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6)

2장

딩동- 딩동-

“누구 올 사람 있어?”

“글쎄, 누구지?”

“내가 나가볼게.”

세 식구가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이었다.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에 수현의 아버지가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느릿느릿 젓가락을 놀렸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내일이면 준석을 볼 수 있다는 거다. 그 생각에 다른 것에는 영 집중할 수가 없어서 출판사 미팅은 주말에 잡았다. 웬만하면 주말에는 쉬고 싶지만, 준석이 내일 온다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이야, 준석이 오랜만이네.”

“안녕하셨어요.”

그래, 내일은 준석이… 뭐?

“준석이 왔어? 저녁은?”

“아직요. 아주머니~ 저 숟가락 하나 가져와도 돼요?”

“어휴, 말이라고. 얼른 와서 앉아.”

수현은 멍청한 얼굴로 식탁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 준석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한 사람분의 밥과 국, 수저를 더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준석이 “사랑해요, 아주머니.” 하고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너 뭐야? 쉬는 날 내일이라며.”

“정확하게는 지금부터. 아저씨, 못 본 새 더 타셨어요. 요즘도 낚시 다니시는 거예요?”

“말도 마. 이 사람 오늘 아침에 들어왔어. 그래놓고 잡은 건 죄다 풀어주고 왔단다.”

“낚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거야, 이 사람아.”

“집에나 제때 들어오셔.”

“언제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럼 제가 생선 잔뜩 잡아 올게요.”

살갑게 웃으며 말을 덧붙인 준석이, 어머니의 어깨를 살살 문지르며 애교를 부렸다. 그에 사르르 녹은 어머니가 준석의 앞으로 제육볶음을 당겨 주었다.

준석은 수현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부모님과 대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익숙한 풍경이라 서운하거나 소외감이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눈길은 한번 받고 싶어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낚시해 볼래.”

“웬일이야? 아빠가 가자고 해도 안가더니. 우리 수현이, 준석이가 같이 가면 아빠야 좋지. 시간 맞을 때 가자.”

“네, 좋아요. 그런데 아주머니 이거 왜 이래요?”

준석이 불현듯 입을 틀어막고 심각한 얼굴로 제육볶음을 내려다보았다.

“왜? 맛이 별로야?”

어머니가 걱정스레 묻자, 준석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맛있어요. 저 아주머니 아들 하면 이거 평생 먹을 수 있어요?”

“준석이는 이미 내 아들이지. 자주 와. 얼마든지 해줄게.”

“네, 엄마. 강수현 나랑 집 바꾸자.”

준석의 너스레에 어머니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의 입꼬리도 슬그머니 올라갔다.

준석이 가족들 사이에 융합된 모습은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꼭 친정에 놀러 온 부부가 된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다.

그때, 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툭, 발등을 건드리는 것에 슬쩍 식탁 아래를 내려다보니, 준석이 그녀의 발등을 살살 문지르고 있었다.

난데없는 접촉에 당황한 수현은 급히 발을 뒤로 물렸다. 준석이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긴 했으나, 다행히 더 건들지는 않았다.

“저 오늘 자고 가도 돼요?”

“참, 인숙이랑 준희 여행 갔지?”

“네. 저 오늘 쉰다고 이야기했는데도 저만 빼놓고 갔어요. 저 그냥 이 집 아들 할래요.”

준석이 장난스레 투덜대자, 어머니가 웃으며 등을 쓸어주었다.

“그래, 자고 가. 내일 쉬는 날이랬으니까 우리 집에서 푹 쉬다 가. 아줌마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아니에요. 내일은 제가 근사한 데서 점심 사드릴게요.”

“어머, 정말?”

“그럼요. 재워 주신 값 제대로 할게요. 엄마.”

“하여튼, 준석이는 미운 구석이 없어. 준석아, 너 내 아들 하지 말고 사위 하면 안 될까?”

사위라는 단어에 수현이 작게 기침을 하자, 준석이 물컵을 밀어주었다. 이쪽은 보고 있지도 않으면서 귀도 밝다. 투박한 친절에 가슴이 두근거려 괜히 물만 홀짝였다.

“그럴까요?”

“그럼. 아줌마는 옛날부터 준석이를 사윗감으로 점찍어 뒀어. 수현이 쟤가 좀 맹한 구석이 있지 않니. 준석이 너도 알겠지만.”

“내가 뭐가….”

“수현이는 제가 누구보다 잘 알죠.”

준석이 힐끔 그녀를 봤다. 왠지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어쨌든 그녀와 준석을 예비부부로 묶는 상황은 마음에 들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래, 우리 수현이는 준석이 같이 듬직하고, 시원시원한 남자가 딱이야.”

“쓸데없는 소리. 준석이는 더 좋은 사람 만나야지.”

잠자코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아저씨는 미안해서 준석이 사위로 못 들여.”

순간 식탁 위가 찬물을 부은 듯 싸해졌다. 수현의 얼굴도 덩달아 파리해졌다. 당황해서 컵을 놓칠 뻔한 걸 준석이 잽싸게 잡아 주었다.

“제가 한참 부족하긴 하죠.”

준석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며 말했지만,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창 잘 나가던 녀석 한번 꺾어 놨으면 더 바라지 말아야지. 당신도 그만해.”

“여보, 왜 그래 정말.”

“저, 저… 먼저 들어갈게요….”

“수현아.”

수현은 걱정스레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부엌을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온 수현은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버지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미 오래전에 준석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에 짐처럼 남아 있는 일이 있다.

십 년이 지났음에도 그날의 사고는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준석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준석이었다. “들어와.” 작게 대답하자, 준석이 문을 열고 들어와 수현의 앞에 섰다.

가만히 준석을 올려다보던 수현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오른쪽 어깨 위였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듯 그가 수현의 얼굴에 손바닥을 휘휘 저어 시선을 분산시켰다.

“강수현. 나 내일 쉬는 날이라서 온 거야.”

“준석아, 그 어깨….”

