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쏟아지는 태양 빛에 겨우 눈을 떴다. 밤새 준석에게 시달린 탓에 온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내내 운 탓에 눈가도 쓰라렸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몸을 일으킨 수현의 시야에 엎어져서 자고 있는 준석의 너른 등이 들어왔다. 뻐근한 팔을 겨우 들어 등짝을 찰싹 내리쳤다.
“아, 뭐야….”
“너, 네가 사람이야?”
“깼어?”
준석이 반쯤 감긴 눈으로 그녀의 팔을 당겨 품에 안았다. 미워 죽겠는데 벗어날 힘이 없어서 잠자코 노려보기만 하자, 졸린 와중에도 시선이 느껴지는 듯 그가 수현의 눈가를 문질렀다.
“부었네.”
“… 누구 때문인데.”
“여기도.”
준석이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수현의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두꺼운 기둥이 밤새 들락거려 퉁퉁 부은 음부를 쓰다듬는 손길은 퍽 담백했으나, 만지고 있는 남자가 변태였기 때문에 수현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만지지 마! 아파!”
“별로 안 한 거 같은데….”
“저기 굴러다니는 거나 보고 말해.”
수현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콘돔 다섯 개를 가리켰다. 그가 다섯 번 사정하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섹스는 뚝뚝 끊어진 장면만 떠오르는 걸 보면 도중에 기절한 것 같았다. 기절한 사람한테도 그 짓을 하다니, 정말 파렴치한이 따로 없다.
“알았어, 알았어. 빨아줄게.”
“뭐? 야!”
그가 선심 쓴다는 얼굴로 그녀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맹세컨대 빨아달라고 한 적 없고, 바라지도 않았다. 뻐근한 허리를 억지로 일으켜 머리를 밀어냈지만,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준석에게 당해낼 여지가 없었다.
“아… 쓰리단 말이야….”
“그러니까 침 발라 주잖아. 빨리 나으라고.”
“아흐으….”
뜨끈한 혀가 쓰린 구멍 주위를 느릿느릿 핥아댔다. 부어오른 살점에 성심성의껏 침을 발라주는 혀 놀림이 부드럽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이불에 몸을 묻고 그에게 아래를 내맡겼다. 나른한 기운에 쾌락이 스며드니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설레었다.
“한 번 더 할까?”
몸이 눅진해질 때까지 아래를 핥아준 준석이 유혹하듯 물었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지만, 수현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순순히 올라와 그녀를 품에 안은 준석의 아래는 그새 발기해있었다.
“근데 이런 식이면 우리 다섯 번 다 채운 거 아니야?”
“… 어?”
문득, 준석이 묻는 말에 수현은 당황했다.
섹스 횟수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의 사정이 기준이 되든 그녀의 절정이 기준이 되든, 지난밤으로 이미 다섯 번은 채워진 후였다.
다섯 번은 너무 적었나. 그가 이렇게 성욕이 넘칠 줄 몰랐기에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벌써 끝나면 안 된다. 섹스하기 전과 지금, 준석은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언제나처럼 짓궂을 뿐이다. 아직 몸 정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는 건데….
수현은 어떻게 해야 좀 더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핑곗거리를 찾느라 준석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웃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뭐, 사람마다 횟수 세는 기준이 다르다고 하더라. 어떤 사람은 하루에 열 번을 해도, 한 번으로 친대.”
“어?”
“그런 식이면 우리는 두 번인 건가?”
조금 억지스러운 카운트인 거 같지만, 수현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내가 말한 다섯 번도 그런 거였어.”
“아, 그런 거였어?”
“응.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두 번인 거야.”
“그렇구나. 두 번밖에 안 했구나.”
준석이 웃으며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바짝 세워져 퉁퉁, 흔들리는 성기에 잠깐 시선이 닿았다.
“그럼 지금부터 열 번을 더 싸도, 우리는 두 번째 섹스 중인 거네?”
“… 뭐?”
“우리 어제 새벽부터 했잖아. 아직 하루 끝나려면 멀었어.”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래도 지금 몸 상태로는 더 이상의 관계는 불가능할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너 바쁘다며….”
“그럼 다섯 번만 쌀게.”
“나도 가야 돼. 오늘 미팅 있다고 했잖아. 이제 씻고 나가야 안 늦어.”
“그럼 세 번.”
“허리 아파… 못해….”
쯧, 준석이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또 놀아났니 어쩌니 할 것 같아서 “진짜 미팅 있단 말이야….” 하고 웅얼대자, 그가 어쩔 수 없다며 그녀를 품에 번쩍 안아 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서로의 맨살이 닿는 것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수현이 최대한 가슴이 닿지 않게 허리를 뒤로 쭉 빼자, 준석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틈 없이 몸을 밀착시키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왜? 뭐 하려고?”
“씻겨 주려고.”
방긋 웃으며 그녀를 샤워 부스에 세운 준석이 샤워기를 손에 들었다. 수현은 어정쩡한 자세로 갑자기 씻겨 주겠다고 들이대는 그를 난감하게 올려다보았다.
좁은 샤워 부스 안에서 덩치 큰 준석과 마주 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알아서 씻을게, 나가.”
팔로 몸을 가리고 벽 쪽으로 붙어 섰지만, 준석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그가 그녀에게 샤워기를 쏘았다.
“아, 차가워!”
“차가워? 몰랐네.”
준석이 짓궂게 웃으며 대놓고 한쪽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수도꼭지를 중간쯤으로 돌렸다.
“이리 와.”
“내가 애야? 뭘 씻겨줘. 나가라고.”
“싫어.”
준석이 냉큼 수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고 그의 품 안으로 무너졌다. 가볍게 받아든 준석이 어깨 위로 물을 흘려주며 그녀의 아랫배에 제 좆을 문질렀다. 딱딱하고 뜨거운 생경한 감각에 몸을 뒤로 빼자, 준석이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고 몸을 밀착시켰다.
“아파….”
“내 좆도 아파.”
