
“그래도 삭발은 좀….”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웃음이 지나갔다.
“하여튼 우준석 이 무신경한 자식… 언니가 연락하라고 혼낼게.”
“괜찮아. 바쁘잖아.”
다시금 꺼내는 준석의 이야기에 수현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준석에게 연락이 없어서 속상하기도 했지만,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섣부른 고백을 한 뒤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상 거절당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는 상상은 수없이 해봤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니 막막한 심정이었다.
이대로 멀어지기에는 그와 함께해온 역사가 깊었고, 또 소중했다. 적어도 친구만은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수현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준희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수현을 품에 안아주었다.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상냥하게 달래주는 준희의 품 안에서 수현은 실연의 아픔으로 울었다.
* * *
조직폭력배의 납치 및 인신매매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특히 이번 일에는 유명 소설 작가 박기우가 얽혀 있어 더 화제였다.
경찰은 수사 끝에 박기우가 이두파에 청부 납치를 의뢰했으며, 사들인 사람들의 신체 일부분을 훼손해 자신의 노모가 거주하는 시골 마을의 한 폐가에 전시해두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박기우의 컴퓨터에서 발견한 신작 『피그말리온』 원고는 그의 살인 행각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장을 발견한 준석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토막 난 신체 부위는 전부 다른 사람의 것이었으며, 조립하듯 한 여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함께 있던 대현은 그날 먹은 김밥을 게워내야 했다.
“아깝네요. 딱 하나만 있었으면 완성이었는데.”
사건 경위를 밝히는 심문 도중 태연히 내뱉는 말에 준석은 눈이 뒤집혀 그를 반쯤 죽여 놓았다. 도중에 팀원들이 막지만 않았으면 정말 제 손으로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그 하나가 누굴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온몸이 결박되어 창고에 갇혀있던 수현을 생각하면 진심으로 박기우를 죽일 수도 있었다. 준석의 흉흉한 기세에 동료들도 기가 질린 상태였지만, 박기우는 피떡이 된 얼굴로 덤덤히 말을 이었다.
“수현 씨 긴 머리, 딱 제 취향이거든요. 하필 경찰이랑 친구일 게 뭐야.”
“이 씨발 새끼가…!”
그의 입에서 수현의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붙잡고 있는 동료들을 죄다 뿌리치고 달려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박기우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차려는 순간, 준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준석이 잠깐 주춤한 사이 대현을 포함한 동료 셋이 그의 양팔과 다리를 붙잡아 심문실을 빠져나왔다.
“씨발, 안 놔? 놔!”
“우 형사, 진정해. 저 새끼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감옥 신세야. 그러니까,”
“내가 죽여 버릴 거니까 이거 놔!”
Rrrrr- Rrrrr-
여전히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대현이 씩씩대는 준석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우 형사 누님인 거 같은데, 전화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준석의 동작이 뚝 멎었다. 그제야 동료들이 그를 놓아주었다. 준석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할 생각도 못 하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 있어?”
- 통화 괜찮아?
“괜찮아. 말해. 무슨 일인데.”
수현이 조금만 이상한 모습을 보여도 연락하라고 말해둔 터라 마음이 조급했다.
상담 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고 경과는 나쁘지 않다고 했지만, 그런 일을 겪었으니 트라우마가 상당하리라. 가뜩이나 마음이 여린 녀석인데.
- 심각한 건 아닌데, 수현이가 잠을 잘 못 자. 자도 선잠만 자는 거 같고, 꿈도 계속 꾸는지 자주 뒤척여. 괜찮아지겠지?
“… 괜찮아질 거야. 나도 일 거의 마무리되고 있으니까, 곧 휴가받아서 갈게. 그때까지만 누나가 옆에 있어 주라.”
-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도 많이 밝아졌어. 처음에는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요즘은 덜해.
“…….”
- 그리고 너 수현이한테 연락 좀 해. 아무리 바빠도 너무한 거 아니야?
실제로 잠깐 눈도 붙일 수 없을 만큼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이긴 했지만, 그녀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쉽사리 연락은 하지 못했다. 수현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없었다. 지켜 주지 못한 주제에 무슨 염치가 있을까. 박기우와 이두파를 잡아 처넣기 전엔 수현을 볼 면목이 없다.
-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수현이도 은근히 네 연락 기다리는 눈친데….
“알아서 할게.”
준석은 어릴 때부터 겁이 없었다. 그 흔한 귀신 이야기에도 심드렁했고, 놀이기구 같은 건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겁에 질려 제 손을 꼭 잡아 오는 수현을 구경하기 바빴다.
살면서 두려웠던 순간은 몇 안 되었다.