“지난 일을 뭘 자꾸 생각해. 됐고, 나 따먹겠다며. 그래서 얼마 안 되는 귀중한 휴일 바치러 왔잖아.”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마음속에 깊게 각인 된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와 고개를 숙이자, 준석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강수현, 나 봐.”

준석이 수현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정면으로 마주 본 준석의 얼굴에 연유 모를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쪽-

그때,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여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황한 수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옛날 일 떠올릴 때 아닌 거 같은데.”

그가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덮치듯 다가오는 바람에 저절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깔아 눕힌 준석이 다시 고개를 숙여오는 때였다.

똑똑-

“수현아, 엄마야.”

문밖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수현이 다급히 일어나 준석을 밀어냈다. 순순히 떨어져 나간 준석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방문을 대신 열어 주었다.

“준석이도 여기 있었구나.”

“네, 아무래도 걱정돼서요.”

준석이 착한 척 내숭을 떨며 어머니가 가져온 복숭아 접시를 건네받았다.

“인숙이가 준거야. 맛있더라.”

“복숭아 맛있죠.”

준석이 얼핏 입맛을 다시며 수현을 돌아보았다. 준석의 집에서 복숭아를 먹었던 날 있었던 일이 떠올라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가 준석의 어깨를 가볍게 쓸었다.

“준석아, 미안해.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또….”

“아주머니.”

어머니가 선뜻 입 밖에 내기 어려워하는 말을 준석이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가로챘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그 일,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그래도 우리는 늘 미안해.”

“자꾸 그러시면 저 속상해요.”

준석이 어리광을 부리듯 투덜댔다.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저 정말 괜찮아요.” 하는 것에 수현은 조금 울컥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듯 준석을 품에 꼭 안았다.

“고마워, 준석아.”

어머니가 방을 나갔다. 단둘이 남자,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뱉었다.

“다른 생각 하지 마.”

수현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너만 멀쩡하면. 아, 이딴 거로 자꾸 질질 짜지 마. 네가 그러니까 내가 불쌍해 보이잖아. 이까짓 게 뭐라고 그러냐.”

열아홉, 준석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수현은 그의 말대로 지나간 일은 잊으려고 애쓰며 심호흡을 했다.

달칵- 그때 준석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 어머니 앞에서 실실댈 때와 달리 예민해진 그의 얼굴에 수현은 조금 긴장했다. 바깥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방안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담이 크진 않다.

“진짜 하려고? 밖에 부모님 계시잖아….”

“너만 잘 참으면 될걸?”

준석이 복숭아 접시를 책상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와 수현의 겨드랑이 안에 손을 밀어 넣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놀란 수현이 작은 탄성을 뱉으며 그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준석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수현의 다리를 제 허리에 둘렀다.

“자, 잠깐만.”

목덜미를 지그시 눌러 입술을 부딪치는 준석을 급히 만류했으나, 그가 끈질기게 따라붙는 바람에 말이 먹혀들었다. 준석이 진득한 소리를 내며 입술을 빨아댔다. 홀린 듯 입술을 벌리자 곧장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아, 씨발. 왜 이렇게 달아.”

맞물린 입술 새로 준석이 중얼거렸다. 욕하지 말라는 뜻으로 등을 두어 번 두드리자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나 싶어, 수현이 다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와의 키스는 황홀했고, 좀 더 하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자 목덜미를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입맞춤이 거칠어졌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게 깊이 파고든 혀가 그녀의 입 안 구석구석을 맛보듯 핥아댔다. 속도에 맞출 수가 없어 어정쩡하게 있는 수현의 혀를 준석이 제 것이라도 되는 듯이 가지고 놀았다.

넋을 놓고 혀를 내어주고 있는데, 문득 준석이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를 침대에 눕혀놓고 본격적으로 입 안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주, 준석아, 으응, 잠깐, 만….”

숨 쉬는 게 답답할 만큼 몰아붙여, 잠깐 입술이 떨어질 때 그를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수현의 입술을 물고 빠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수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준석이 거칠게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렸다. 동공이 반쯤 풀린 채 그가 짜증을 냈다.

“가만히 있어.”

“숨 막혀….”

“그건 네 사정이고.”

그 말에 서운해진 수현은 다가오는 입술을 피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준석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이제 보니 아주 상습범이네.”

“…….”

“너 왜 자꾸 부추겨놓고 발 빼?”

“부추기긴 누가 부추겼다는 거야.”

“나 따먹는 데 재미 들렸지, 아주?”

하여튼 상스럽다. 수현이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그는 미동도 않고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전히 가리고 있는 수현의 손등 위에 입술을 붙인 준석이 혀로 살결을 핥았다. 물컹하고 축축한 감촉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마치 손등이 입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키스하듯 혀를 놀려댔다.

“하지 마. 변태 같아!”

반대쪽 속으로 그의 얼굴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막무가내라 소용이 없었다. 손등에서 생경하게 느껴지는 입술과 혀의 움직임에 아래가 사정없이 젖어 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잘근잘근 이를 세워 물어대기까지 하던 준석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가 입고 있는 고무줄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

준석의 중지가 속옷 위를 눌렀다. 여전히 손등에 키스를 하며 그가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젖었네? 하고 말하듯 가볍게 휘어지는 눈매에 색기가 가득하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제 손바닥을 핥았다.

축축하게 젖은 천 위를 준석의 손가락이 느리게 문질러댔다. 일부러 그러는지 음핵을 건드리지 않고 주변만 둥글리는 것에 애가 타 수현의 허리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는 좀처럼 원하는 곳을 만져주지 않았다.

“아… 으, 준석, 으읍,”

답답해진 수현이 손을 치워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집어삼켰다. 가르고 들어온 혀가 그녀의 입천장을 긁음과 동시에, 준석의 손가락이 팬티를 옆으로 젖히며 질구로 파고들었다. 처음보단 견딜만하지만 그래도 아파서 수현은 겨우 준석의 팔을 붙잡았다.

“으읍, 아파, 응,”

그는 수현의 칭얼거림을 가볍게 씹어 먹고 원을 그리듯 천천히 손가락을 둥글렸다.