수현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힐끔 시선을 내렸다. 귀두 끝에 있는 구멍이 움찔대며 액을 흘려대고, 그녀가 꼼지락댈 때마다 좆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
그의 성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본 모양이었다.
“만져볼래?”
준석이 그녀의 호기심을 간파한 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퍼뜩 고개를 들자, 흥분한 듯 붉어진 얼굴로 내려다보는 얼굴에서 어쩐지 간절한 기미까지 보였다.
“만져도 돼.”
그가 유혹하듯 느리게 허리 짓을 하며 배 위에 좆을 문질렀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준석이 일방적으로 그녀의 몸을 만졌지, 수현은 그를 제대로 만져 본 적이 없었다. 망설이다 슬그머니 좆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
손으로 둥글게 말아 쥐자, 준석이 탄성을 뱉었다. 너무 커서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아 양손으로 겨우 감쌌다. 손바닥 안에서 꿈틀대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잡고만 있어도 준석의 숨소리가 진해졌다. 수현은 서툴게 손을 움직여 기둥을 쓱쓱 훑어보았다.
“너 손 뭔데 따뜻하고 지랄이야.”
“… 왜 욕을 해.”
“좋아서 그래, 씨발, 좋아서.”
“욕 좀 하지 마.”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타박하자, 그가 욕실 벽을 짚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더 세게 쥐어봐.”
수현은 순순히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부족한 듯 준석이 그녀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고 힘을 주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렇게 세게…?”
“네 보지는 더 세게 물어.”
진짜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상스럽게 해야 하나. 수현은 그가 손을 움직이는 대로 착실하게 따라주며 자위를 도왔다.
점점 빠르게 움직이던 그가 대뜸 그녀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입을 벌리라는 신호 같아서 슬그머니 입술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혀가 밀려 들어왔다.
“으응….”
준석이 섹스를 하듯 성기를 훑어 내릴 때마다 혀를 넣었다가 빼는 것을 반복했다. 뭔가를 바라듯 음부가 움찔대, 다리 사이를 꽉 붙였다.
문득 그의 좆이 터질 것처럼 부푸는 게 느껴져 입술을 떼고 내려다보자, 꿈틀대던 성기에서 하얀 정액이 분출되었다. 튀어 오른 정액이 두 사람의 몸과 손에 묻었다. 사정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
“왜 쌌는데도 안 줄어들어?”
정액을 잔뜩 분출하고도 여전히 발기해 있는 것에서 손을 떼며 묻자, 그가 여상히 대답했다.
“너한테 박고 싶어서.”
“… 넌 지치지도 않아?”
한 번 절정에 오르면 기운이 죽죽 빠지는 그녀로서는 마냥 신기했다.
“가진 게 체력뿐이라.”
준석이 무심하게 대꾸하며 샤워기를 다시 그녀의 몸에 뿌려 정액을 닦아주었다.
“잘 안 닦이네.”
“읏….”
일부러 유두를 손톱을 살살 긁으며 수작을 부리는 손등을 찰싹 때려주었다. 아쉽다는 얼굴로 손을 떼어낸 준석이 샤워볼에 거품을 잔뜩 내고 그녀의 팔부터 등과, 가슴, 배, 다리를 순서대로 문질러주었다.
“내가 한다니까….”
“쓰읍, 가만히 있어요, 누나. 제가 씻겨 드릴게요.”
또 밑을 지분댈까 봐 걱정했는데, 준석은 의외로 담백하게 몸을 씻겨 주었다. 수현은 무의식중에 그가 좀 더 만져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이내 얼굴을 붉혔다. 준석 때문에 그녀마저 변태가 된 것 같았다.
“누나, 아쉬워요?”
어떻게 알았는지 준석이 장난스레 물었다. 곧장 아니라고 받아쳤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당황한 얼굴을 하자 그가 낮게 소리 내 웃으며 수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쉬우면 안 되지. 제대로 해드려야지.”
“아, 아니야. 난….”
샤워볼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까끌까끌한 표면이 거품을 부글부글 내며 음모 위에 비벼졌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바짝 세웠다. 엉덩이 위로 단단한 준석의 성기가 느껴졌다.
샤워볼이 스치듯 음핵을 건드리며 앞뒤로 문질러졌다. 왠지 애가 타는 기분이라 준석의 팔을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자, 그가 샤워볼을 바닥에 던졌다.
“여기는 약한 부위니까 손으로 해줘야지.”
“준석아… 응….”
거품 묻은 손이 음부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문득 그가 이상하다는 듯 속삭였다.
“미끌거리네? 거품 때문인가?”
“흐아… 읏,”
“아니면 내가 씻겨 주는 거로 느낀 건가.”
“아니야….”
“강수현, 변태야? 나는 열심히 씻겨 줬을 뿐인데 혼자 싸고 있었어?”
그가 놀리듯이 귀를 깨물며 갈라진 틈을 파고들었다. 아직도 부어있는 부위를 마사지하듯 손가락으로 살살 누르고, 음핵도 비벼대는 통에 허리에 힘이 빠져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준석의 팔이 그녀를 감싸고 있지 않았으면 주저앉고도 남았을 거다.
“으응… 읏… 아, 흑,”
“씻겨 주는데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내는지 대답해주시죠, 강수현 씨?”
음란하게 만지는 주제에 뻔뻔하다. 심지어 본인도 발기한 좆을 그녀의 엉덩이에 문질러대고 있으면서.
매번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 억울한 심정에, 수현은 의도적으로 엉덩이를 움직여 그의 것을 자극했다. 그러자 아래를 만지던 준석의 손길이 뚝 멎었다.
“너, 지금 일부러 그랬지.”
그가 무섭게 말했다. 수현은 그가 멈춘 틈을 타 품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뭘….”
“방금 내 좆 뭉갰잖아. 기껏 참아 줬더니.”
준석이 심상치 않은 기세로 다가왔다. 점점 뒤로 물러나다 보니 등이 금방 벽에 부딪혔다.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곤 벽을 짚어 수현을 품 안에 가두었다. 본인은 틈만 나면 몸을 더듬는 주제에 엉덩이 한번 움직였다고 이렇게 무섭게 굴 건 뭐람.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또 발 빼네?”
