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113화) 14. 가족
(제 113 화)
온도와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된다지만 새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교정을 건물 안에서만 보고 있기 아쉬워 유명과 리아는 손을 꼭 잡고 나섰다.
특수재질의 투명외투 덕분에 탄탄하고 늘씬한 맨 다리를 다 내놓은 초미니 교복치마차림의 여자친구를 옆에 끼고 눈밭을 걸을 수 있어 기분이 더 상쾌하고 좋았다.
“내가 아쉬워하던 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자신의 손을 따뜻한 입김으로 훅 불어주는 남자친구의 자상함에 리아는 참아왔던 말을 꺼냈다. 유명이 가벼운 키스와 함께 씨익 웃었다.
“내 아이디어는 지금보다 더 강제적이었어.”
“강제적…?”
리아가 반문하자 유명은 평소 여동생과 함께 쓰리썸을 즐기던 공원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대답했다.
“아예 각자 직업을 가져야만 데뷔시켜주자고 했거든.”
“와… 보미처럼 아이돌만 꿈꾸던 애들 어쩌라고그런 생각을 했어?”
“흐흐, 다른 직업 구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꽤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야~”
“으이구 이 심술쟁이…!”
여자친구의 다정한 타박을 유명은 킥킥 웃어넘겼다. 리아는 차가운 겨울 공기를 한껏 들이키더니 하얀 입김을 후욱 내뱉었다.
“휴우… 그렇잖아도 그 문제 때문에 다들 고민이 많아….”
“그냥 하는 척만 하면 되는 수준인데?”
“애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 모르겠니? 주인님 명령이라서 진짜 직업을 구하고 싶은 마음인거야.”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래?”
리아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유명을 똑바로 쳐다봤다. 매일 보는 얼굴이고 마주하는 눈길인데 왜 이리 사랑스러울까, 유명은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큰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리아처럼착하고 다정한 여자의 몸에 매일같이 자신의 흔적을 진하게 남길 수 있다는 것에 행복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우린 그냥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널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 아냐….”
여기에 순종적이기까지 하다니, 유명은 대답 대신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엉덩이를 주무르느라 외투가 젖혀져 찬 공기가 들어왔으나 리아는 아랑곳없이 뜨겁고 달콤한 숨결을 남자친구에게 선사했다.
“리아 너도 내 노예가 되고 싶은 거야?”
“난 이미 네 노예인걸…, 내가 너 없으면 못사는 여자인 거 잘 알잖아?”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노예라고 생각하니 너무 흥분되는데?”
“후후 나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알아… 하지만 난 리아가 너무 좋아….”
“유명아…….”
사방이 눈으로 덮인 공원 한가운데서 뜨거운 키스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은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사업이니 아이돌이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진심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에 취해서 튀어나온 투정이긴 했으나 이 사랑스런 여자친구에 대한 마음만은 절실했다. 리아가 가볍게 입을 맞춰주면서 따뜻한 미소로 달랬다.
“바보… 마야언니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다른 남자들처럼 헤어지면 되지….”
“너 혹시… 진짜 그런 생각 갖고있는 거야?”
둘은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유명은 다른 식구들에게 꺼낼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놨다.
“내가 걱정하는 건 마야의 마음이야….”
“마야언니 마음…? 어떤 마음?”
“내 성격이나 취향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리아 너만큼 잘 아는 여자는 없잖아?”
“엄마나 유리도 있지만…….”
흐린 뒷말이 뭔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다. 관심과 사랑을 비교한 게 아니라 가족이 아니었던 여자들 중 유명의 변화와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미 말했고 너도 잘 알다시피, 난 마야를평생 곁에 두고 사랑해주고 싶어.”
“으응… 그럼…, 잘 알지…….”
말과 달리 리아는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혜리는 유명의 친엄마라 어떤 일이든 다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다른 식구들은 비슷한 심정이었다.