찌걱찌걱- 젖은 구멍 안에서 야한 소리가 났다. 그에 맞춰 수현의 입술에선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밖에 부모님 계시는데…. 초조한 심정으로 준석의 팔뚝을 손톱으로 긁자, 그가 잠깐 입술을 떼어 주었다. 그래도 삽입된 손가락은 여전했다.

“그만, 하자. 들키면 어떡해….”

“들키면 나랑 결혼하는 수밖에.”

“장난하지 말고, 손 빼. 나중, 나중에, 아…!”

어림없다는 듯 그의 손가락이 왕복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굵고 거친 마디가 좁은 통로를 파고들었다가, 다시 빠져나가며 내벽을 긁었다.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은 수현이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약지까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 두 개로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소리만 잘 참아봐.”

그게 안 되니 그만하자는 거 아닌가. 수현은 울상을 지으며 버둥댔다. 준석의 손가락이 안에서 번갈아 가며 꿈틀대는 것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흐으… 아, 아파, 응….”

“좋아하는 거 같은데.”

도저히 멈출 생각이 없어 보여 눈앞이 막막하기까지 했다. 열락으로 흐려진 시야에 물기가 차오르더니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눈물을 내보이자 준석이 잠깐 멈칫하더니, 아래를 채우고 있던 손가락을 쑥 빼어냈다.

이제 그만하려나 보다,하고 안심하는 찰나, 그가 욕설을 뱉으며 버클을 풀었다.

“우준석…!”

당황한 수현이 몸을 일으키자 흉흉하게 뻗어 오른 성기를 꺼낸 그가 괄괄히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허벅지에 문질러지는 그의 성기는 이미 축축했다. 힘줄이 올라붙어 울긋불긋하고 뜨거운 좆이 금방이라도 아래를 뚫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다급히 팔을 붙잡자 기민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준석의 얼굴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욕정으로 붉어진 얼굴과 풀어진 눈동자는 그가 당장이라도 좆을 쑤셔 넣을 거 같다는 두려움마저 일게 만들었다.

“여, 여기서 하면 안 돼. 다음에, 다음에 해… 응?”

애원해봤지만 그는 대답 없이 그녀의 다리를 들어 올리며 바지와 팬티를 끌어 내릴 뿐이었다. 내내 어둡고 습한 곳에 있던 음부가 해방되며 그의 좆을 원하듯 뻐끔댔다.

정말 여기서 한다고? 문밖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것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욕정이 한데 뒤섞여 배덕감을 만들어냈다.

“알았어. 안 해. 안 한다고. 그러니까 울지 좀 마. 당장이라도 좆 처박고 싶으니까.”

그녀가 훌쩍대자 준석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안 한다는 말에 정말인가 싶어 바라보자, 그가 그녀의 다리를 들어 하나로 모으게 했다. 바지와 팬티는 허벅지 절반쯤에 불안하게 걸쳐 있었다.

“안 한다고 했잖아…!”

준석이 아랑곳하지 않고 한껏 들린 허벅지 뒤쪽에 좆을 문질렀다. 뜨겁고 축축한 기둥이 몇 번이고 비벼지며 그녀의 허벅지를 유린하다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뭐 하는….”

순간 수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이라도 아래를 뚫고 들어올 것 같던 성기가 빈틈없이 모아진 허벅지 사이를 가득 메운 탓이었다.

두껍고 단단한 것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가 나가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하얀 살덩이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그의 좆이 쉴 새 없이 액을 흘려대며 빠져나갔다가 튀어나오는 광경에 수현의 질구에서도 액이 터져 나왔다.

“하지 마, 이거… 변태 같아, 읏, 응….”

“넌 뭐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아. 고삐는 네가 풀어 놓고.”

준석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 들게 만들고 좆을 허벅지 깊은 곳으로 쑤셔 넣었다. 그가 축축한 음부에 좆을 문지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렇게 젖어 놓고도, 그만하라는 소리가 잘도 나온다. 대단하네, 강수현.”

“읏, 흐읍….”

“난 좆대가리가 터질 거 같은데.”

준석의 허리 짓이 빨라졌다. 그에 맞춰 그녀가 받는 자극도 강해졌다. 두툼한 귀두가 음핵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녀는 파르르 떨며 간신히 입을 막았다.

자꾸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버둥대던 수현은 침대 구석에 있던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푹신한 솜 안으로 겨우 신음을 삼켜내는데, 대뜸 준석이 베개를 빼앗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요령 부리지 말고 스스로 참아야지.”

그가 수현의 양 손목을 잡아 누르며 성기로 음핵을 짓뭉갰다.

“이참에 우리 이 짓 하는 거 들켜서 나랑 결혼할래?”

“아응….”

“책임 제대로 져줄게.”

결혼하자는 소리가 참 쉽게도 나온다. 혹여나 사이가 멀어질까 봐 오랫동안 좋아하는 감정을 감추고 살아온 그녀로서는 서러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우습게도 한편으론 설렜다.

아이러니한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어, 수현은 준석의 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요령 부리지 말라니까.”

음험하게 속삭이던 준석이 숨을 뱉어내며 혀를 밀어 넣었다. 동시에 허리 짓이 빨라졌다. 자연히 수현의 몸이 위로 밀려났다.

“아….”

침대 헤드에 머리가 부딪치자, 준석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내려주었다. 그러면서 그의 좆이 사정없이 비벼졌다. 수현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바짝 부풀어 오른 음핵을 그의 성기에 마구 문질렀다.

“으읏, 응…!”

등줄기를 타고 치솟는 절정과 함께 허벅지가 세게 조여들었다. 준석이 낮은 신음을 내며 그녀의 머리맡을 짚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좆이 꿈틀대더니 티셔츠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 으… 그, 그만….”

사정을 하고도 그는 한참 동안 혀를 섞어왔다. 참다못한 수현이 팔뚝을 퍽퍽 때리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든 준석이 잠깐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카운트해야겠지?”

밭은 숨을 내뱉으며 하는 말에, 짐짓 준석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마치 그녀가 분위기를 깼다는 듯 못마땅한 기색으로 한숨을 뱉기까지 했다.

“이건 섹스가 아닌데?”