준석의 목소리가 샤워 부스 안에 짙게 깔렸다. 눈앞에선 젖은 성기가 꺼떡대고 있었다. 꿀꺽, 수현의 침이 무겁게 넘어갔다.
“…….”
“…….”
두 사람 사이에 야릇한 정적이 맴돌고, 쏴아-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만 들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준석이 깊은 한숨과 함께 샤워기를 그녀의 머리 위로 쏘아 거품을 씻겨주었다.
“나가 있어.”
“…….”
“지금 안 나가면 진짜 더 한다.”
“나가면 되잖아….”
수현은 서둘러 샤워 부스를 빠져나왔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가리고 욕실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안쪽에서 탁탁,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는 생각에 뒤를 돌자, 습기 찬 샤워 부스 유리 너머로 아래를 쥐고 흔드는 준석의 실루엣이 보였다.
“야.”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낌새를 느낀 건지 준석이 살벌하게 불렀다. 깜짝 놀란 수현은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옷을 챙겨 입는 와중에도 자위하는 실루엣이 눈앞에 그려져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 *
미팅 장소까지 준석의 차로 이동했다. 여전히 온몸이 쑤시지만 버틸 만은 했다. 작가와 인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해서 준석과 밥을 먹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소설책 삽화라고?”
핸들을 돌리던 준석이 물었다.
“응. 박기우 알아? 요즘 인기 많은 소설 작가인데, 그분이 이번에 작업 중인 소설에 삽화 넣고 싶다고 했대. 내 작업물 보고 출판사 통해서 연락했어.”
“남자 이름인데, 남자 작가야?”
“응.”
뻐근한 어깨를 살살 주무르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바로 서에 돌아가야 할 텐데 굳이 데려다주는 친절에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둘이 만난다고?”
“원래는 출판사 직원도 같이 만나는데, 작가님이 둘이 만나고 싶대서.”
“단 둘이….”
그가 신호를 받아 차를 멈추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냈다. 핸들에 팔을 기댄 준석이 물끄러미 수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별다른 말 없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자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렇게 봐?”
“나 같은 엘리트 형사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뭐래.”
허세로 시작하는 걸 보니 또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나 하려나 보다 싶어 피식 웃는데, 정작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일단 얼굴이 잘생겨야 하고,”
그건 인정. 수현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근데 그게 형사랑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다.
“키도 커야 하고.”
그것도 인정.
“몸도 좋아야 하고.”
또 인정.
“좆도 커야 하고.”
“…….”
부정을 못 하겠다.
“신호 바뀌었어. 가기나 해.”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이 멀찍이 보였다.
“저기야.”
수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준석이 차를 옆으로 빼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세웠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시간 나면 본가도 들려. 다들 정말 보고 싶어 해.”
사근사근 말하며 잠금장치를 푸는데, 툭- 잠금이 걸렸다. 다시 풀었지만, 또 잠긴다. 준석이 짓이었다. 느닷없이 왜 심술인가 싶어 눈을 흘기자 준석이 상체를 기울여 왔다.
“왜, 또.”
“엘리트 형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이 좋아야 하거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당연히 나는 감이 좋고.”
의외로 형사로서 인정받는다고는 들었다. 그가 직접 말한 거라 완전히 믿음이 가진 않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의아한 얼굴을 하자, 준석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 떨어져 나갔다.
“가, 갑자기 왜 이래?”
“그냥, 감이 오네.”
“무슨 감?”
“기분 좆같아질 것 같은 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몰라. 가야 돼. 내려.”
“자기가 붙잡아 놓고….”
수현은 투덜대며 잠금장치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감정을 실어 문을 닫자, 차창이 내려가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준석의 낯이 나타났다.
“다른 남자랑 삼 초 이상 눈 마주치지 마. 안 그러면 다음에 혼난다?”
“빨리 가.”
“진짜야, 강수현.”
그가 가볍게 윙크를 날리곤 차를 출발시켰다. 왜 저래. 꼭 질투하는 것처럼….
잠깐 생각하던 수현이 번뜩 고개를 들고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준석이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
설마 남자 작가랑 단둘이 밥 먹는다고 질투하는 건가? 우준석이? 그 무신경한 우준석이? 그동안 그녀가 누구와 일을 하든 별 관심 없었던 그가?
장족의 발전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성급한가 싶다가도,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슬슬,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 같다.
* * *
박기우는 스릴러 소설 작가로 특히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끔찍한 장면 묘사가 탁월하기로 유명했다. 이름만 들어 봤지,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어서 스릴러 작가니까 내심 험악하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다. 그는 예상외로 잘생겼고, 생각보다 젊으며, 지나치게 상냥한 성품이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세요?”
“네. 맛있어요.”
수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빈 컵에 물을 채워주는 기우를 힐끔대며, 준석이 그의 반만 닮아도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쓰실 소설에 삽화를 넣고 싶으시다면서요.”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본격적인 일 이야기를 꺼냈다. 식사하는 내내 통성명부터 하느라 이번 작업 건에 대해선 아직 들은 게 없었다.
수현이 먼저 운을 떼자, 기우가 간단한 소설 줄거리와 어떤 스타일의 삽화를 원하는지 설명했다. 챙겨온 수첩에 그가 말하는 것을 받아 적었다.
제목은 『피그말리온』,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티브로 한 스릴러 장르로, 완벽한 이상형의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죽여 토막 난 시체를 조각조각 이어 붙이는 미친 남자의 이야기였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준석이 바쁘지 않다면,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해봐야겠다.
태생적으로 겁이 많은 수현과 달리 그는 겁이라곤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반 친구들과 모여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준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던 걸 떠올리다, 문득 기우와 눈이 마주쳤다.
아차 했다. 미팅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수현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기우도 덩달아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럼 저 이제 작가님 자주 뵐 수 있을까요?”
“네?”