아버지와 매형이 돌아가셨을 때 앞으로 자신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게 막연히 겁이 났고, 수현을 덮치려는 트럭을 발견했을 때 그녀가 죽을까 봐 무서웠고, 운동을 못 하게 되었을 때 잠깐 막막한 미래가 걱정되었다. 그 외에는 대체로 무던하게 받아들여 왔다.
눈앞에서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수현을 봤을 때는 어땠던가. 사지가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다. 저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목을 파고들까 봐. 자신이 조준을 잘못해 총탄이 조폭 새끼가 아닌 그녀의 머리를 뚫을까 봐.
그런데도 대신하겠다는 대현을 뿌리치고 그가 총을 든 이유는 하나였다.
수현은 반드시 자신이 구해야 했다. 그건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경찰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몸 쓰는 것밖에 없어서 어쩌다 보니 경찰을 한 것뿐이었는데, 만약 아니었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 뉴스 봤어. 수현이, 어떡할 뻔했어…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수현이….
준석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수현은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 싸늘한 주검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역한 기분에 구역질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 준석아, 너도 몸 잘 챙기고… 이번 일 끝나면 좀 쉬어. 응?
“끊을게. 무슨 일 생기면 다시 연락해.”
- 그래. 고생해.
전화를 끊자마자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한차례 속을 게워낸 준석은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쫄지 마, 우준석. 무사하잖아. 무사하면 됐어. 쫄지 마. 스스로를 세뇌했다.
* * *
“준석아….”
“깼냐?”
“주, 준석아, 미안해…. 나 때문에….”
“뭐가 너 때문이냐.”
“나 데리러 오다가… 나 때문에 네가….”
“됐어. 너만 멀쩡하면. 아, 이딴 거로 자꾸 질질 짜지 마. 네가 그러니까 내가 불쌍해 보이잖아. 이까짓 게 뭐라고 그러냐.”
사고가 나던 날 꿈을 또 꾸었다. 이번에는 거기서 깨어나지 못했다. 준석이 우는 수현을 되레 달래주며 멋쩍게 볼을 긁었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 아, 그만 좀 울어.”
“그래도 네가 복싱 얼마나 좋아하는지… 흑,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뭐… 복싱보단, 네가 더 중요하니까 됐어.”
수현이 울다가 고개를 들자 그가 투박하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 너 잃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아.”
“준석아….”
그 말에 감동받아 와락 끌어안았다. 뻣뻣하게 굳어서 품을 내주는 그를 안고 수현은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흑….”
잠에서 깨어나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꿈이 그대로 반영된 듯 구겨진 얼굴을 펴고 눈물을 닦아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침대 밑에서 나란히 자고 있는 준희와 지은이가 보였다. 아직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녀를 위해 준희는 매일 곁을 지켜 주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일곱 시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이 깨지 않게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수현은 뜨거운 눈가를 문지르며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부모님도 주무시는지 집 안엔 정적만 일었다.
“…….”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히 준석이 떠올랐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한 달 내내 그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가끔 준희와는 연락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잦지는 않은 듯했다.
준석의 어머니와 준희는 그런 준석의 태도에 대해서 수현의 가족에게 미안해했지만, 준석이 그녀를 구해준 것을 아는 부모님으로서는 오히려 고마워할 뿐이었다.
사건 직후 두 가족 사이에는 잠깐 미묘한 어색함이 흐르기도 했다. 다행히 준희와 지은이가 수현과 함께 지내 이제는 분위기가 많이 완화된 터였다. 가족 간의 왕래마저 끊어지면 준석과 정말 멀어질 거 같아서 내심 걱정했던 수현은 안심했다.
잠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제저녁에 부모님과 준희가 대화하는 걸 들었다. 조만간 그가 집에 올 거 같다며 준희가 말했었다. 사건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그녀가 납치됐던 사건은 생각보다 큰일이었던지 종일 뉴스에 나온다고 했다. 부모님이 괜히 보지 말라며 당부하기도 했고, 그 사건을 직면할 용기도 없어서 수현은 일부러라도 TV와 인터넷은 아예 보지 않았다.
다만 그날의 정황으로 유추컨대 이 사건이 기우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아, 멀리하라는 준석의 충고를 무시한 것을 후회했다.
많이 괜찮아지긴 했지만, 수현은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고, 몇 주에 걸쳐 트라우마 치료도 해야 했다. 그럴 때는 곁에 없는 준석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범인을 잡든 말든, 같이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는데.
수현은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나 또 그 꿈 꿨어.]
메시지 창에 글자를 하나하나 입력하고 한동안 망설였다.