“다를 게 뭐야. 오히려 이게 더 변태 같아.”

“다르지. 네 보지에 내 좆이 들어가야 섹스인 거라고. 난 손가락 넣은 기억밖에 없는데.”

“아, 말 좀….”

수현은 질색하며 몸을 일으켜 속옷과 바지를 끌어 올렸다.

“… 그럼 이건 카운트 안 할게.”

섹스나 다름없는 행위긴 했지만, 그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전혀 손해 볼 게 없으니까.

이런 식이면 섹스 다섯 번이 유사 섹스 열 번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다. 검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하고 준석에게 옷장을 가리켜 보였다.

“준석아, 나 옷 좀.”

준석이 순순히 침대에서 내려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옷장에서 티셔츠를 꺼내 던져주었다. 옷을 받아 들고 준석에게 손짓했다.

“등 돌려.”

“웬 내외?”

“돌리라고.”

단호하게 하는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넓게 벌어진 그의 등을 잠깐 감상하다 티셔츠를 벗었다. 불시에 준석이 그녀를 돌아봤다.

“야!”

“귀엽게 군다.”

다급히 브래지어 위를 가리자, 그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다시 등을 보였다.

티셔츠를 갈아입고, 그의 흔적이 묻은 것은 나중에 부모님 몰래 빨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복숭아 먹을래?”

문득 준석이 책상에 놓여 있는 복숭아 접시를 가리켰다. 딱히 먹고 싶진 않지만, 섹스 직후의 서먹함이 없지 않아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를 가져온 준석이 포크를 복숭아 조각에 푹 찔러 넣으며 야릇한 시선을 보냈다.

“이거 꼭 너 같아.”

“응?”

그가 건네주는 포크를 받으며 되묻자, 준석이 여상히 말했다.

“네 보지도 내가 찌를 때마다 물 새잖아.”

“뭐?”

“얘도 줄줄. 너도 줄줄. 그래서 단가.”

“… 안 먹을래.”

여과 없는 음담패설에 얼굴이 달아오른 수현이 포크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대신 혀로 과육을 느리게 핥았다.

“뭐 하는 짓이야!”

“왜? 과일 먹는 건데?”

누가 과일을 저딴 식으로 먹는다는 말인가. 하도 핥아 댄 탓에 어느새 수현이 들고 있는 복숭아 조각이 그의 침과 과즙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녀의 아래를 애무할 때처럼 입술로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기까지 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 준석의 입 안에 복숭아를 밀어 넣었다.

“너 진짜 변태 같아.”

“맛있네.”

언제 더럽게 굴었냐는 듯 아삭아삭 상큼하게 씹어대는 소리에 수현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댔다.

“너도 먹어줘?”

“입 좀 다물어…. 너 원래 이렇게 저질이야?”

그러고 보니 그의 방 서랍에 가득 들어 있던 콘돔의 용도라던가, 오늘 했던 음란한 행위에 대해서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모든 정황이 그가 동정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했다. 수현이 알기로 여태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던 적은 없지만, 말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내숭이 상당한 놈이니까.

“우준석. 솔직히 말해.”

“뭘?”

“너 나 몰래 연애했어?”

복숭아 하나를 더 입에 넣고 우걱대던 그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볼이 불룩하게 나온 꼴이 퍽 순진해 보였다. 우습다. 순진하다기엔 조금 전까지 그가 한 짓들이 무색한데.

“갑자기 무슨 소리냐.”

“너무 능숙하잖아. 다른 사람이랑 한 적 있어?”

다시 묻는 말에 그가 씨익 웃으며 과일을 마저 씹었다.

“한 적 있냐고 묻잖아. 대답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 그게 중요해?”

중요하다. 아주 중요하다. 그가 다른 사람과 몸을 섞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소유욕이 강한 줄 몰랐다. 착잡한 심정으로 그가 쥐고 있는 포크를 빼앗자, 준석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진짜 다른 여자랑 했어?”

“뭐지, 이 바람난 애인 추궁하는 것 같은 태도는? 섹파답지 못 하네요.”

섹파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물론 그녀가 먼저 제안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그녀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친구라도 건드릴 수 없는 사적인 영역인 걸 알면서도 수현은 애타는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너 설마 울어?”

“울긴 누가 울어.”

“곧 울겠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준석이 즐거운 듯 고개를 쫓아와 추궁했다.

“왜? 내가 다른 여자랑 이 짓 했을까 봐 속상해?”

“됐어. 너희 집으로 가.”

말끝에 울먹임이 묻어났다. 재수 없어. 다른 여자한텐 이렇게 짓궂게 굴지 않았겠지.

소꿉친구인 그녀니까 편하게 여겨 장난도 스스럼없이 치는 거라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얼굴을 밀어내자, 준석이 그녀의 허리를 덥석 들어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강수현.”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리려다 방향을 바꿔 가슴팍을 퍽퍽 때리자, 준석이 날름 혀를 내밀어 눈가를 핥아왔다.

“한 번 더 하자.”

그가 다시 발기한 성기를 그녀의 구멍 위에 문지르며 속삭였다.

“너 우는 거 보니까 꼴려서 못 참겠어.”

“넌 진짜 나쁜 놈이야.”

이 와중에도 섹스 생각만 하는 그를 밀어냈다. 다행히 정말로 할 생각은 아닌지 준석은 옷 위로 성기를 비비기만 할 뿐이었다. 야하게 움직이는 허리 짓도 지금은 밉게 느껴져 허벅지 위에서 내려왔다.

“삐진 거야?”

준석이 느긋하게 물었다. 삐졌다는 귀여운 어감으로 제 감정을 치부해버리는 것도 서운하다.

준석의 무신경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겪을 때마다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현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나 잘 거야. 내 방에서 나가.”

청개구리답게 그는 침대에서 내려가는 대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등을 끌어안고 덩달아 누운 준석의 품이 커다랗게 그녀를 감싸왔다. 이 와중에도 가슴은 두근댔다.

“나가라고….”

“너 보러 온 건데 나가면 무슨 소용이야.”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퍽 달콤해, 하마터면 마음이 풀어질 뻔했다. 준석이 다정한 기색으로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피곤한데 이러고 한숨 잘까.”