“저는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 보다 만나서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하면 일이 더 잘 되더라고요. 시간 되시면 자주 뵈었으면 해요.”
보통은 출판사를 통해 메일로 피드백을 주고받지만, 작가의 스타일이 그렇다면 적당히 맞춰 줄 수 있었다. 잠깐 일정을 가늠하던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참, 강 작가님 작년에 에세이 표지 그리신 적 있으시죠. 제목이 뭐였더라….”
“『나를 살게 하는 구름』이요?”
“네. 맞아요.”
수현이 자주 같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에세이였다. 기우도 같은 출판사에서 주로 책을 내는 거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건도 성사되었다고 들었다.
“그때 출판사 로비에서 만난 적 있는데. 기억 못 하시죠?”
“그래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아 난감한 얼굴을 하자, 그가 괜찮다며 웃다가 헛기침을 했다.
“초면에 이런 말 부담스러우실 거 같은데, 제가 좀 성격이 급해서….”
긴장한 듯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기까지 한다.
“저 그때 강 작가님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 네?”
너무 놀라서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저도 첫눈에 반하는 건 처음이라 당황해서 말도 못 걸어보고 지나갔는데, 나중에 그림 그리신 거 보고 더 반했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 강 작가님이랑 꼭 같이하고 싶다고 제가 요청했어요.”
직업 특성상 사람을 만날 일도 별로 없고, 원체 내성적인 탓에 인간관계 폭도 좁은 수현으로서는 고백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
기억나는 건 딱 하나. 대학교 일 학년 때 같은 과 선배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던 거뿐이다.
과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은 선배여서 동기들이 더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얼떨결에 같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재미없을 수가 없었다.
그 시간에 준석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는 편이 더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영화관을 빠져나올 때, 우연히 준석을 마주쳤었다.
“강수현 너 여기서 뭐….”
사고 이후로 갑자기 진로를 바꾸게 된 준석은 그때 한창 경찰 시험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부상으로 운동을 관두게 되었는데 또 몸 쓰는 일을 하겠다는 그를 걱정하고 있던 수현은 둘둘 만 태권도 도복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준석을 보자마자 속상한 얼굴을 했다.
“너 그러다 어깨 더 안 좋아지면 어쩌려고….”
“누구냐?”
준석이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의 어깨 뒤로 던졌다. 잠깐 선배를 잊고 있던 수현은 그제야 민망한 얼굴로 선배에게 준석을 소개했다.
“선배, 여기는 제 친구예,”
“저 새끼랑 영화 보고 나왔어?”
“야…!”
준석이 험악한 얼굴로 영화관을 가리켰다. 당황한 수현이 선배의 눈치를 살피며 준석을 나무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석은 양아치처럼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선배를 노려보았다. 덩치가 큰 데다, 생긴 것도 무섭게 생겨서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선배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먼저 자리를 비키고, 수현은 난감한 얼굴로 그의 팔을 때렸다.
“뭐 하는 거야!”
“저 새끼가 너 좋아하네? 너도 그걸 알고.”
“…….”
“근데 넌 저 새끼 안 좋아하잖아.”
잠깐 사이에 그걸 어떻게 다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준석이 표정을 조금 풀고, 수현의 가방을 가져가 제 어깨에 둘러멨다.
“가자, 집에.”
“준석아 우리 저녁 먹고 가자. 배고파.”
“저 새끼가 밥도 안 사줬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씹새끼네.” 하고 중얼거렸다.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참에 자기가 쫓아냈으면서.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다 나란히 걸었다.
종일 지루하기만 했는데, 준석과 함께 있으니 기분이 마구 들떴다. 수현이 헤헤 웃으며 뭘 먹으면 좋을지 주변 가게를 살피는데 문득 준석이 그녀를 돌아봤다.
“야.”
“응?”
“…….”
“왜?”
“… 아니야.”
“왜? 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뭐야… 싱겁게.”
그러고도 준석은 한참 동안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 후로 과에 수현에게 양아치 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선배가 그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며 이야기를 해서 졸업할 때까지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해명하던 수현도 나중엔 체념했다.
그게 수현이 기억하는 마지막 고백이었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돌직구로 고백을 받을 줄은 몰랐던 터라, 수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저, 저도 박 작가님 소설 좋아해요. 재작년에 나왔던 그….”
“『엘리펀트』요?”
“네, 그거, 그거요. 되게 재미있게 읽었어요.”
원래도 낯을 가리기 때문에 어색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불편함이었다. 기우의 눈빛이 꽤 집요했다.
“혹시 남자 친구 있으세요?”
“그건 아닌데….”
“그럼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가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주실 수 있으세요?”
“남자 친구는 없는데…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일하는 내내 불편할 것 같아 용기 내 말했다.
여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타인에게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온통 준석과 관련된 사람들뿐이었고, 가끔 연락하는 대학 동기들은 아직도 준석이 그녀의 남자 친구인 줄 알아서 새삼스럽게 말하기도 애매했다.
입 밖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고 나니 감정이 증폭하는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 그러시구나. 아쉽네요.”
기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부담스럽게 하지 않겠다는 듯 산뜻하게 웃어주는 상냥함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분인지 물어 봐도 돼요?”
수현은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오랜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람이라 여태 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말에 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관계가 무너질까 봐 무서울 수 있죠. 더군다나 가족들끼리 얽혀 있으니, 두 분이 멀어지면 불편할 상황도 많을 테고요.”
“네… 마음 같아서는 거절당하더라도 고백하고 싶은데, 그렇게 잃기엔 너무 소중한 친구예요.”
“저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준석의 이야기를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상하게 말이 술술 나왔다.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준석을 모르기 때문에 들킬 부담이 없으니까. 게다가 리액션이 좋아서 말하는 족족 공감을 해주니, 길고 외로웠던 짝사랑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분도 수현 씨를 좋아하고 있을지 누가 아나요.”
“음….”
적어도 섹스를 할 정도의 이성적인 교류는 있지만, 그게 연애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감정인지는 모르겠다. 섹스 후에도 준석의 태도가 딱히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준석과의 섹스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어서 적당히 얼버무리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기우가 문득 물었다.