유명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아직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만에 하나 마야가 버림받게 될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난 마야가 아이를너무 사랑해서… 내 곁을 떠나 아이에게만 사랑을 주고 싶어 하면 어쩌나… 그게 걱정돼.”
“유명아…….”
여자가 마야만 있다면 모를까, 자기가 없으면 못 산다고 하는 여자친구를 꼭 껴안고 있으면서 무슨 걱정을 한단 말인가.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어쩌고 이런 배부른 투정을 하다니.
“그럼… 놓아줄 수밖에 없는 거잖아? 여기는 그런 세상인 거잖아…?”
“……….”
리아는 그 누구보다 유명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없어졌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사랑이 느껴지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젯밤엔 다른 식구들까지 다 임신하면 혼자남는 게 아닐까 걱정돼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어. 마야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을 감으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아서…….”
“바보…….”
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남자친구를 꼭 안아줬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를 거느릴 것 같은 남자가 혼자 남게 될 걱정을 할 줄이야.
교정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답은 얻지 못했으나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진 두 사람은 조용히 내리는 눈송이를 함께 바라봤다.
*****
주말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가족은 유명이 잠든 걸 확인한 뒤 미리 약속한대로 거실에 다시 모였고, 리아가 유명의 걱정을 전하자 유일하게 아들을 낳은 경험이 있는 혜리에게 당시의 심정을 물었다.
“음… 난 그냥 계속 오빠가 좋던데?”
크게 기대는 안 했으나 너무 가벼이 대답하는 걸 보고 다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아가 조금 짜증이 난 말투로 지적했다.
“당시의 상황을 좀… 깊이 생각해서 그때 감정이나 고민 같은 거 자세하게 말해봐.”
“도대체 뭐가 궁금한데? 지금 유명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오빠랑 난 사이가 굉장히 좋았어. 그러니까 유명이 낳고 유리까지 낳았지.”
듣고 보니 이해가 된다.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가 자신들처럼 심각하지 않은 건 매사에긍정적인 성격인 탓일 뿐이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이 이상의 대답이 나올 구석이 없다.
“그냥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되는 거 아냐?”
수지가 허탈해 하는 표정으로 말하자 딸인 아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유명이 걱정을 덜어주고 싶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잖아?”
“그건 그래, 엄마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어?”
“오오~~”
막내 유리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런 말을 하자 다들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탄성을 흘렸다. 고민의 당사자인 마야가 별로 불러오지 않은 아랫배를 습관적으로 쓰다듬으면서 걱정스레 말했다.
“내가 뭐라고 해야 유명이가 믿어줄까?”
“근데 마야 너 아들이면 어떻게 할 거야?”
단짝이 아니면 물어 볼 엄두가 안 날 민감한 질문을 린이 불쑥 꺼내자 식구들이 일부러 못들은 척했다. 그런데 마야의 대답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말투로 선뜻 나왔다.
“아들이면 뭐가 달라져? 엄마도 여전히 좋았다고 했잖아? 난 유명이 곁을 절대 안 떠날 거야.”
“오오~~”
식구들이 유리한테 한 것과 똑같이 탄성을 보내자 마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조금 풀린 걸 보고주디가 눈치껏 말을 꺼냈다.
“근데… 여자가 아기 낳았다고 남자를 떠나는 경우가 있긴 있어?”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어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수지는 당황한 나머지 손바닥으로 주디의 어깨를 철썩 때렸다.
“얜… 뭐 그런 게 궁금해? 나도 아이샤 낳고 버림받은 거라구!”
“버림받았다기보다 나 때문에 싸우고 헤어진 거지.”
아이샤가 얼른 끼어들어 정정하자 수지는 때렸던 주디의 어깨 뒤로 얼른 얼굴을 숨겼다. 덕분에 분위기가 더 가벼워졌고 조금 더 민감한 이야기가 나왔다.
“마야의 마음을 아니까 하는 말이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남자에게 관심이 좀 줄어들긴 해….”