“엄마 다시 오면 어쩌려고… 안돼. 나가.”

“뭐 어때. 우리 어릴 땐 맨날 이랬는데.”

“그건 어릴 때니까 그렇지, 지금은 너나 나나 나이가 몇인데. 이상해 보이잖아.”

“알긴 아네.”

준석이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더 붙여왔다. 그 탓에 엉덩이에 그의 아래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벗어나려고 버둥대자, 준석이 낮은 신음을 뱉었다.

“더 움직여봐. 자극되고 좋다.”

야릇하게 소곤대는 목소리에 수현은 버둥대는 걸 관두고, 이불을 좀 더 끌어안았다.

자꾸 꼬셔대니 몸이 동해 아래가 축축해졌다. 만약 준석이 몇 번 더 유혹하면 그녀도 참을 자신은 없었다.

문득 준석의 손이 그녀의 눈가를 훑었다.

“이제 안 우네?”

“아까도 안 울었어.”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안 울었다니까.”

“말해봐. 말해야 알지.”

수현이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자, 준석이 그녀의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브래지어 위로 가슴을 움켜쥐는 준석의 손이 뜨거웠다.

“내가 다른 여자 가슴도 이렇게 만졌을까 봐?”

“그만 좀, 해…!”

“젖꼭지 꺼내서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굴렸을까 봐?”

“아… 읏….”

준석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그녀의 귓바퀴를 이로 가볍게 물었다.

“강수현, 나도 네가 처음이야.”

그가 퍽 수줍은 어조로 말했다. 장난기도 섞인 데다가, 가슴을 주물럭대면서 하는 말이라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수현은 집요하게 유두를 비틀어대는 손가락을 잡아 내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안 믿는 눈치지. 진짠데.”

“됐으니까 손이나 치워.”

“아, 다소 억울한데요. 진실을 믿어 주세요, 강수현 씨.”

준석이 또 인터뷰하듯 장난치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숨결이 간지럽게 목을 간지럽혔다. 수현은 간신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뭐야, 진짜 안 믿는 거야?”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 내리며 준석이 투덜댔다. 이런 엎드려 절받기 식은 썩 유쾌하지 않아, 수현은 못 들은 척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야, 강수현. 어디 가.”

“엄마랑 드라마 볼 거야.”

“날 이 꼴로 두고?”

그가 자신의 아래를 가리키며 성질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닫히는 문틈으로 “또 놀아났네.” 하고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기가 막힌다. 놀아난 게 누군데. 아직도 허벅지가 화끈거리는데. 분을 삼키고 부엌으로 직행해 찬물을 쭉 들이켰다.

“준석이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던 부모님이 물었다.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소파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피곤한가 봐. 잠들었어.”

“그래, 잘했어. 피곤할 만도 하지. 못 본새 얼굴 살이 쏙 빠졌더라.”

준석이 거실로 나온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드라마를 보며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준석이 다소 거친 기색으로 걸어 나왔다.

다리 사이가 가라앉은 걸 보니 방에서 자위라도 한 모양이다. 수현이 볼을 붉혔다. 그녀의 속내를 읽은 건지 눈이 마주친 준석이 흉악하게 눈을 부릅떴다.

물론 부모님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착하게 웃어 보였다. 수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준석이 부모님께 살갑게 말을 붙였다.

“뭐 보세요?”

“눈 좀 더 붙이지 그랬어.”

“아아… 괜찮아요. 충분히 잤어요. 충분히.”

충분히, 라는 말을 할 때 유독 힘을 주어 그녀를 바라보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방에 이불 깔아 놨어.”

어머니가 수현의 옆방을 가리키며 준석에게 말했다. 그 방은 준석의 식구나 다른 친척들이 올 때 잠을 자는 용도로 사용하려고 늘 비워 둔다. 고개를 끄덕이던 준석이 대뜸 손바닥으로 수현의 눈 앞을 가렸다.

“뭐야!”

“어머, 수현아. 유리랑 재현이 뽀뽀한다.”

“뭐? 손 치워! 지금 중요한 부분이야!”

“저런 거 보는 거 아니야.”

준석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랐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방안에서 했던 짓에 비하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키스 신은 풋풋하고 예쁜 수준 아닌가. 더군다나 수현은 이 드라마를 매일 챙겨보며 두 사람이 키스하기만을 기다려왔다.

“손 치우라고!”

부모님은 그저 이 상황이 재밌는 듯 껄껄 웃을 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수현이 종아리를 세게 내려치고 나서야, 준석이 손을 거둬갔다.

하지만 키스 신은 이미 끝난 후였다. 씩씩대며 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부모님이랑 같이 보기 민망할까 봐 그랬지.”

당사자인 그녀가 전혀 민망하지 않은데 왜 본인이 나서는지 모르겠다. 다시 보기로 키스 신을 돌려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종아리를 한 번 더 때리곤 조금 떨어져 앉았다.

“김재현 진짜 잘생겼다.”

상한 기분은 드라마 속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을 보니 금방 가라앉았다. 다시금 드라마에 집중하는데 이번엔 준석이 손을 뻗어 수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너 머리 많이 길었다.”

“아, 치워.”

탁, 소리 나게 손등을 쳐내다 문득, 유치원 선생님이 떠올랐다. 혹시 긴 머리보다 단발머리가 더 좋은 건가.

여자 이야기를 원체 하지 않으니 이렇다 할 준석의 이상형은 알지 못했다. 마침 드라마 속 여자주인공도 단발머리여서, 수현은 그를 떠보기 위해 슬쩍 입을 열었다.

“나도 저렇게 단발할까?”

“머리 기르겠다고 용쓸 땐 언제고.”

아버지의 조용한 타박이 이어졌지만, 못 들은 척했다.

“여름이라 덥기도 하고… 단발머리 귀엽잖아. 안 그래?”

“그런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준석이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빙글빙글 꼬아댔다.

“너 고등학생 때 생각난다. 그때 단발머리 아니었나?”

“맞아. 나 그때 어땠어?”