“그 친구분 혹시 까만 머리에 키 크고 남자답게 생겼나요?”
“네?”
“굳이 따지면, 경찰보다는 건달 쪽에 가까운 인상 맞아요? 잘생기긴 했네요.”
“네? 그걸 어떻게….”
기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 끝에 뭔가 묻었다며 떼주려고 해서 스스로 하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 기우의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서부 경찰서 우준석 형사입니다. 조사 중이니 신분증 보여주셔야겠습니다.”
“우준석?”
갑자기 나타난 준석이 험악한 얼굴로 기우의 팔을 잡아 내렸다. 진작에 돌아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나타난 건가 싶어 놀란 얼굴을 하자, 준석이 그녀를 살벌하게 내려보았다. 그리곤 기우에게 경찰 배지를 들이밀었다.
“경찰입니다. 신분증 보여주시죠.”
“네?”
“준석아, 갑자기 뭐 하는,”
“우 형사, 무슨 문제 있어?”
준석의 뒤로 덥수룩한 갈색 머리카락의 젊은 남자가 등장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준석의 직장 동료인 것 같았다. 저 사람이 그 오지랖 넓다던 박 형사인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준석을 바라보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기우의 팔을 놓았다.
“아는 분이야? 안녕하세요, 저는 우 형사 동료 박대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 우 형사 지인분이신지….”
“저… 준석이 친구예요. 강수현이라고 합,”
“여자분이셨구나. 앗! 혹시 우 형사의 실연,”
“야야, 꺼져. 가서 일이나 해.”
준석이 성가시다는 듯 대현의 어깨를 밀었다. 멀어지면서도 끝까지 “다시 한번 생각해주세요! 저를 위해!” 하고 외치는 게 꽤 유쾌한 사람 같았다.
“여긴 무슨 일이야?”
“알 거 없고. 신분증 주시죠?”
준석이 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의 없는 행동을 나무라려는 찰나, 기우가 순순히 신분증을 꺼내 준석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너 왜 그래…!”
“현장에 있는 사람들 전부 신분증 확인하는 중이야.”
“뭐? 그게 무슨… 여기 무슨 일 있어?”
그러고 보니 준석 혼자가 아니라 동료 형사도 함께였다. 강력계 형사가 왔다는 건…. 왠지 무서워 어깨를 움츠리며 수현도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아, 넌 됐어. 너에 대해선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준석이 그녀가 아니라 기우를 보며 말했다. 멋쩍게 다시 지갑을 가방에 넣으며 신분증 확인이 끝났음에도 서 있는 준석의 팔을 밀었다.
“이제 가봐. 조사하러 왔다며.”
“식사 다한 거 같은데 일어나지?”
“알아서 할 테니까, 가.”
준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수현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반팔 소매 아래 팔뚝 근육이 흉흉하게 드러났다.
수현은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기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끌고 테이블에서 벗어나자마자 준석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왜 그래, 진짜!”
“뭐가.”
“나 앞으로 박 작가님이랑 일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불편해지잖아. 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
“내가 뭘 했다고. 절차대로 한 거거든?”
그가 주위를 가리켰다. 대현을 비롯해 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레스토랑 직원들과 손님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제야 때리는 걸 관두자, 되려 준석이 따지듯 물었다.
“그 좆같은 분위기는 뭐였는데?”
“뭐가.”
“저 새끼가 너한테 손댔잖아. 네 말대로 일하려고 만난 사이에 손댈 일이 뭐가 있어.”
“그냥 머리에 뭐가 묻어서 떼주려고 한 거야. 손대긴 누가 손을 대. 오버 하지 마.”
“저 새끼 눈깔에서 정액이 줄줄 흐르던데.”
“야!”
“내가 말했지. 나 감 좋다고. 저 새끼 너한테 관심 있어 보이는데, 아니야?”
놀란 얼굴을 하자 준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고백받았냐?”
“… 보고 있었어?”
그가 미간을 좁혔다.
“저 새끼는 널 언제 봤다고 초면에 고백질이야?”
“그냥… 예전에 출판사에서 만난 적 있대. 나는 기억 안 나는데 그때 잠깐 보고….”
“첫눈에 반했다?”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웅얼대며 시선을 피하자 준석이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렸다.
“너 설마 지금 부끄러워 하는 거야? 고백받아서?”
“그런 거 아니야.”
“맞잖아. 왜 다른 남자 이야기하면서 얼굴 빨개져?”
“…….”
“첫눈에 반했다는 말에 넘어가기라도 한 거야?”
준석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혹시 그녀가 기우를 좋아한다고 오해라도 할까 봐 수현은 해명했다.
“그런 거 아니야. 넘어가긴 누가 넘어가.”
“고백에 대한 답은.”
“답하고 말게 뭐 있어. 나는 박 작가님 잘 알지도 못하는데… 적당히 거절했지.”
어쩌다 보니 준석의 이야기까지 해버렸지만, 거기까지 말하면 고백이나 다름없기에 수현은 얼버무렸다.
“그럼 잘 알게 되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근데 그게 준석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얼핏 준석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살피던 수현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너 혹시 질투,”
“우 형사! 이리 와봐!”
하필 그 타이밍에 대현의 목소리가 들려와, 수현은 뻘쭘하게 입을 다물었다. 준석이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헝클었다.
“너 이제 집에 가.”
“아직 이야기 좀 남았는데….”
“어차피 여기 통제 들어가.”
“무슨 일인데? 위험한 거야?”
“그건 몰라도 되고. 야, 이 순경 잠깐 이리 와봐.”
준석이 지나가는 경찰을 불러세웠다. 군기가 바짝 든 것 같은 앳된 청년이 후다닥 준석의 앞으로 달려왔다.
“너 강력계 지원하고 싶다고 했지?”
“넵!”
패기 어린 대답에 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 던졌다. 얼떨결에 키를 받아든 순경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수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부터 임무를 준다.”
“… 저한테요?”