“너 또 그 꿈 꿨지.”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너 이럴 거 같아서. 사고 이야기 나오는 날마다 꿈꾸잖아.”
투박한 다정함이 새삼스럽게 그리웠다. 고백하지 말걸. 그러지 말걸. 그랬으면 이런 거로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친구니까, 친구로서 의지하는 척, 늘 하던 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날의 섣부른 고백 때문에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후회하며 수현은 메시지를 지웠다.
Rrrrr- Rrrrr-
그때, 메시지를 미처 다 지우기도 전에 전화가 울렸다. 수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잘못 본 건가 싶어 잠깐 눈을 비비다, 끊어질까 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 여보세요.”
- 나야.
피로가 가득 담긴 까칠한 목소리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듣는 준석의 목소리였다.
- 나 집 앞이야.
“…….”
- 잠깐 얼굴 볼까.
무뚝뚝하지만 조심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미묘한 거리감이었다.
그와 잠깐 멀어졌던 학창 시절이 떠올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멀어지고 싶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멀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수현이 대답이 없자, 잠깐 말이 없던 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금방 가봐야 하는데, 잠깐 시간 나서 들렀어. 나올 수 있겠어?
“… 아니.”
수현은 머뭇대다 말을 이었다.
“나… 밖에 나가는 건, 좀 무서워서….”
- 아….
준석이 화를 삼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알았어. 그럼 나오지 마. 내가 들어갈게.
“응….”
- 금방 가.
전화를 끊고 잠깐 방 쪽을 돌아봤다. 혹시 다들 깰까 봐 문을 꼼꼼히 닫고, 현관문 앞을 서성이자 이내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어떤 얼굴로 봐야 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까.
똑똑-.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며 그 앞에 서 있는 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눈이 마주치자, 어찌할 겨를도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현은 급히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잠깐이지만 마주 본 준석의 얼굴은 눈에 띄게 상해있었다. 그동안 많이 바빴구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들고, 고백을 했던 게 떠올라 창피하기도 했으며, 오랜만에 보니 반가움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어댔다. 정신이 없었다.
“뭐, 뭐라도 마실… 래?”
“아니. 금방 가봐야 돼.”
준석이 덤덤하게 대꾸하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수현은 그 앞에서 잠깐 우왕좌왕하다 그와 멀찍이 떨어진 일인용 소파에 걸터앉았다. 준석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몸은 괜찮아?”
다른 가족들이 깨지 않게 그가 조용히 물었다. 수현은 괜히 무릎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고개만 끄덕였다.
숨 막히게 어색하다. 정말 어떡하지. 준석과 이렇게 어색해지는 건 무엇보다 싫은데, 편하게 대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원래 준석의 앞에서 어떻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수현은 입 안 여린 살을 씹었다.
“얼굴 좀 보여줘. 오랜만에 보는 건데.”
“…….”
“강수현, 나 안 보고 싶었어?”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도 묘한 서먹함이 섞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 혼자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의식하느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 준석이 헛기침을 했다. 불편해하는 것 같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수사 거의 마무리 됐어. 다 끝났으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
“응….”
잠시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떡하지. 준석을 잃고 싶지 않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삼 일 휴가 냈어. 뭐, 일이 생기면 다시 출동해야 하긴 하는데 경찰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삼 일쯤은 안 나가도 될 거야.”
“응….”
대화가 숨 막히게 흘러갔다. 정확하게는 대화라기보다 준석의 일방적인 통보에 불과했지만.
휴가라는 말에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수현은 연신 땀이 차오르는 손바닥만 닦아냈다.
“화났어?”
어색한 공기 속에서 준석이 물었다. 살짝 고개를 비틀어 바라본 준석의 얼굴에는 묘한 초조함이 흘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도로 고개를 숙이자, 그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다시 심장이 쿵, 떨어졌다. 더 머뭇대면 안 되겠다. 이러다가 정말 돌이킬 수 없이 사이가 멀어질지도 모른다. 강수현, 정신 차려.
“미안해. 너한테 그런 일 생기지 않게 내가 잘 지켰어야,”
“준석아.”
“어?”
울고 싶었다. 솔직히 무르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한 고백인데, 오래 품어 온 마음인데….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 좋자고 그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저번에 병실에서 말했던 거….”
꿀꺽-. 준석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수현은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거… 그거 못 들은 거로 해주라.”
“… 뭐?”
“그거… 내가 잘못 말한 거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우리 계속 친구로….”
“강수현.”
준석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준석이 제 무릎에 팔을 걸치고 고개를 숙였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해.”
“…….”
“무서워서 못 했어.”