내심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삼각김밥 같던데.”

“… 손 치워.”

아무래도 머리는 그냥 둬야겠다.

* * *

수현이 준석을 좋아하게 된 시기는 뚜렷하지 않았다.

하나, 대충 어림잡아 그가 성장기를 거치며 소년보다 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리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라고 생각해도 십 년은 될 것이다.

십 대 후반, 준석은 복싱 선수로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 준석이 멋져 보이는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던지, 그를 좋아하는 선배, 후배,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혼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던 수현은 반짝반짝 빛나는 소꿉친구에 비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준석이 변함없이 그녀의 곁에 있었기에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나 하며 수현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 탓에 수현은 묘한 우월감과 설렘에 빠져 종종 밤잠을 설치곤 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준석을 제외한 친구를 딱히 만들지 못한 수현을 향한 다정함이었다는걸 그때도, 지금도 알고 있다. 아닌 척하면서도 소꿉친구를 챙길 줄은 알아 다행이라며, 준희가 몇 번 말한 적도 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 미술학원에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는 선생님의 제안에 수현은 열여덟 살 가을 즈음부터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준석이 없는 환경에 노출된 건 처음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런 그녀를 위해 준석은 매일 저녁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와주었다.

“수현아, 어제 너 기다리던 애, 남자 친구야?”

어느 날, 같이 수업을 듣던 다른 학교 여자애 하나가 준석에 대해서 물었다. 수현은 그 질문에서 준석을 향한 호감을 간파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넘보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다른 학교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그 아이가 수현의 학교에 친구가 여럿 있었다는 거였다. 소문은 순식간에 교내를 퍼져나갔다.

“야, 어쩔 거냐? 너랑 나랑 사귄다고 소문났어.”

소문을 들은 준석이 빙글빙글 웃으며 수현의 반을 찾아왔을 때, 소문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수현은 당황했고, 또 준석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준비 없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그때 수현은 처음으로 학교에서 큰소리를 내었다.

“사귀는 거 아니야. 그냥 친구니까 헛소문 퍼트리지 마!”

늘 조용히 있던 수현이 단호하게 나오자, 소문은 금방 사그라졌지만 이후 준석의 태도가 달라졌다.

반이 달라도 쉬는 시간마다 와서 귀찮게 하더니 어느새 발길이 줄어들었고, 학원이 끝나도 늦은 시간이 아니면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나마 데리러 오는 날도 다섯 걸음 앞서 걸어갈 뿐이었다.

대화도 확연히 줄었다. 먼저 말을 걸지도 않고, 장난도 치지 않으니 서먹한 대화만 오갔다. 수현이 먼저 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읊어도 준석은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섭섭했지만, 이유를 묻기에는 꺼려지는 미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꽤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열아홉의 겨울.

두 사람의 서먹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 수현은 매일 학원이 끝날 무렵에 준석이 올지 안 올지를 가지고 마음 졸여 했다.

그날은 입시가 코앞이라 열한 시가 넘어서야 학원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다행히 건물 밖에 준석이 서 있었다. 글러브를 들고 바닥을 툭툭 차고 있는 준석을 발견한 수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로 그날을 생각하면 ‘오지 말지.’ 하는 생각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준석아.”

“어. 가자.”

장난기 없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에는 조금 서운했지만, 그래도 와준 게 어딘가 싶었다.

그가 수현의 화구 통을 대신 어깨에 둘러메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수현은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다 용기를 내서 말을 붙여보았다.

“졸업식 때 너희 가족이랑 우리 가족 여행 가는 거 알지.”

“어. 근데 난 못 가.”

“왜?”

“3월에 대회 있어서 준비해야 돼.”

“아….”

그가 잠깐 고개를 돌렸다.

“왜? 아쉽냐?”

어딘가 기대가 담긴 목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딱딱하던 준석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하루만 자고 오는 건데도 안 돼? 갔다가 금방 오면 되잖아.”

“뭐, 네가 그렇게 원하면 일정 조율해보고.”

무심히 내뱉는 말에 수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헤헤 웃으며 따라붙자, 준석이 헛기침을 하며 반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야야, 떨어져서 걸어. 이러다 또 소문날라.”

“어?”

“너 나랑 사귄다고 소문나는 거 싫어하잖아.”

싫은 게 아니라, 부끄러운 건데….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살짝 물러나자, 준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먼저 횡단보도를 건넜다.

“같이 가…!”

긴 다리로 단숨에 길을 건너버린 그를 열심히 뒤쫓는데, 문득 준석이 건너편 인도에서 고개를 획 돌렸다.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뀔 것 같아서 걸음을 빨리하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강한 불빛이 그녀를 감쌌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귀에 다급한 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수현!”

준석이 달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동시에 몸이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 순간의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가벼운 타박상으로 몸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준석아….”

“깼냐?”

“주, 준석아, 미안해…. 나 때문에….”

“뭐가 너 때문이냐.”

“나 데리러 오다가… 나 때문에 네가….”

“됐어. 너만 멀쩡하면. 아, 이딴 거로 자꾸 질질 짜지 마. 네가 그러니까 내가 불쌍해 보이잖아. 이까짓 게 뭐라고 그러냐.”

그리고 준석은 어깨 부상으로 운동을 관둬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 * *

늦은 새벽, 수현은 악몽 같던 그 날의 꿈 때문에 울면서 잠을 깼다.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괜히 그 이야기를 꺼내서…. 애써 남 탓을 해보지만, 준석이 그녀를 구하고 대신 어깨를 다쳤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너 또 그 꿈꿨지.”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머리맡에 앉아 있는 준석을 발견하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타이밍 좋게 그가 입을 막아주지 않았으면, 부모님을 깨웠을 거다.

“왜 여기 있어?”

“너 이럴 거 같아서. 사고 이야기 나오는 날마다 꿈꾸잖아.”

수현은 멋쩍은 얼굴로 그의 손을 치워냈다.

“그렇다고 자는 거 훔쳐보고 있으면 어떡해. 변태야?”

“이제 충분히 아는 거 아니었어?”