“내 차 알지? 내 차로 이분을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고 돌아와. 임무 완수 시 널 잘 봐줄지도 모른다.”
“아… 넵! 알겠습니다!”
“내가 혼자 갈게.”
“귀한 신분이시니 손끝도 닿지 말고 다녀온다. 실시.”
“시, 실시!”
순경이 냉큼 “가시죠.” 하고 에스코트하듯 레스토랑 입구로 팔을 뻗었다.
“내 가방이 저기….”
“내가 챙겨 갈 테니까 걱정 말고.”
“박 작가님께 인사도,”
“그것도 내가 대신 해줄 테니까 빨리 나가.”
수현은 마지못해 순경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통제가 들어가는 모양인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레스토랑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잠깐 뒤를 돌아보자, 준석이 심각한 얼굴로 대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사건이지. 설마 살인… 같은 건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준석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 조심스레 묻자 순경이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우 형사님 관계자시니까 괜찮겠죠?” 하고 운을 떼었다.
“저도 잘은 모르는데, 실종 사건이랑 관련된 일인가 봐요. 그 레스토랑이 마지막 행선지라는 거 같던데… 조폭들도 연관되어 있는 거 같고요.”
“네? 조폭이요? 괜찮은 거예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깜짝 놀라서 묻자, 순경이 아차 하며 말했다.
“우 형사님이랑 친하시니까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신 줄 알았는데 아니셨나 봐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준석에게 일 이야기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래도 강력계에 몸을 담고 있다 보니 험한 일들이 많아, 가족들이 걱정할 것을 염려해 그랬으리라.
대충 강력계 형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막상 그가 현장에 있는 모습은 처음 본 데다가 영화에서나 보던 조직폭력배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 형사님이시잖아요.”
“네?”
“서에서 유명해요. 이런 말 좀 그럴지도 모르는데, 서부경찰서 미친개라고 불리세요.”
“아….”
왠지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순경은 정말로 수현이 집 앞에 도착해서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차를 돌렸다.
창문으로 멀어지는 준석의 차를 바라보며 메시지라도 남겨놔야지 싶어 핸드폰을 찾다가, 가방에 넣어두고 그냥 왔다는 걸 깨닫고 한숨만 푹 뱉었다.
* * *
다음 날 오전, 준석이 수현의 가방과 핸드폰을 가지고 집에 찾아왔다. 밤새 걱정돼서 한숨도 못 자고 있던 수현은 창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혹시나 해서 내다 보았다가, 준석의 차를 발견하곤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우준석!”
밤새 현장에 있었던 건지 어제와 같은 차림의 준석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곤, 이내 피식 웃었다.
“뭐야, 나 온 거 어떻게 알았어?”
“너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조폭들이랑 싸웠어?”
“… 이 순경 이거 안 되겠네, 빠져 가지고. 민간인한테 사건을 불어?”
“괜찮냐니까!”
구시렁대는 준석의 옷자락을 붙잡고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아. 보면 모르냐?”
“너 형사 안 하면 안 돼?”
밤새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준석이 일을 때려치우게 만들고 그녀가 먹여 살릴 생각까지 해봤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석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소파에 수현의 가방을 내려놓은 그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른들은 주무셔?”
“아니면 팀이라도 바꾸면 안 돼? 다치면 어떡해….”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못 뵙겠네. 나 세수만 하고 가자.”
화장실로 향하는 준석의 뒤를 쫓았다. 안까지 따라 들어가자 세면대를 짚은 준석이 쯧, 혀를 찼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나 서에서 굉장히 유능한,”
“미친개라던데….”
“이 순경 이 새끼가.”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 아주머니랑 준희 언니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지은이도 그렇고….”
“수현이도 그렇겠지.”
능글맞게 덧붙이는 말에 수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석이 웃으며 수도꼭지를 열었다.
세수를 하고 비누로 머리까지 함께 감아낸 그가 “내 칫솔 어디 있어?” 하고 물어서 선반을 열어 꺼내 주었다. 가끔 올 때마다 사용하기에 따로 챙겨 두었다.
“머리 말려줘.”
양치까지 끝낸 준석이 허리를 숙이고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수현은 위험한 일을 굳이 하겠다는 그가 미웠지만 일단은 새 수건을 꺼내 준석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일은 해결된 거야?”
“대충.”
“대충이 뭐야. 범인 못 잡았어?”
“곧 잡을 거야.”
적당히 대답하는 준석의 머리카락을 죽 잡아당기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서 얼굴이 마주쳤다.
“이렇게 열렬하게 걱정해주니까 기분 좋네.”
“당연히 걱정되지.”
“근데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닐 텐데.”
준석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앉혔다.
“어제 분명히 말했지. 다른 남자랑 삼 초 이상 눈 마주치지 말라고.”
“일인데 뭐.”
“누가 일하면서 고백을 해. 그런 좆같은 일이 어디 있어.”
수현은 잠깐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장난기가 배어있긴 하지만 미묘하게 정말 기분이 나쁜 것 같은 얼굴이라 어제 미처 끝내지 못한 질문을 꺼냈다.
“너 혹시 질투해?”
“뭐?”
준석의 표정이 잠깐 비틀렸다. 황당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어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약간의 당혹감도 섞여 있었다. 수현은 내심 대답을 기대하며 준석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준석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물기에 젖어 촉촉한 입술이 약간의 틈을 내보이며 말을 뱉어내려는 듯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긴장된 침을 삼켰다.
붉은 준석의 혀가 입술 위를 가볍게 훑고 들어갔다. 질투하냐고 물었지, 꼬시랬나. 수현은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응? 질투하냐니까.”
대답을 독촉하자 그가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나 가봐야 해.”
“야…!”
“바쁘다, 바빠.”
준석은 그녀를 세면대 위에 앉혀 둔 채로 훌쩍 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수현이 씩씩대며 쫓아가자 그는 그새 신발을 신고 있었다.
“진짜 바로 가? 밥이라도 먹고 가. 새벽 내내 굶었을 거 아니야.”