그가 고개를 들어 수현과 눈을 마주했다. 뭐가 무서웠냐는 물음이 목구멍에 걸렸다.
“아픈 데 없어? 잠은 잘 자고?”
“응….”
“거짓말.”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움찔, 몸을 떨며 소파에 몸을 묻자, 가만히 내려다보던 준석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수현의 머리카락 끝에 닿았다.
“미안해.”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준석이 잠깐 속상하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
그의 손이 천천히 볼 쪽으로 옮겨졌다. 부드럽게 얼굴을 감싼 손바닥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죽어도 너 다치게 안 해.”
천천히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준석이 멍하니 있는 그녀의 코에 입을 맞췄다. 그 감촉에 퍼뜩 수현의 시선이 들렸다.
“그러니까 고백 무르지 마.”
문득 그가 고개를 기울여 왔다. 넋을 놓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달칵-.
“삼촌?”
등 뒤에서 들리는 지은이의 목소리에 준석의 행동이 멎었다. 멍하니 있던 수현도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순간적으로 밀려난 준석이 비틀대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삼촌이야?”
“그래, 삼촌이야.”
지은이가 눈을 비비며 졸래졸래 다가오자, 준석이 한숨처럼 웃었다.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조카를 품에 안은 준석이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지은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응? 방금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삼촌 좀 도와주지.”
“우웅?”
“아무것도 아니야. 자. 자장자장.”
수현은 뜨거워진 얼굴로 지은이를 다시 재우는 그를 바라봤다. 방금 뭐였지? 숨 막히던 공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준석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라서 시선을 피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준석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도 재워줄까?”
“…….”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에도 아무 말 못 하고 멍청하게 있었다.
* * *
“아주머니, 저 언제 아들 삼아 주실 거예요?”
“지금부터~. 밥 더 먹을래?”
“작작 좀 먹어!”
“아, 누나는 장사하러 안가? 강수현 옆에 내가 있을 거니까, 넌 이제 가라.”
“이게?”
“언니….”
수현은 준석에게 달려들려는 준희를 간신히 붙잡았다.
겨우 일을 끝내고 휴가를 받아 집에 온 준석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밥을 먹었으면 좋겠는데, 준희는 그가 오자마자 등짝부터 때리고 봤다. 고생한 애를 왜 때리냐고 나무라고 싶었지만, 준희라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수현은 그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중이었다. 준석이 집요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수현은 모른 척 괜히 준희 옆에만 붙어 있었다.
“삼촌. 또 일하러 가?”
소파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던 지은이가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와 준석에게 안아 달라 손을 뻗었다. 준석이 히죽 웃으며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카를 품에 안았다.
“아니. 삼촌 놀 거야.”
“삼촌 놀아?”
“응.”
“지은이랑?”
고개를 갸웃대는 지은이의 모습에 준석이 윽, 소리를 내며 이뻐 죽겠다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수현은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평화롭고 익숙한 풍경을 보는 건 좋은데, 어색해서 죽을 맛이었다.
“삼촌 지은이랑 놀아?”
준석이 지은이의 볼에 뽀뽀하며 그녀를 돌아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삼촌은 수현이랑 놀 거야.”
태연히 뱉는 말에 조금 놀라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수현아, 뭐 하고 놀지 생각해 봐.”
준석이 지은이에게 말하듯,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장난기가 배인 목소리였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은이는?”
“다음에 삼촌이랑 놀이동산 가자. 지금은 강수현이랑 놀아 줘야 돼.”
“응!”
“야, 수현이 귀찮게 하지 말고 넌 집에 가서 잠이나 자.”
“잠은 누나나 자.”
투닥대는 남매를 뒤로한 채, 메일을 확인할 게 있다는 핑계를 대며 방으로 도망갔다. 계속 거기 있다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방문을 닫자마자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식히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혼란스러웠다. 그날 그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준석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여느 때처럼 가볍고 장난스러운 태도에 수현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고백을 무르지 말라던 말의 의미를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준석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럼 저렇게 무덤덤할 수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고백을 무르지 말라는 말만 했지,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들어간다.” 하고 내뱉는 목소리는 분명 준석의 것이었다. 당황한 수현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왜… 왜?”
왜 밥을 먹다 말고 들어왔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수현은 몸을 일으켜 방구석에 있는 책장으로 도망갔다.
“메일 확인은 다 했어?”
“어, 뭐….”
“그럼 이제 나랑 놀자.”
준석이 그녀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너 피곤하지 않아? 가서 좀 자. 얼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남는 게 체력이라. 근데 뭐 찾냐?”
“그냥….”