세아가 고백하듯이 털어놓자 혜리가 허리에 손을 턱 얹는 특유의 자세로 새침하게 말했다.
“난 전혀 안 그랬어~!”
“그래! 나 나쁜 년이다! 하지만 나도 리아아빠한테 버림받아서 그랬던 거거든?”
세아는 버럭 화를 냈으나 둘이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잘 아는 다른 식구들은 즐겁게 웃었다. 수지가 옛날 생각이 나는지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도… 유명이 같은 남자였으면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을 거야, 당시엔 아이샤아빠가 전부라고 생각했거든….”
“그럼… 여자들 마음은 결국 남자하기 나름인 거란 말이네요?”
리아가 결론처럼 말하자 다들 정답을 찾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심정으로는 유명에 대한 사랑이 절대 안 변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나도 너랑 이야기한 이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유명이 너무 시원하게 받아들이자 어렵사리말을 꺼낸 리아는 맥이 탁 풀렸다. 남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느껴지면 안 된다고 온 식구들이 매달려 단어 하나 조사 하나까지 신경을 썼는데, 이렇게 가볍게 받아들일 줄이야.
“어휴……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 좀 해주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하하 미안 미안~ 괜한 걱정한 거 같아서 반성하고 바로 털어버렸거든. 내가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설사 헤어지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아서 말야.”
같은 나이인데 어쩌면 이렇게 어른스러울까, 리아는 가슴이 터지도록 솟아나는 사랑에 키스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었다.
“와~ 너희들은 어떻게키스하는 것만으로 영화가 되니?”
둘이 키스에 몰두해 있는 걸 보고 루시가 감탄을 터뜨리자 깜짝 놀라 떨어진 리아는 얼른 고개를 숙여인사한 뒤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갔다. 유명이겸연쩍은 미소를 씨익 지었다.
“어…언제 들어왔어?”
“한참 됐어, 그냥 나가려다 질투가 나서 못 참겠더라구~”
“하하하~”
자주 있는 일이고 남녀직원들의 애정행각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다만 루시의 얼굴엔 질투가 아니라 부러움이 가득했다.
“애들이 흉내만 낼 게 아니라 진짜 직업을 가지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리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유명은 의도적으로 가볍게 받아들였다.
“내가 그러자고 할 때는 문제가 많다고 반대하더니?”
“난 반대 안 했거든?”
“크크 아무튼~ 연습할 시간 부족하다며?”
유명의 지적에 루시는 아직 고민하는 중인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긴 한데, 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만 주면 그게 꽤 괜찮은 아이디어인 건 맞잖아?”
“괜찮고말고~ 찾아보니까 진짜 다른 직업을 가진 아이돌 걸그룹은 없더라구.”
“차별성은 확실히 있어, 여기다 주인님을 모시는 노예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 완전 취향저격이지.”
루시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유명은 확실한 쐐기를 박기위해 일부러 한발 뒤로빠졌다.
“다른 직원들 우려대로 전문성이 없어 보이진 않을까?”
“그런 면은 있어, 하지만 우리 타깃은 일반 대중이 아니잖아? 일반 걸그룹 활동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그러려면 올해 안에 데뷔는 힘들어.”
“연습기간을 더 늘리는 방법도 있잖아?”
“넌 우리 회사가 키우는 아이돌이 걔네들뿐인 줄 아니? 자칫 뒤로 계속 밀릴 수도 있어.”
이 정도면 설득은 끝난 셈이다. 성공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만으로 현재로선 대만족이다.
“좋아, 그럼 건물매입까지 끝났으니까 여기에 맞춰서 속을 채워볼까?”
“그래! 나머지는 내가 직원들이랑 정리할 테니까, 넌 애들을 어떻게 더 힘들게 만들지만 고민해~”
아이돌을 괴롭히는 고민을 돈까지 받으면서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란 말인가.
(다음 114화에 계속)