“대충 김밥 사 먹었어. 시간 없어. 간다.”
“다치지 마, 응?”
“생각해볼게.”
“대답이 뭐 그래, 진짜!”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대꾸에 감정이 상했다. 달라진 목소리 톤을 눈치챈 듯 준석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삐졌어?”
“됐어. 가. 재수 없어.”
질문에도 제대로 답을 안 해주고, 걱정을 해줘도 들어 먹지를 않으니 속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현은 신경질적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입 안 여린 살을 물었다. 준석이 도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강수현.”
“간다며. 왜 또 와.”
“그러는 너야말로 그 작간지 뭔지 하는 새끼랑 일 안 하면 안 되냐?”
수현이 날카롭게 고개를 들자, 그가 그녀의 볼을 잡아 입술을 툭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이거 놔.”
발음이 뭉개져서 나왔다.
“그 새끼랑 작업하지 말라고.”
“놓으라고.”
“아, 그래. 질투해.”
준석이 한숨처럼 말했다.
“놓으… 뭐?”
“네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뭘 한다니까 기분 더러웠는데, 하물며 고백까지 받았다네?”
“…….”
“좆같게.”
그가 놀라 멍하니 있는 수현의 볼을 놓아주며 쯧, 혀를 찼다.
“질투 나니까 다른 남자랑 눈도 마주치지 마, 알았어?”
“…….”
“그럼 경찰 아저씨는 이만.”
가볍게 손을 흔든 준석이 집을 나설 때까지 수현은 그 자리 그대로 굳어 있었다.
* * *
“우 형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왠지 온몸에 닭살이 돋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조수석에 올라타자, 핸들을 쥐고 졸고 있던 이 순경이 물었다. 뒷좌석에 길게 누워 있던 대현도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일으켰다.
준석은 벨트를 매며 이 순경을 협박하듯 노려보았다.
“너 별소리를 다 했더라? 민간인한테 조폭이니 뭐니 그딴 이야기를 왜 해. 겁주냐? 내 친구 겁줘?”
“아, 죄송합니다. 너무 걱정하셔서 우 형사님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리려던 게….”
“미친개라고?”
“그건 사실인,”
“뭐 이 새끼야?”
“자자, 일단 출발.”
대현이 둘 사이를 저지하며 이 순경의 어깨를 두드려 출발 신호를 알렸다. 시동이 걸리고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거 봐.”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수현의 집을 빤히 바라보는 준석의 앞으로 핸드폰 화면이 불쑥 내밀어졌다.
“뭔데.”
“레스토랑 등기부 뗀 거. 두 사람이 공동명의로 올라가 있어. 둘 다 만나봐야 할 거 같은데.”
대현의 핸드폰을 건네받은 준석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뭐야, 이 새끼.”
“아는 사람이야?”
공동명의자 둘 중 한 사람의 신상이 익숙했다. 남자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욕정 담긴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던 좆같은 새끼. 그가 어제 직접 신분증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왜 하필 이 새끼가….
“박기우, 어제 강수현이랑 같이 있던 새끼야.”
“아, 그 잘생긴?”
“지랄한다. 됐고, 이 새끼 먼저 불러. 수상한 놈이야.”
“…….”
“…….”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신호에 멈춰선 이 순경과 대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가늠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눈깔 뭐냐?”
“질투하냐?”
“아, 그분이 여자 친구셨구나….”
“그렇겠지. 그러니 지금 질투에 눈이 돈 거지.”
“우 형사님 청순한 스타일 좋아하시나 봐요.”
준석이 험악하게 이 순경을 노려보았다.
“야, 네가 강수현이 청순한지 아닌지를 왜 판단하고 지랄이야.”
“네? 저도 눈이 있는데….”
“그 눈 뽑아 버리는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넌 강력계 오면 각오 단단히 해라. 지옥 길 시작이니까. 올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울상을 지으며 핸들을 돌리는 이 순경을 뒤로하고 준석이 대현에게 핸드폰을 던졌다.
“아무튼 박기우부터 소환해.”
“일에 사적인 감정 섞는 거 아니다, 우 형사.”
“좆 까. 내 사람이랑 얽혀 있는데, 너 같으면 가만히 있어?”
“오, 내 사람?”
대현이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지만, 장난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필 수현과 얽히다니.
옛날부터 그녀 주변의 잔챙이들을 치우는 건 준석의 몫이었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수현과 관련 있는 놈부터 안전한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알았어. 그럼 박기우부터 조사하는 거로 해.”
“현장에서 나온 머리카락은?”
“감식 들어갔어. 이 주 정도 걸린단다. 최대한 당겨보라고 했는데, 모르지 뭐.”
“그래.”
“아무래도 그 레스토랑이 이상하긴 하지? 머리카락 색도 같잖아. 감이 와.”
가뜩이나 찜찜한데 불안을 더하는 대현을 노려보며 준석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현에게 박기우와 만나지 말라는 메시지를 찍어 보내려는데, 대현이 그의 핸드폰을 잽싸게 낚아챘다.
“세상에, 우 형사 연애 고자야?”
“미쳤냐? 안 내놔?”
“‘박기우 만나지 마’ 이렇게만 달랑 보내면, 납득이 되겠어? 이유를 설명해줘야지.”
“야. 내놔.”
대현이 혀를 끌끌 차며 저가 대신 보내주겠답시고 뒷좌석으로 몸을 기댔다.
준석이 성질을 내며 뒤쪽으로 팔을 뻗어 난동을 부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좌석 밑에 숨기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리곤 만족한 듯 준석에게 핸드폰을 던졌다.
화면을 확인한 준석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수현아, 난 니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으면 너무 신경 쓰여서 일을 할 수가 없어ㅠㅠ 그러니까 박기우씨랑 단둘이 만나지 마ㅠㅠㅠㅠ질투 난단 말이야ㅠㅠㅠㅠㅠㅠ]
“야, 너 내려. 오늘 뒤져보자.”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지만 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벨트를 풀었다. 뒷좌석으로 달려들려는 찰나,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우 형사님, 답장 온 거 같은데요.”