능글맞게 웃으며 눈가를 문질러주는 손길과 말투가 상냥했다. 이러니 여태 마음을 접지 못한 거다. 가끔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서.

“넌 왜 안 자고 있어?”

“일 생겨서 가봐야 하는데, 보나 마나 울다 깰 거 같아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다시 가? 너무한다. 경찰이 너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투덜대는 게 마음에 드는 듯 어둠 속에서 준석이 작게 웃었다.

“알다시피 내가 우리 서에서 제일 유능하잖아. 나 없인 일이 안 돌아간다는데 어쩌겠냐.”

“바로 가야 되는 거야?”

“바로는 아니고. 곧 가야지.”

“… 또 언제 쉬어?”

은근슬쩍 묻는 말에 준석의 손이 볼에서 귀로 넘어갔다. 귓불을 조몰락대는 게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찔대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코앞에 다가왔다. 코끝이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또또, 밝힌다. 부추기지 마. 진짜 가야 하니까.”

“내가 뭘….”

기대했던 건 사실이다. 민망함에 웅얼거리며 도로 눈을 떴다.

“이번엔 시작하면 못 참을 거 같아서 그래.”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웃음기 없는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새벽이고, 그런 꿈을 꿨고, 오랜만에 그가 다정한 탓일까, 그동안 소유욕에 눈이 멀어 잠깐 제쳐두었던 미안한 마음이 불쑥 윤곽을 드러냈다. 수현이 머뭇대며 입술을 열었다.

“준석아, 있잖아… 혹시 싫으면 더 안 해도 돼.”

“뭐가?”

“나랑 자는 거.”

준석이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삐딱한 시선을 던졌다. 순전히 저 좋자고 벌인 일이라 내심 신경 쓰였던 건 사실이었다. 하는 짓을 보면 그도 즐기는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닌 척해도, 준석은 옛날부터 그녀에게 뭐든 맞춰 주었다. 사이가 서먹해졌던 고등학생 때도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주는 건 언제나 준석이었다.

“글쎄. 싫으면 내 좆이 이럴까.”

그가 수현의 손을 잡아 제 아래로 내렸다. 선명하게 발기한 물건이 손에 가득 찼다.

묵직하고 단단하다. 만져보는 건 처음이라 당황한 수현이 손을 뒤로 물리자, 그가 더운 숨을 뱉었다.

“하여튼 넌 생각이 너무 많아.”

“…….”

“단순하게 생각해, 강수현. 나 그렇게 복잡한 놈 아니야.”

“너 단순한 거 잘 알거든.”

“아는데 그래?”

그가 가벼운 타박을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려나 싶어 아쉬움에 고개를 따라 들자, 준석이 “부추기지 말라니까.” 하고 중얼거리더니 수현의 턱을 잡아 입을 맞췄다.

짧게 입 안을 훑고 떨어져 나간 준석에게 부추긴 적 없다고 나름 반박했지만,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시간을 확인하느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가지 말까.”

“안 가도 돼?”

“… 너 일부러 그러냐?”

“뭐가?”

“이제 보니 완전 여우네, 강수현.”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다. 내가 뭘 했다고….

Rrrrr- Rrrrr-

그때 준석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가 화면을 확인하곤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간다고, 가. 씨발, 전화 좀 그만해.”

- 왜 욕하고 지랄,

상대방은 말이 안 끝난 거 같았으나, 멋대로 통화를 끊은 준석이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간다, 자라.”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수현을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수현은 잠깐 망설이다 “준석아.”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저렇게 발기한 채로 일하러 가게 둘 수 없는 노릇이라고 스스로 변명했지만, 사실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입… 으로 해줄까?”

그가 살벌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험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목구멍까지 뚫리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해.”

준석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내가 너 남자 좆대가리나 입에 물라고 여태 지켜온 거 아니야.”

“야, 너는 말을 해도 꼭….”

“갈 거니까 그만 붙잡아.”

저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자기가 나한테 한 짓은 생각 안 해? 내 몸은 제 것처럼 물고 빨더니. 수현은 방문을 열고 나가는 준석의 등을 흘겨보다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입으로 애무해주는 걸 다 좋아하는 거 아닌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창피해졌다.

문득 그가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무서운 기세로 되돌아온 준석이 그녀의 몸을 빙글 돌렸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다짜고짜 혀가 밀려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혀를 준석이 진득하게 애무했다. 침이 뒤섞이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갈 거 같아서 꿀꺽, 삼키자 그가 고개를 더 깊이 묻었다.

정말 목구멍까지 뚫어버릴 기세로 혀를 밀어 넣던 준석의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전화, 으읍….”

그가 아랑곳하지 않고 수현을 몰아붙였다. 혼을 쏙 빼놓는 거친 키스였다. 쉬지 않고 울려대는 진동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 겨우 밀어내자, 츄웁,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야릇하게 흩어졌다.

“빨리 가봐. 급한 거 같은데….”

“아, 씨발. 이 새끼들 다 뒤졌어.”

“욕 좀 작작 해. 나이가 몇이야.”

“네가 나였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조용히 해.”

그는 어딘가 여유가 없어 보였다. 가쁘게 숨을 내쉬어 들썩이는 가슴이나, 가만히 두지 못하는 발, 쉴새 없이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대는 손에, 부푼 앞섶까지.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안 갈 거 같아서 수현은 그의 심장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준석이 기민하게 고개를 들었다.

“빨리 가봐.”

“하….”

그가 깊은 한숨을 뱉으며 수현을 끌어안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모습이 좀 귀여워 보였다. 수현은 준석이 진정할 때까지 등을 살살 쓸어내려 주었다.

* * *

팀에서 두 달 동안 쫓던 조직폭력배 이두파의 마약 밀매 현장 검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개처럼 날뛴 준석의 활약이 단연 컸다.

손에 잡히는 대로 조폭들의 뺨을 내리치며 “니들, 새끼, 때문에, 내가, 씨발, 그걸, 두고, 씨발, 아오!” 하고 미친놈처럼 굴어서 대현이 너무 심하다고 말릴 정도였다.

“우준석이, 잠깐 이리 와봐.”