말을 잇기도 전에 준석이 훌쩍 다가왔다. 움찔하며 책장 쪽으로 더 붙었다.
“뭔데? 말해. 꺼내줄게.”
“됐어. 알아서 할 테니까 내 방에서 좀 나갈래…?”
“뭐야. 오랜만에 보는데 이런 식이면 섭섭하지.”
그가 섭섭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가까워진 거리가 부담스러워서 슬그머니 팔을 밀어내자, 준석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 부끄러워하는구나.”
“뭐? 아,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엄청 부끄럼 타고 있는데.”
“좀… 비켜….”
쪽-. 불시에 준석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당황한 수현이 퍼뜩 고개를 들자, 그가 코앞에서 빙글빙글 웃었다.
“오, 더 빨개진다.”
“뭐 하는 거야.”
“우리 뭐 하고 놀지 생각해 봤어?”
사람 마음을 뒤집어 놓고 느긋하게 멀어진 준석이 물었다. 침대에 길게 몸을 눕힌 그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옆자리를 톡톡 치며 “누울래?” 하고 물어 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 하고 놀까?”
“… 휴가니까 좀 쉬어. 그동안 제대로 못 쉬었잖아.”
“그러니까. 같이 쉬자고. 나 삼 일 내내 너희 집에 있을 거야.”
“진짜?”
순간 저도 모르게 톤이 높아졌다. 그 낌새를 눈치챈 준석이 피식 웃으며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멋쩍어진 수현은 헛기침을 하며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냈다.
“가족들도 오랜만에 보는 거고, 너 다른 친구들도 많잖아. 바빠서 자주 못 보니까, 쉴 때 만나면 좋을 텐데 뭐하러….”
“네. 가식적인 대답 잘 들었습니다.”
“…….”
하여튼 사람 뻘쭘하게 하는 건 잘한다. 수현은 그를 흘기며 책장 모서리를 손으로 긁었다.
“모처럼 쉬는 건데, 나랑만 있어도 돼?”
“그러려고 휴가 낸 거야.”
망설임 없는 대답에 가슴이 뛰었다.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준석이 다시금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리 와. 같이 눕자.”
“뭐래….”
가족들이 버젓이 밖에 있는 데다가, 한 공간에 있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거 같은데 같이 눕자니. 도무지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젓자, 준석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상체를 조금 들었다.
“할 거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웬 내외야?”
“야…!”
조용히 하라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자, 그가 심술 맞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섹스 두 번밖에 못 하지 않았나?”
“조용히 해!”
“처음 약속은 다섯 번이었던 거 같은,”
다급히 다가가 입을 틀어막자, 그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수현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미쳤어?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 못 믿겠어.”
“지금 내가 널 건드리면 개새끼지.”
준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신경 쓰는 기미가 보였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무섭지만, 그래도 이젠 많이 극복했다. 덤덤한 준석의 얼굴에서 죄책감을 읽어낸 수현의 시선이 그의 오른쪽 어깨로 향했다.
난 괜찮은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가 어깨를 신경 쓸 때마다 구태여 시선을 분산시켰던 준석의 마음도 이랬을까.
“준석아.”
조용히 부르는 음성에 그가 시선을 들었다.
“우리 집에서 영화 보자.”
“그래.”
“나 매운 떡볶이도 먹고 싶은데 같이 먹자. 언니는 매운 거 못 먹잖아. 그래서 먹자고 말 못 했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희 언니 가게에서 파는 케이크도 먹고 싶어.”
“그 단 게 왜 좋냐.”
“맛있어.”
“뭔데.”
“치즈케이크.”
“알았어. 훔쳐다 줄게.”
순순히 대답하는 준석에게서 특유의 투박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오랜 시간 그녀의 마음속에 그가 자리할 수 있었던 근간.
불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주 본 준석이 조금 당황하는 찰나, 수현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잠자코 그녀를 안아 주었다.
“준석아….”
“어.”
“고마워.”
구해줘서.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뒷말은 삼켜졌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시간이 흘렀고, 상담 치료도 잘 받았으며, 가족들이 신경 써주어서 정말 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품 안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마음이 놓였다.
다시 한번, 수현은 생각했다. 그녀는 준석이 아니면 안 된다.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 * *
휴가 내내 곁에 있겠다던 말대로, 준석은 그날부터 곧장 그녀의 집에 눌어붙었다. 그 대신 자신의 집으로 내쫓긴 준희가 불평했지만, 계속 가게 문을 닫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순순히 물러났다.
준석이 있어 준 덕분에 부모님도 맘 편히 외출을 할 수 있었고, 수현은 그와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물론 준석은 아무렇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