“빨리 확인해봐.”
대현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준석은 그에게 곧 목을 치겠다는 제스처로 경고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럴 줄 알았어. 또 장난친 거지? 짜증 나 진짜.]
“… 씨발.”
조금 전 수현과 형성되었던 간질간질한 분위기가 대현의 오지랖 때문에 장난으로 강등됐다. 훔쳐보던 대현이 아뿔싸, 하는 얼굴로 싸늘해지는 준석의 눈치를 살폈다.
“이 순경, 차 세워.”
“네? 여기 세울 데 없는데요….”
“그냥 세워. 저 새끼 죽여버릴 거니까.”
“우 형사, 미안. 내가 나중에 해명할게.”
“세워!”
이 순경은 왜 자신이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건지 마음속으로 한탄하며 핸들만 부여잡았다.
* * *
준석이 돌아가고, 수현은 기우의 연락을 받았다.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는 제안에 준희의 카페 주소를 알려주고 약속을 잡았다.
유명한 소설가가 방문했다고 하면 장사가 더 잘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분위기를 봐서 그에게 사인을 요청할 야망까지 품었다.
“박기우 작가 알아. 나도 몇 권 읽었어. 그분이랑 일하는 거야? 우리 수현이 멋지다.”
미리 카페에 와서 준희에게 설명하자, 준희가 기특하다며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멋쩍긴 해도 뿌듯해 이런 게 인맥의 힘인가 싶었다.
약속 시각까진 시간이 좀 있어서 준희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레스토랑에서 준석을 만났다고 하자 준희의 눈매가 험악해졌다.
“그 자식은 집에 들를 시간은 없고, 레스토랑에서 밥 처먹을 시간은 있대?”
괜히 걱정할 것 같아 레스토랑에서 사건이 생겼다는 말은 하지 않았더니 애먼 오해가 생긴 모양이었다.
“근데 누구랑 왔어? 여자?”
“아니, 남자. 박 형사라고, 준석이가 몇 번 말한 적 있잖아.”
“아, 그 오지랖 넓다던? 잠깐, 남자 둘이 레스토랑?”
짐짓 준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거기 분위기 좋은데라며.”
“응.”
“… 수현아, 우리 아무래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거 같다.”
준희가 머리를 짚었다. 그리곤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우준석이 갑자기 남자 애인 데리고 와도 안 놀랄 자신 있어? 난 솔직히 없어.”
“응?”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어쩐지 여자 엄청 밝히게 생겼는데 안 만나더라니.”
“나도 아직 남자 만난 적 없는데….”
“당연히 안되지, 우리 수현이는! 시커먼 놈이 내 동생 건드리는 꼴 못 봐! 무조건 언니 허락 맡고 남자 만나야 돼. 알았지?”
진짜 시커먼 놈이 십 년 넘게 그녀의 가슴에 떡하니 자리해 있었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이 게이일 줄이야.”
수현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언니, 그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야. 그냥 일하다가 배고파서 들린,”
“데이트 명소를? 일하다가? 남자 동료랑?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사건 조사차 왔다고 말할 걸 그랬다. 이상하게 감싸주려다가 준석을 게이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여자를 상대로 얼마나 발정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수현으로서는 해명하기도, 이대로 두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어쩐지 또 맞선 걷어찼다더니….”
“진짜? 선 안 본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준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푹 뱉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을 뻔해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했다.
“지은이 선생님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 게이라서…. 일단 이건 너랑 나만 알고 있는 거로 하자.”
“지은이 올 때 됐다. 언니, 나 지은이 데려올게!”
“하, 엄마가 알면 뭐라고 하실지….”
카페 문을 열고 나서자 태양 볕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여름의 절정이라 무더운 날씨에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진짜 맞선을 거절했어. 수현은 웃으며 팔목에 두르고 있던 끈으로 머리를 높이 묶었다. 헤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맞은 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박 작가님, 안녕하세요.”
수현이 먼저 알은체를 하자, 잠깐 그녀를 빤히 보던 기우가 한 박자 늦게 인사를 했다.
“다른 분인 줄 알았어요. 머리를 묶으셔서.”
“더워서요. 일찍 오셨네요. 저 잠깐 들를 데가 있는데, 카페 가서 기다리실래요?”
“어디 가세요?”
“친한 언니 딸이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라서요.”
“같이 가도 될까요?”
“아… 네. 그래요.”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연스레 옆에 따라붙었다.
어제 고백을 받은 데다가 준석이 장난이라도 질투를 운운했던 상대라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기우는 고백을 거절당한 것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았다. 쿨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죄송해요. 어젠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갔어요.”
나란히 걸음을 옮기다 아차 하는 생각에 사과를 건네자, 기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곧장 쫓겨났어요. 듣자 하니 지하실에서 뭔가 나온 모양이더라고요.”
“정말요? 지하실에서 뭐가 나왔는데요?”
“아, 못 들으셨구나. 친구분이 경찰이라 대충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다 이 순경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다른 분이 말해줬는데, 조폭이랑 관련 있대요.”
“그래요? 생각보다 큰일인 모양이네요. 친구분 걱정되시겠다.”
기우가 수현의 속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기분이라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까 봐 걱정돼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네에….”
“참, 그리고 아주 가망 없는 짝사랑은 아닌 것 같던데요?”
“네?”
“저 어제 그분한테 맞는 줄 알았어요. 하도 무섭게 다가오셔서, 제가 꼭 바람 상대 된 기분이었어요.”
수현이 얼굴이 붉어졌다. 괜히 준석이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서둘러 해명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준석이가 좀 거친 면이 있긴 한데, 나쁜 애는 아니에요. 제가 좀 허술한 면이 있어서 신경을 많이 써줘요. 그래 보여도 착해요.”
“형사 친구 있어서 든든하시겠어요. 기운이 남다르시던데요.”
그런가. 특별히 준석이 형사라서 든든할 일은 없었지만, 같이 있으면 무서울 게 없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수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기우도 덩달아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