현장을 마무리하고 조폭들이 타고 온 차를 뒤지던 팀장이 준석을 불렀다. 그는 아직도 수현을 두고 나온 게 분이 안 풀려 붙잡혀 있는 조폭들에게 시비를 거는 중이었다.

“씨발, 눈 안 깔아?”

끝까지 조폭들에게 윽박지르며 팀장에게 다가가자, 그가 준석에게 걸레짝이 된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뭔데요, 이게?”

“저 새끼들 인신매매도 하는 모양인데, 더 파야겠다. 박대현이랑 잔당 추적해.”

서류 봉투에서 몸이 결박된 사람들의 사진이 쏟아졌다. 얼핏 봐도 스무 명 가까이는 되어 보였다. 준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냐며 다가온 대현 역시 사진을 발견하곤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준석의 눈에 지은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사진이 들어왔다.

“이… 씹새끼들이! 야 씨발, 이거 뭐야!”

“우형사.”

눈이 뒤집혀 간부급 조직원에게 달려들자 대현이 급히 붙잡았다. 준석은 그를 뿌리치고 남자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이 사람들 다 어디 있어!”

발길질을 받던 남자가 말없이 준석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이 새끼가? 준석이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건방 떨지 말고 장소 불어. 이거 찾아내는 거 일도 아니야, 새끼야. 그러니까 서로 힘 빼지 말고 그냥 불어.”

“일도 아니면 직접 찾아보시든가.”

“뭐야?”

“우 형사, 진정해. 여기서 이런다고 될 일 아니야. 일단 이 새끼들 서로 보내고, 따로 조사해보자고.”

대현이 준석을 만류했다. 준석은 남자의 머리통을 걷어차며 잠깐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바쁜 모양인지 한동안 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가끔 새벽에 통화가 되는 날도 있었지만,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되도록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마침 출판사로부터 유명작가의 일러스트 작업을 받은 덕에 수현 역시 바빠져서 시간은 그럭저럭 잘 흘러가는 편이었다.

이틀 뒤에 있을 미팅을 위해 작가의 전작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하필 스릴러 작가라 간이 한껏 쪼그라들어 잠깐 쉴 겸 의자에 기댔다.

우준석은 뭐 하고 있으려나. 눈을 감자마자 머릿속에 기다렸다는 듯 준석이 가득 채워졌다.

연락해 볼까? 바쁘려나? 목소리 듣고 싶은데…. 아니야, 방해하지 말자. 단호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저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손이 갔다.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연락해도 괜찮지 않을까. 준석은 새벽에도 전화를 잘 받아주는 편이다.

연락할까, 말까.

망설이던 수현의 마음이 전자로 기울었다. 조금 긴장이 되어 준석의 번호로 전화를 걸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 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준석이 까칠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듣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피곤한 상태인지 알 것 같아 수현의 목소리가 소심하게 줄어들었다.

“잤어? 미안해… 나중에 전화할게.”

- 아, 아니. 됐어. 깼어. 뭐해, 이 시간까지.

몸을 일으키는 듯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면서도 전화를 받아주는 성의가 수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이럴 때마다 수현은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사람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일 들어와서 준비 중이야. 너는? 자취방이야?”

- 아니, 잠복 중. 잠깐 잤… 야, 박 형사 뭐하냐?

“응?”

박 형사라면 준석이 몇 번 이야기한 적 있는 오지랖 넓다던 동료 형사다. 같이 있나 싶어 잠자코 있으니, 핸드폰 너머로 잠깐 거친 욕설이 오갔다.

- 저 새끼 왜 저래.

“왜? 무슨 일 있어?”

- 전화 훔쳐 듣잖아. 변태 새낀가. 잠깐 차에서 나왔어.

“요즘 많이 바빠? 아주머니랑 언니가 너 보고 싶어 해.”

- 지은이는?

“지은이도 삼촌 보고 싶어 하지. 너 오면 준다고 그림도 잔뜩 그려놨어.”

- 이뻐 죽겠네.

듣기만 해도 좋은지 준석이 낮게 웃었다.

- 아, 그럼 걔는? 걔는 나 안 보고 싶대?

“누구?”

- 수현이.

그가 “걔도 나 보고 싶어 할 거 같은데.”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래. 걔도 보고 싶대.”

- 내가? 아니면 내 좆이?

“미쳤어?”

너무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 아, 나도 걔 보고 싶다.

“누구?”

- 수현이 보지.

“… 끊어.”

- 알았어, 알았어. 끊지 마.

그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달랬다. 시도 때도 없다. 머릿속에 순 음란한 것만 들어 있나. 여태까지 저 변태 같은 습성을 어떻게 감추고 살았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한테 관심 없는 척하더니, 순 내숭.

- 당분간 본가 못 갈 거 같은데 오빠 보고 싶어서 어떡하냐, 우리 수현이.

“뭐래….”

- 아, 정정. 누나 보고 싶어요.

“됐고. 많이 바빠?”

- 그럭저럭.

“그럼 내가 갈까?”

슬쩍 말을 흘려 보았다. 그래도 하루쯤은 자취방에서 잠을 자지 않을까. 그때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면 좋을 텐데. 준석의 어머니가 그에게 주겠다며 음식을 한가득 준비해 놓았으니, 그걸 가져다준다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 올 수 있냐?

잠깐 조용하던 준석이 물었다.

“응. 내일 시간 있어. 아주머니가 반찬 해두시기도 했고….”

- 그럼 와.

꿀꺽- 무겁게 침 삼키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언제?”

- 너 편할 때 아무 때나 와. 와서 자고 가.

예전에도 준석의 자취방에서 잔 적이 있지만, 당연히 그것과는 다른 의미이리라.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내일 갈게.”

- 어.

그의 목소리가 살짝 무뚝뚝하게 가라앉았다. 잠깐 적막이 흐르고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수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오늘 지은이와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고, 그에 준석이 덤덤히 대꾸를 해주었다.

* * *

준석에게 반찬을 가져다주겠다고 하자, 준석의 어머니가 반색하며 음식을 바리바리 싸주었다.

멀지는 않지만 짐이 많아 택시를 타고 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